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첫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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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휴식입니다.”

 

닥터는 실험이 끝난 피험자들을 모았다. 쉬는 날 없이 이어졌던 실험에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던 다진에게 내린 가뭄에 단비 같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소식이었다.

 

별다른 공지 없이도 티타임을 즐기는 멤버들 모두 오늘은 따로 먹자며 전부 방으로 돌아갔다. 멤버의 단합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진경마저 먼저 가겠다며 등을 돌렸다. 다진은 멀어지는 진경의 뒷모습을 보며 모처럼 얻은 휴식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형,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멍하니 서있는 다진을 부른 건 T였다.

 

“어…, 어.”

 

다진은 T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갔다.

 

T는 식판에 샤인머스켓을 가득 담아 다진의 맞은 편에 앉았다. 평소라면 샤인머스켓의 맛과 광택, 유래 같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읊으며 조잘조잘 입을 쉬지 않았을 T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송이에서 포도알을 뜯었다.

 

“무슨 일이야?”

 

T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T는 알알이 분리한 샤인머스켓을 입에 넣었다.

 

“쉰다고 나만 들떠있잖아. 다들 표정이 안 좋은데.”

 

T는 앞니로 샤인머스켓을 절반만 깨물었다. 연두색 과즙이 터지며 달콤한 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T는 손가락을 세워 반만 남은 샤인머스켓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광등에 반짝이는 야들야들한 포도알의 속살을 보며 T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짜증이 난 거야. 나도 조금 짜증났고.”

 

T는 나머지 부분을 마저 입에 넣었다.

 

“아니, 많이”

 

T는 입을 우물거리며 샤인머스켓을 집었다.

 

“형도 어리둥절하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알려주지도 않고 다들 짜증만 내니까. 내가 형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한 것도 형한테 설명해주려고 부른 건데 막상 말하려니까 짜증나네. 후.”

 

T는 출발선에 선 단거리 선수처럼 숨을 골랐다. 긴장은 공기를 타고 전염되었다. 다진도 덩달아 숨을 골랐다.

 

“휴식은 실험의 재설정을 의미해.”

 

“재설정?”

 

다진이 실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가 아는 건 ‘MIRROR-ONE’에 들어가 호스트에 탑승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전부였다. 실험이니까 닥터나 그를 보좌하는 연구원들이 ‘MIRROR-ONE’을 조작하고 모니터링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실험을 조정하는 건 연구진들이 하는 일이고 실험을 재설정 한다고 해서 멤버들이 화낼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니까.

 

“실험 재조정 정도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해. 처음엔 나도 그랬어. 실험을 수정하는 건 평소에서 하는 일이고 대대적으로 실험을 수정하는 건 거시적으로 봤을 때 옳은 방향으로 실험을 이끈다고. 큰 수정들이 쌓여 금방 실험이 끝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어.”

 

T는 한참 쥐고 있던 샤인머스켓을 입 안으로 던졌다.

 

“실험을 재설정하는 건 지금까지 열심히 뛰어온 길이 틀렸다는 거야. 잘못 온 길이든 맞게 온 길이든 뭐든 결과는 쌓였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다시 길을 내야 하고 다시 데이터를 쌓아야 해. 닥터가 원하는 만큼 데이터를 다시 쌓으려면 시간이 그만큼 더 필요해. 그러니까 ‘휴식’은….”

 

“‘연장’이구나.”

 

T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휴식이 짜증나지만 괜찮아. 참을 수 있어. 특별히 인내심이 강한 게 아니야. 형도 알잖아. 나는 나름 실험도 재밌고 연구동에는 바깥에서는 접할 수 없는 특이한 장치들도 많거든. 하지만 사람마다 한계점이 다르잖아. 영영 이곳에서 못 나간다고 포기했다가도 오랫동안 휴식이 없으면 곧 실험이 끝나는 건 아닐까 기대하고 말아. 특히 진경 누나는….”

 

T는 한숨 섞인 웃음을 뱉었다.

 

“진경 누나, 촉망받는 사이클 선수거든.”

 

다진이 타인의 과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티타임에서 멤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도움을 받았지만 개인의 과거는 건드리지 않았다. 멤버들 간에 지켜야할 보이지 않는 규칙처럼. 그래서 다진은 멤버들끼리 서로의 과거를 모른다고 여겼다.

 

“진경 누나는 로드 레이스 사이클 선수야. 자전거로 길이 있는 곳이라면 산이든 강이든 달리는 종목이라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누나는 ‘작은’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선수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TRAST에서 수술을 받았어. 비용이 어마어마 했는데 비용을 대주는 대신에 쓴 계약서가 지금까지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어. 정말 웃겨.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서 받은 수술 때문에 선수로 복귀할 수 없다니.”

 

T는 식판에 남아있는 샤인머스캣을 전부 손에 담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청개구리처럼 볼을 부풀렸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잖아. 공부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뭐든…. 스포츠는 더욱 그렇잖아. 전성기라는 게 있고 몸은 원하지 않아도 노화해. 아마 누나는 1분 1초가 아까울 거야. 다른 선수들이 훈련하는 지금, 자신은 닭장에 갇혀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까.”

 

T는 손가락에 묻은 물기를 바닥에 털어냈다.

 

“누나가 표현이 거칠어도 주위를 잘 챙겨.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적응할 수 있도록 제일 많이 도와줬어. 그리고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해. 잠깐만.”

 

T는 배식구로 가 샤인머스캣을 식판에 가득 담아왔다.

 

“나도 연구동으로 처음 왔을 때는 샤이 보이였어. 그런 눈으로 보지마. 안 믿기는 거 알지만 사실이야. 여튼 당시에 나는 수줍어서 한 마디도 못했어. 이곳은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잖아. 칙칙한 푸른 벽이며 창문도 없는 벽이며. 사람이 오래 있을 곳은 아니지.

 

당시 나는 실험에만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어. 상상이 안 되지? 그 때 손을 가장 먼저 내밀어 준 게 진경 누나야. 덕분에 멤버들이랑 어울리게 되고 잊고 있던 내 모습을 찾았어. 진경 누나가 가끔 내비려 둘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고 말하긴 하지만 농담인 거 알아.”

 

T는 자신을 나무라는 진경이 보이는 것처럼 웃었다.

 

“남들은 얼굴만 보면 으르렁대면서 붙어 있냐고 뭐라하지만 나는 진경 누나를 친누나로 생각하고 있어.”

 

T는 샤인머스캣 송이에서 조심스럽게 포도알을 떼었다.

 

“형은 닥터를 얼마나 믿어?”

 

“닥터? 믿고 말고 할 사람이 아니잖아.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인간적으로는 어떤 거 같은데?”

 

“세상 물정 모르고 연구만 아는 전형적인 과학자…?”

 

T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로 저었다. 완전하고 완벽한 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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