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꿈꾸는 모르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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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진은 침대에서 발을 빼 땅을 딛었다. 다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아직 이불 아래 있는 발을 마저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다진은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직 두 발로 서는 건 무리였다. 다진은 침대 옆에 놓은 지팡이에 손을 뻗었다.

 

다진은 지팡이에 의지해 침대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다진은 아무리 TRAST 연구소 기술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금방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보조 기구를 사용하더라도 말이다.

 

이 박사가 보여준 다진의 엑스레이 사진은 처참했다. 뼈들이 조각조각 깨져 절대 한 덩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몸은 발휘할 수 있는 회복 능력을 뛰어넘어 상처를 수복했다. 다진은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다진은 조만간 지팡이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 박사나 지 간호사가 알려주지 않아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컨디션을 다진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다진은 TRAST 연구소의 기술력이 무서웠다. 이정도로 뛰어난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악성 암은 물론 에이즈나 에볼라 같이 전세계적으로 난치와 불치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병마들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정을 앞당겨서 실험에 참가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바라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이 박사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했다.

 

“참가할 수 있어요!”

 

지 간호사는 이 박사의 말을 돌림 노래하듯 따라했다.

 

요란법석한 소음이 휩쓸고 지나가면 그보다 더 무거운 정적이 병실에 내려 앉았다. 규칙적인 수액 방울이 정적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벌목꾼의 도끼질처럼 묵직하게 귀에 내리 꽂혔다. 수액 한 방울이 떨어지는 시간은 2초. 1296000번의 도끼질이 끝나면 다진은 병실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절반의 수만큼 도끼질이 끝났다. 수액 방울은 쉼없이 떨어졌다. 눈을 감아도 위에서 아래로 투명한 도끼가 어둠을 반으로 갈랐다. 서두르지 않고 정확하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다진이 인정하기까지 열흘이 필요했다. 비루한 두 다리를 침대에서 꺼내 땅에 딛은 순간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업보의 해소와 동시에 새로운 카르마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지긋지긋한 침대 생활도 끝입니다.”

 

마지막 진찰을 위해 이 박사와 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환자의 손목을 시작으로 몸 여기저기에 꽂혔던 주사 바늘과 무릎과 팔꿈치에 동여맨 구속 장치도 제거했다. 가벼웠다. 구속 장치들이 사라지니 다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이 들었었나 봅니다. 보내려니 아쉽군요. 연구동에 가셔도 적응 잘하시고 실험도 무사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치료 목적이 무엇이든 이들은 지금까지 성심 성의껏 다진을 돌봐주었다. 다진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힘들게 살렸는데 죽이겠습니까. 연구동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지만 전다진 씨가 우려하시는 것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실험은 없을 겁니다.”

 

이 박사는 근심 걱정 가득한 환자에게 마지막 처방을 내려주었다.

 

“고맙습니다. 간호사님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진은 손을 내밀었다. 간호사는 다진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 시간이면 사람이 마중 나올 시간인데 조금 늦는군요. 혹시 아픈 데는 없으십니까. 120% 완치라고 자신합니다만.”

 

다진의 몸상태는 최고였다. 수치를 매긴다면 150% 컨디션이었다. 불현듯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가닐거림이 다진의 배를 조였다.

 

“박사님, 수술 중에 실수로 거즈나 메스 같은 걸 빼내지 못하는 일은 없겠죠?”

 

이 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다진 씨의 경우 개복 수술은 하지 않았습니다.”

 

“기계… 같은 거 심어 놓거나 하진 않았죠?”

 

“그런 일은 의사의 명예를 걸고 하지 않습니다.”

 

이 박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마취에서 깬 날, 배가 아팠거든요. 지네가 지나가는 것처럼 꿈틀꿈틀.”

 

“그랬습니까? 같은 부위가 아팠던 적은 또 없었습니까?”

 

“그 뒤로 열흘 정도 가끔씩 배가 조여왔는데 그 뒤론 잠잠해져서 잊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목에 건 청진기를 귀에 끼고 환자의 상의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몸 이곳저곳에 청진기를 옮겼다. 한참을 검사하던 박사는 특별한 문제는 찾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귀에서 청진기를 뺐다.

 

“긴장하셨었나 봅니다. 수술이다 회복이다 실험이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노출되었으니 생체 리듬이 꼬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 문제없군요. 다음 주자가 오네요.”

 

점점 커지는 구두소리가 병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내 병실문이 열리고 짙은 청색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조금 늦었지?”

 

청색 가운은 빈 손목을 들어 박사에게 보였다.

 

“아냐, 덕분에 완벽하게 체크할 수 있었어.”

 

“그렇다면 늦길 잘했군.”

 

청색 가운은 다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다진은 기세에 이끌려 청색 가운의 손을 잡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전다진 씨가 참가할 실험의 책임자인 구효기 박사입니다. 편하게 닥터라고 불러주십시오.”

 

청색 가운은 맞잡은 두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이만 가지. 지 간호사도 고생했어요.”

 

박사와 간호사는 청색 가운과 다진을 따라 병동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이 박사와 닥터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도 환자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이 박사는 환자가 무슨 반찬을 좋아하고 하루 화장실에 몇 번 가는지 까지 아무래도 좋을 사소한 정보까지 공유했다. 정보 교환이 마무리될 즈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다시는 사고 당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이 박사와 지 간호사를 보며 다진은 그들에게 무례하게 굴은 적은 없는지 되짚었다. 딱히 업보를 쌓을 만한 일은 없었다.

 

다진과 닥터는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다진은 닥터와 거리를 두고 작은 공간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이 박사와 지 간호사는 미소를 띄우며 다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닥터가 누른 층으로 움직였다.

 

“실험에 대해 걱정이 많으셨다고 이 박사한테 들었습니다.”

 

닥터는 뒤돌아보지 않고 얘기했다.

 

“누구라도 실험을 해야 한다고 하면 걱정이 앞설 겁니다. 나쁜 생각도 나고. 역사적으로 봐도 강제로 행한 실험이 좋게 기록된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십시오.”

 

다진은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아무리 ‘우리는 위험한 실험을 하지 않아요.’라고 떠들어도 그것이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진 못한다.

 

“일단 이건 강제로 시킨 실험이 아니고 안전한 실험입니다. 물론 사고가 절대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실험이니까요. 하지만 제 지시에만 따르면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청명한 차임이 울리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닥터는 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걷는데 불편한 점은 없죠? 병동에서 연구동으로 넘어가는 복도가 꽤 깁니다.”

 

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그나저나 TRAST 연구소에 친구분이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이 연구소가 뭐하는 곳인지 들었습니까?”

 

“잘 몰라요. 친구와 일 얘기는 하지 않아서.”

 

다진은 TRAST 연구소가 긱이 다니는 회사라는 것 말고 아는 게 없었다. 다진은 긱이 첫 월급 턱을 내는 자리에서 무슨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