16장 마지막 실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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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구가 정한 데드라인이 지났다. 진경도 갈색 일기장을 읽어 태구가 정한 기한을 알고 있었다. 진경은 남들 몰래 품었던 열망을 들킨 사실이 부끄러워했지만 한편으론 이를 신경 써준 태구가 고마웠다.

 

“괜찮아요. 정말.”

 

진경은 다진에게 말했다. 다진은 첨언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심을 진경은 알고 있었다.

 

 

 

“여러분에게 오늘은 좋은 소식과 덜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멤버들에게는 나쁜 소식과 덜 나쁜 소식으로 바뀌어 들렸다.

 

“드디어 끝입니다.”

 

닥터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멤버들은 진위를 가릴 수 없었다.

 

“다들 못 믿는 눈치군요. 저도 시간이 더 필요할 줄 알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T의 사고로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나아졌습니다. T를 위해서 잠시 묵념하죠. 고맙습니다. T.”

 

닥터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멤버들은 닥터의 돌발적인 행동에 휩쓸려 그것을 따라했다.

 

“자, 끝이라고 말만 하면 못 믿을 테니 종료일까지 말하겠습니다. 돌아오는 월요일을 시작으로 4주 후에 실험은 끝납니다. 데이터가 부족해도 그대로 끝낼 겁니다. 기한을 타이트하게 정한 저희 쪽 잘못으로 말이죠.”

 

닥터는 보이지 않는 실을 자르듯이 양팔을 교차했다.

 

“여러분들과 맺은 계약은 이번 연구로 마지막입니다. 이 연구를 끝으로 여러분 모두 TRAST 연구소에서 나갈 겁니다.”

 

“갑자기 왜죠?”

 

진경은 반 발자국 나서 말했다.

 

“필요한 데이터는 다 모았습니다.”

 

닥터는 표정 변화 없이 진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닥터의 갑작스런 발표에 멤버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효섭은 탐탁치 않은 얼굴이었고 화련과 막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경과 다진은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유일하게 기쁨을 표출한 사람은 재익이었다. 재익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지막 주에는 여러분들이 희망하는 곳으로 도착지를 정할 겁니다. 오랜 기간 수고한 보상이라고 할까요. ‘M-ONE’이 상용화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M-ONE’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죠. 비용도 비쌀 거고요. 여러분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연구 종료와 상품화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연이은 닥터답지 않은 제안이 믿기지 않았다.

 

“덜 좋은 소식은 3주 동안 저희가 설정한 도착지로 가셔야 합니다. 어떤 도착지라도 말이죠. 별 것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껏 해온 대로 하면 됩니다. 남은 4일은 평소대로 실험에 임하시면 됩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군요. 자! 오늘도 고생해주십시오.”

 

닥터가 마무리 박수를 치자 멤버들은 각자의 거울관 앞으로 돌아갔다.

 

 

 

“정말일까?”

 

진경은 다진이 테이블에 앉자마자 물었다.

 

“음….”

 

다진은 그렇다, 아니다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끝이라니. 닥터라면 숨겨진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다진은 생각했다.

 

“믿을 수 없어. 갑자기 이렇게 끝난다고? 3년이 다 되도록 끝난다는 이야기는 닥터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지금까지 닥터가 거짓말한 적도 없어.”

 

재익은 입을 우물거리며 진경의 말을 잘랐다. 멤버들의 이목이 재익에게 쏠렸다. 멤버들은 재익이 입안에 가득 채운 순대와 고기를 삼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닥터는 한다고 약속하면 결과가 어떻든 지켰어. 안 그래?”

 

재익은 명료해진 목소리로 멤버들의 동의를 구했다. 닥터가 속이 검은 인간이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지켰다. 결과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다른 형태로 보인 적도 더러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다.

 

“그렇긴 하지.”

 

효섭은 시선을 식판으로 떨군 채 호박죽을 떠먹었다. 화련도, 막순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덥지 않은 건 왜일까?”

 

진경은 닥터를 향한 불신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약속을 안 지키면 그때 가서 화를 내든 뭘 하면 돼. 그나저나 흥분되지 않아? 연구소에서 나가면 다들 뭐할 거야? 계획은 있어?”

 

재익은 테이블을 둘러앉은 멤버들의 눈을 차례대로 맞추었다.

 

“너무 꿈 같은 일이라 생각해본 적도 없어.”

 

화련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연구소에서 나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채 빚을 갚기 위해 연구소에 들어오게 된 그녀는 남은 일생을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에서 보낼 것이라 포기했었다. 갑작스레 주어질 자유가 낯설었다.

 

“여기서 나간다고 좋을 게 있나?”

 

효섭은 식판을 비스듬히 들어 호박죽을 소리 나게 싹싹 긁어먹었다.

 

“나가서 손주 보면 되잖아요.”

 

“못 봐.”

 

“왜요. 항상 손주 보고 싶다고 하셨으면서. 막상 나가게 되면 보지 않겠다니 그건 뭔 말이래.”

 

효섭은 식판과 수저를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주는 내가 죽은 줄 알아. 죽은 할애비가 갑자기 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해봐. 놀라 자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내 얼굴은 진즉 까먹었을걸.”

 

“영감, 그래도 멀리서라도 손주 볼 수 있으면 좋지 않겠수?”

 

막순은 작은 눈을 꿈뻑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간다고 쳐. 그럼 돈은 어떻게 벌어. 얘네들이야 젊으니까 다시 시작한다고 쳐도 나 같은 늙은이는 뜨신 밥 주고 재워주는 이 곳이 최고여.”

 

“그러면 연구소장 양반한테 이야기혀. 나는 못 나가겠다고. 그러면 될 일이잖어. 다른 애들한테 찬물 끼얹을 일이 뭐 있어. 입 좀 다물고 있지.”

 

효섭은 누런 눈으로 막순을 노려보았지만 막순에게는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책없이 내쫓진 않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재익은 엉거주춤 일어나 두 노인의 말다툼에 중재를 나섰다. 막순을 노려보던 효섭은 에이, 쯧 혀를 차고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냅 둬. 늙어도 저리 되면 안 뒤여. 벌써부터 걱정하지 말어. 아직 시간 있으니께. 오히려 나는 3주 동안 소장 맘대로 도착지를 정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막순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MIRROR-ONE’ 실험에서 중요한 부분은 도착지다. 탑승자가 도착지를 견디지 못해도 실험은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다. 고통스러워도 그 또한 실험의 일환이라며 닥터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을 만큼 괴로운 곳은 닥터도 피하는 것 같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지만 마지막이라는 전제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태구에게 저질렀던 짓을 모두에게 저지르지는 않겠지. 다진은 생각을 뿌리치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정도까진 안 하겠지. 생각이 있다면….”

 

진경은 다진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닥터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재익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국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마지막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각오는 되어있으십니까?”

 

닥터는 우렁찬 목소리로 멤버들에게 물었다. 멤버들은 각자 의지를 가진 만큼 목소리를 냈다.

 

“좋습니다. 평소대로 실험에 임해주시면 됩니다. 도착지를 저희가 설정했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설정한 도착지로 착륙한 적도 많지 않습니까. 자, 그럼 시작합시다.”

 

마무리 박수 소리가 실험실에 메아리쳤다. 멤버들은 평소보다 경직된 얼굴이었다. 마지막 실험이라는 상황과 닥터가 도착지를 설정했다는 조건이 멤버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괜찮겠지?”

 

‘MIRROR-ONE’에 들어온 다진은 일렁이는 기다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일렁이는 다진은 자신과는 무관계한 일이라는 듯 입술을 샐쭉였다. 윤활제가 발등을 적셨다. 시작이다.

 

탑승자는 한정된 시야를 통해 도착지의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