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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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고교 동창회에서 술을 마시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머릿속이 온통 깜깜하다. 말 그대로 블랙아웃. 벌써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때가 밤 11시쯤이었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다. 서울 어디쯤이겠지.

주변은 토요일 밤인데도 사람 하나 없이 한산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불이 꺼진 주택과 문이 닫힌 상가들뿐이다. 곳곳에 깔린 어둠은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모처럼 만의 동창회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영식이 새끼가 자꾸 나를 걸고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내가 제일 잘 나갔다는 둥 몇 번이나 나한테 이유 없이 맞았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미친 새끼! 어찌 보면 치욕스러운 이야기일 텐데도 놈의 얼굴은 우월감으로 가득했다.

고등학교 시절 영식이 놈은 일명 내 ‘꼬붕’이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말이다. 난 벌이도 시원찮았고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에게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직원이 열 명인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놈의 빈정거림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모멸감에 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게 술자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한심하게도 이제 와서야 분통이 터졌다.

졸다가 깨서 그런지 온몸으로 한기가 돌았다. 목도 타고 속은 부글부글 끓어 괴로웠다. 너무 마셨나 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헛구역질도 계속 나왔다. 차라리 게워내면 속이라도 편하겠는데 아무리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도 토악질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만 잡치는 동창회에는 나가지 말걸. 후회하는 와중에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혹시 강도나 살인범이라도 만나는 것 아냐? 몸이 약해지니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이 빌어먹을 동네는 왜 이리 조용한 거야?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연쇄 살인 사건도 떠올라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피해자들도 이렇게 어두운 골목에서 변을 당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두통과 복통으로 끙끙대며 걸음을 재촉했다. 찬바람이 불어와 몸을 움츠렸다. 냉기는 온몸을 훑은 후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빨리 어떻게든 하자. 너무 춥다.

덜덜 떨며 어둠 속에서 헤매다 밝은 빛을 발견했다. 24시간 내내 문이 열린 개인 편의점이었다. 간판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주변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반가운 마음에 뛰다시피 편의점으로 향했다. 저기에서 몸도 녹이고 숙취 해소 음료라도 사서 마셔야겠다.

막상 들어와 보니 계산대에 아무도 없다. 안을 기웃기웃거려 봐도 누구 하나 나오지 않는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이제는 편의점까지 날 깔봐? 여기 아무도 없느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반응이 없다.

짜증이 나 여기 장사 안 하느냐고 소리를 쳤다.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당당하지 못한 태도로 보아 일개 점원인 모양이었다. 얼굴도 앳되고 체격도 왜소한 편이라 더 괘씸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얼굴을 구기며 점원을 노려봤다. 그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죄송하다며 굽실거렸다. 왠지 그런 행동이 침을 뱉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점원은 과할 정도로 용서를 구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겁을 먹은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 빨리 보내려는 것이다. 그걸 깨닫자 온몸이 짜릿했다. 나는 손님이고 녀석은 편의점 직원이다. 정규직도 아닌 하찮은 아르바이트생.

즉, 나는 강자고 녀석은 약자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야밤에 혼자 근무하고 있다. 무섭기도 하겠지. 술도 한잔 걸쳤겠다, 녀석에게 몇 마디 해 주고 싶었다. 내가 우위에 서 있다는 걸 확인시킨 후 깔아뭉개고 싶다. 물론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우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보쇼. 손님이 왔으면 바로 나와야 하는 거 아뇨?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해?”

점원은 얼굴이 빨개진 채 죄송하다는 말을 더듬으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 더 비굴한 모습이 나를 자극했다. 확실했다. 녀석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이 가게 사장한테 이렇게 일하라고 배웠어? 사장 어딨어? 사장 나오라고 해!”

주먹을 들어 올려 때릴 것처럼 위협하자 그가 움찔 놀라더니 주머니를 뒤지며 안절부절못했다.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다. 좀 더 우월감을 만끽하고 싶다.

“사장 어딨어? 사장 나오라고 해. 내가 직접 따져야겠어. 대체 직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아, 사장 불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40대 남자가 나왔다. 점원 혼자가 아니었다. 혹시 처음부터 끝까지 CCTV로 지켜본 거 아닐까? 그제야 내 행동이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움츠러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걸어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사장입니다. 앞으로 교육 똑바로 할 테니 노여움 푸세요.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이거든요.”

내 앞으로 온 사장은 싹싹하게 허리를 굽히며 연신 사과를 했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이 사람도 만만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대 같이 큰 키와 유재석을 연상시키는 안경이 그런 인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겨우 편의점이나 운영하는 그렇고 그런 인생인 것이다.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번은 내가 참지. 앞으로 조심해.”

몸도 충분히 녹이고 그 사이 속도 가라앉았다. 우쭐대며 편의점을 나서다가 이대로 가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선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흔치 않은 기회다. 참지 못하고 계산대 앞으로 와 사장에게 말했다.

“가기 전에 충고 한마디 할까? 나, 이 동네 유지야. 시내 편의점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동네 편의점은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안 되지. 왜 시골 가면 텃세라는 게 있잖아? 동네 편의점도 그 부분을 무시 못 한다니까. 나에게 밉보이면 여기서 장사 못 한다고. 알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만족하며 등을 돌렸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또 마누라가 한바탕 바가지를 긁어대겠구먼. 택시는 어디서 잡는담?

“그런데 선생님, 혹시 편의점 CCTV에 대해 아세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사장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 말이에요. 개인 편의점은 CCTV 잘 안 돌려요. 또 돌린다 해도 용량 때문에 금방금방 지우고요. 선생님 바로 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보이시죠? 저거 가짜에요. 그저 구색일 뿐이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계산대 위의 모형 감시 카메라를 살피다가 천장 구석에 설치된 다른 카메라로 눈길을 돌렸다. 이상했다. 모두 모형 감시 카메라였다.

“우리 편의점은 CCTV가 작동되지 않아요.”

말을 마친 사장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이 위화감은 대체 뭘까? 그러고 보니 이곳은 보통의 편의점과 달랐다.

상품이 진열되지 않은 텅 빈 매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가격표나 행사 알림판도 붙어 있지 않다. 매출에 별 관심 없는 내부와는 달리 출입문과 유리창에는 광고지가 빼곡히 부착되어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광고지를 붙일수록 지원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장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긴장했다.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지나쳐 출입문으로 향했다. 위로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돌리고는 계산대에 들어간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왜 출입문을 잠근 거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 계산대에 선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왜일까, 이 씨발 놈아?”

갑자기 사장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당황했다. 속된 말로 똥줄 탄다고 하지 않는가. 습한 기운이 항문에서 시작해 엉덩이골을 뜨겁게 훑으며 위로 올라왔다. 저렇게 욕을 내뱉는 건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아무 거리낌 없는 저 당당함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사장이 계산대 밑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안을 더듬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날카로운 소음이 묻어난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쇠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출입문으로 무작정 뛰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는 게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출입문에 달라붙어 잠금장치로 손을 뻗었다. 어서 달아나야 해!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