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모노레일 (제1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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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연인이
타임리프를 통해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당신은 누구세요? 넌 뭐야? 아저씬 뭐예요? 후더퍽아유?

근육질, 블론드, 교복, 안경 등 다양한 남자들이 서로 통성명을 했다. 그들은 ‘늘’을 한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늘어섰다.

헤어지고, 원수졌고, 다시 볼까 두려운, 절대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전 남자친구들 열 명. 두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2016년이라니, 11년 전이잖아.”

누군가가 말했다.

“5년 후인데?”

H가 말했다.

“10년 후라고요.”

A가 소리 질렀다.

늘은 어지러웠다. 둥글게 둘러싸서 자신을 보고 있는 눈빛들을 보자 돌아가는 찻잔기구를 타고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뇌가 간질간질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한꺼번에 존재할 수 없는 여러 개의 세계가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간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 말이다. 사랑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섯 단계를 거쳐 간다.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로 급히 옮겨가기도 하고 다섯 번째에서 두 번째로 가기도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단계가 있는데 바로 첫 번째 단계이다. 영화에서 보면 배우들이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나오거나 돈이 많이 든 것 같은 특수효과를 쓰는 단계였다.

첫 단계가 가장 강렬했다. 뇌는 아드레날린을 마구 내뿜고 심장은 뛰고 손에는 땀이 나고 온갖 금단현상에 시달린다. 호르몬의 장난으로 오는 도취감과 식욕부진, 집중력 부족, 불면증 같은 부작용이 있다. 한번 그런 중독 증상에 빠지면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지금 성격과 가치관과 국적, 나이, 성별, 체격이 다른 열두 명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건 내 시간이야. 모두 나를 기준으로 맞춰 있는 거야. 나와 사랑에 빠진 순간, 그때로.”

늘은 놀라며 말했다.

“스물네 명의 연인을 사귀어보도록.”

열다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아빠가 늘에게 명령했다. ‘내일까지 알파벳을 다 외우도록.’이니 ‘한 시간 안에 네 방을 청소하도록.’ 하는 과제를 내릴 때와 같은 어조였다.

왜 스물넷이냐고 물어봤더니 아빠는 대답을 못 했다. 알파벳이 스물네 자라서 그렇겠지. 늘은 생각했다. 아빠는 그녀에게 영어 스펙처럼 연애 스펙을 쌓게 해주려는 거였다. 카드놀이나 야구, 요리를 가르쳐준 사람도 아빠였다.

“쇼핑이랑 비슷한 거구나. 아빠.”

다른 열다섯 살들처럼 그녀도 적극적으로 게임소프트웨어와 헬로키티 핸드폰커버 등을 구매, 소비문화에 일조하면서 청소년의 낭만과 꿈을 키우던 중이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써야 하니까 튼튼하고 고장이 안 나는 사람으로?”

불량품, 허위광고, 공동구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삶의 아픔과 행운을 동시에 깨달아 가고 있던 그녀는 심각하게 물었다.

“비슷해. 영원히 너를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지.”

영원히. 아빠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해피엔딩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왕자가 필요했다. 단 한 명. 그럴 때면 그녀는 아빠의 공주님이 생각났다. 다른 아파트 십오 층에서 다른 남편과 딸과 함께 살면서 ‘영원히’ 늘과 아빠를 사랑한다고 하는 엄마.

어쨌든 그녀는 아빠가 준 과제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A.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열다섯 살 A가 떠났을 때 그녀는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곧 알파벳 연인 행진을 다시 시작했다. B, C, D, E, F…… 행진을 멈추지 못한 것은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었다. 양말을 오른쪽부터 신을지 왼쪽부터 신을지 고민하는 그녀에게 세상에는 선택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부터 오지선다형 문제들까지.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햄버거를 사 먹을 때에도 치킨, 새우, 쇠고기로 만든 버거 사이에서 주저했다. 햄버거 하나에 바다 하나 육지를 넘나드는 선택 범위라니. 소스 종류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칠리, 스윗 사워, 간장. 인간이 구별해 낼 수 있는 맛을 총망라한 선택의 기로에 서서 좌절했다.

스타일로는 오대양 육 개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요리법. 지중해식. 태국식 멕시코 식 등 선택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선택해도 계속해서 선택은 늘어났으니 더 이상 진리는 없고 다양성만 남은 세상이었다.

스물여섯이 넘어버린 어느 날 그녀는 연인 선택에 지쳤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람,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들,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원히 방황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스물네 개, 아니 스물네 명이나 주문하고 스물네 번이나 반품해야 하는 거야?”

그녀가 불평했다.

“물론 스물네 명은 많아 보이지.”

아빠는 목소리 톤을 낮췄다.

“구두를 평생 한 켤레만 신을 수 있다고 생각해 봐. 선택이 중요하지.”

아빠의 말에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색깔. 소재. 스타일. 모든 점을 만족시키는 단 한 번의 구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제였다.

그러던 일 년 전,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제자리에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어야 안심하는 그녀는 큰 시련을 맞았다. 아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수요는 공급을 낳았다.

Z와 연인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는 열한 번째 연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Z였다. 마지막이니까.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한 달 후에.

어젯밤, Z는 그녀가 좋아하는 인도음식점에서 로소골라식 설탕케이크에 작은 초를 올렸다. 일 주년 기념일에 초가 두 개나 올라와 있었다. 불을 껐고 채식주의자 메뉴에 있는 커리와 여러 종류의 난을 먹고 집에 왔다. 성공적인 기념일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 기념일이란 것을 Z가 미처 몰랐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두 번째 기념일로 착각한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하며 수면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자리에 눕자 곧 수면제 기운 덕분에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첫 번째 남자친구라면 기념일을 절대 잊지 않았을 것이고, 네 번째 남자친구는 기념일에 더 헌신적이었고, 열 번째 남자친구는 여자들이 기념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더 말이 통했어. 그건 어차피 과거일 뿐이잖아.

하지만 남편이라고는 한 명이지. 남편은 첫 번째든 백 번째든 한 명이야…….’ 자꾸 말을 반복하자 마음도 가라앉고 잠도 오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첫 번째가 한 명이든 오십 명이든 무슨 상관이람. 그게 아니지…… 한 명이 오십 명이든 열 번째든.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지만 곧 깼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쳤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약간은 외로웠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녀는 침대 옆 테이블을 손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노트북이 만져졌다. 곧이어 어두운 방에서 빛을 발하는 윈도 로고가 노트북 화면 안에서 켜졌다.

비밀번호는 열려라 참깨. 그리고 마우스를 두 번 클릭했다. 폴더가 열렸다. 연인들의 폴더였다. 그들과 함께했던 사진과 이메일, SNS 메시지 기록 등이 저장된 추억상자였다. 그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들었지만 그녀의 인생 기록들을 보면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이 맞았다.

연인들과의 기록은 모두 장르가 달랐다. 어느 해의 여름은 호러 스릴러였고 어느 해의 겨울은 따스한 감성 멜로였다. 상대방에 따라 달랐다. 자신의 모습도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때그때마다. 그러니까 인생은 퓨전이라고 늘은 생각했다.

A부터 Z까지 차례차례 열었다. 타임머신을 연 것처럼 그녀는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때의 생생한 향과 느낌을 만지듯이 느꼈다. 행복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닭살 돋기도 하고 속이 안 좋기도 했던 시간들이 열렸다.

잘 가.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바스락. 바스락. 연인들의 사진들과 메시지들이 휴지통으로 들어가며 소리를 냈다. 모두 사라졌다. 안녕. 그녀는 다시 말했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한 달 후면 Z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그들은 모를 것이었다.

이미 헤어진, 실패한 연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가 일일이 연락해서 그 반응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의 반응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그들은 영원히 그녀의 기억 속에만 남아 다른 우주에 살 거였다.

사라진 것은 폴더 하나였지만 그녀는 위가 빈 것 같이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위잉거리는 컴퓨터의 소리가 공허한 방 안을 울렸다.

그녀는 조금 침울해졌다. 나쁜 일들은 오해나 타이밍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면 서로의 관계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서로에 대한 오해가 사랑을 만들었지만 또 오해가 사랑을 끝내게 했으니까.

늘은 불 꺼진 창밖을 쳐다보았다. 비가 내리는지 물안개가 희뿌옇게 올라왔다. 혼란스러웠다. 오늘이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헷갈리는 날처럼, 헤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그들과 각각 어떻게 헤어진 것인지 잊었다. 예전의 연인들이란 그녀에게 개봉이 취소된 영화처럼 씁쓸한 그녀만의 영화였다. 새드 엔딩. 좋은 추억들이지만 왜 한결같이 새드 엔딩으로 끝났는지. 왜 헤어졌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필연보다는 우연 같았다.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자신과 그들을 하늘에서 갈라놓고자 수를 쓴 것처럼 부당하게 느껴졌다. 편지 폴더에는 메시지들이 워드 파일에 복사되어 남아 있었다. 사진 폴더보다 더 생생했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사랑에 빠진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주로 나쁜 기억들은 없애고 좋은 기억만 남겨 놓는 법이니까 그들은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고 비록 서로 엇갈려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사랑은 영원히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늘은 다시 사진파일 위에 커서를 댔다. ‘복구’라는 명령 앞에서 불이 깜박깜박했다. ‘복구’라는 명령을 내리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진들은 다시 폴더로 돌아왔다. 그 때 갑자기 새로운 이메일이 하나 올라왔다.

오 늘 님, 유크로니아랜드 러브 모노레일 무료 탑승을 축하드립니다.

뭔가에 당첨되다니. 감동이었다. 러브 모노레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인생에 당첨이라니. 늘은 재빨리 초대권을 다운받았다. 연인들이라면 한 번은 꼭 가게 되는 놀이공원인 유크로니아랜드. Z와는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일 년 전 그때만 해도 그녀는 Z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만나고, 매일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시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체된 둘 사이가 상큼하게 변할 계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긴 한 번 와봤잖아.”

Z가 툴툴거렸다. 놀이공원에 간다는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검은 슈트를 챙겨 입고 와서 좀 더운 참이었다. 서른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애들처럼 놀이공원에 오다니. 좀 짜증이 났다.

수도권 끝자락에 위치한 거대한 규모의 유크로니아랜드 안의 엇사이 공원은 십만 평방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공원 천장은 돔으로 막혀 있었다. 인공 하늘을 만들어서 밤낮과 계절을 자유자재로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공원 초입은 동굴같이 보였다. 길게 늘어선 꽃담 가운데 인동덩굴로 만든 아치형 동굴이 바로 엇사이 공원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늘과 Z는 고개를 내밀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계단 아래 한참 너머에 겨울 숲이 아스라했다.

“춥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괴물이 나오지 않을까?’였다. 늘은 Z의 손을 잡고 걸어 내려갔다. 십 미터 간격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었다. 계절뿐 아니라 걸어가다 보면 하루의 시간대도 달랐다. 가로등만 드문드문 선 밤을 지나 노을이 지는 오후였다가 한낮이 되었다.

늘은 겨울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을 떼어 조그만 눈 공을 만들었다. 연못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연못 위를 걸었다. 미끌미끌. 하이힐이 얼음에 미끌거렸다. 다행히 얼음 연못 다음은 가을 단풍 길이었다. 길들은 미로처럼 서로 엇갈려 있어서 머릿속의 기억들처럼 두서없이 존재했다.

사계절로 갈라진 길 중 어느 곳을 통해 걸어도 결국 원천호수에 닿았고 어느 길로 가도 다른 길과 엮이게 되어 있었다. 꿈꾸듯 걷다 보니 어느새 바로 눈앞에 러브 모노레일 정류장으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정류장 바로 아래에는 큰 소나무가 서 있었다. 삼백 년이라는 나무의 나이가 자랑스럽게 푯말에 적혀 있었다. 엇갈린 사이들도 다시 이어진다는 소원의 돌무덤도 보였다. 늘은 돌 하나를 주워 맨 위에 올렸다. 어디서부터 Z와 엇갈렸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달 전에 그와 함께 본 영화를 그가 재미없다고 한 때부터였는지 헤어스타일을 망치고 데이트에 나간 그날부터였는지. Z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 느낌이 뭔지 그녀는 알았다. 연인들의 마음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엇갈린 제 사랑을 이어주세요.’

늘은 눈을 감고 기도한 뒤 돌을 얹었다. 장난을 하듯 킥킥댔지만 마음 한구석 진지했다.

늘은 Z와 함께 모노레일 정류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몇 걸음 더 가자 표지판 한 줄이 읽혔다.

러브 모노레일, 엇갈린 연인이들 나만는 노모레일.

바로 아랫줄은 글씨체가 더 작았다.

뒤에서 갈엇린 연은인 뒤으쪽로 타시오.

자세히 보니 ‘뒤쪽으로’라는 말이 ‘뒤으쪽로’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두 걸음 더 다가섰다.

에앞서 엇갈린 연은인 앞으로 타시오.

이것도 말이 안 됐다. 그 아랫줄을 읽기 위해서 그녀는 표지판에 눈을 바짝 갖다 대었다.

표지판이 무슨 계약서도 아닐 텐데 다음 줄은 7폰트 정도로 깨알같이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옆에서 갈엇린 사람은 옆로으 타시오.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뒤죽박죽인 글이 다음과 같이 또렷이 읽혔다. ‘러브 모노레일. 엇갈린 연인들이 만나는 모노레일. 뒤에서 엇갈린 연인들은 뒤쪽으로 가시오. 앞에서 엇갈린 사람은 앞으로 타시오.’ 뒤죽박죽으로 써도 잘 읽히다니 글씨를 한 자씩 순서대로 쓸 필요가 없잖아, 라고 생각하며 늘은 정류장에 서서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계절과 밤낮의 다양함이 정류장을 중심으로 해서 둘러쌌다. 한 번에 모든 계절을 눈앞에 볼 수 있다는 뜻은 온갖 다양한 식물들과 꽃들, 과일, 밤낮이 한꺼번에 펼쳐진다는 뜻이었다. Z는 어젯밤도 야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데이트 자체가 지루해서인지 벌써부터 하품을 시작하고 있었다.

“초대권을 보여주십시오.”

어디선가 울긋불긋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셔츠 안의 팔 근육이 심상치 않았다. 머리에 쓴 시계가 그려진 우스꽝스런 모자만 아니었다면 조직폭력배의 주요 멤버로 보일 남자였다. 늘은 잘못 한 일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Z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예. 맞군요. 러브 모노레일에 탑승하게 되신 걸 환영합니다. 반짝반짝.”

초대권을 확인한 뒤 시계모자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애교가 가득한 미소에 늘과 Z는 멍해졌다.

“탑승시간은 삼십 분입니다. 러브 모노레일에서 원하는 사랑과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험악한 무표정으로 시계모자가 말했다.

빨간 모노레일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열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같이 타시게요?”

시계모자가 그들과 함께 올라타자 Z가 물었다.

“전 안내원이니까요.”

말투는 정말 공손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천천히 걸어가듯 움직이는 모노레일의 차창 밖을 통해 보는 바깥풍경이 조금 변한 것 같아 늘은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달라졌는데 딱히 뭐라고 꼬집을 만한 달라진 점은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깨달았다. 햇살이었다. 봄꽃으로 흐드러졌는데 햇살은 난데없이 가을 햇살이었다. 봄에 가을이 끼어든 거였다.

봄 햇살은 사진 보정 작업을 뽀얗게 한 느낌을 주어서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면 가을햇살은 가슴이 시리게 투명했다. 마치 죽기 전에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으로 기억하기 위해 보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시리지만 담담하고 매우 맑았다. 엇사이 공원에서 십 미터마다 바뀌는 계절이 러브 모노레일 안에서는 사계절이 섞인 경험을 하게 했다. Z는 사람들이 없는 다른 칸들을 돌아다니며 구경 중이었다.

“’당신의 첫사랑 역’에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무슨 역? 그녀는 얼어붙어 버렸다. 멈춘 모노레일에 A가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십 년 만에 A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A는 유원지에서 그녀랑 놀던 그대로 열다섯 소년처럼 보였다. 고수머리에 마르고 콧잔등엔 여드름이 핀.

“키만 큰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도 바뀌었어. 모르겠어?”

예전과 다름없는 상남자 A의 무심함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 A는 그녀가 기습적으로 첫 뽀뽀를 했을 때도 무심했다.

“화내지 마. 너 화내니까 꼭 우리 엄마 같다.”

A는 입을 삐죽거렸다.

“너희 엄마라니. 그 정도는 아니야. 잘 보라고.”

“보여. 눈가랑 입가에 주름이 일곱 개나 있어. 도대체 화장실에서 뭔 짓을 한 거야. 여자들이란.”

A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입가에 주름이라니. 내 나이에 말도 안 돼.”

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가랑 눈가에는 주름, 주름, 주름이 무럭무럭 자라고. 그리고 치마로 왜 갈아입은 거야. 불편하게.”

A가 노래 부르듯이 말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늘! 내려서 저거 타러 가자.”

A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멀리 산처럼 솟아 있는 철재구조물이 보였다. 다음에 놀러 오면 롤러코스터를 타자고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놀았었다. 돌아가는 회전목마. 맞아. 이런 느낌이었다. 엄마 없이 항상 혼자 놀던 늘은 밝은 A을 통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웠다. A와 있는 동안은 세상은 밝고 맑고 깨끗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보지 않을 정도로 A를 잊어버렸을까. 그해 겨울에 A가 죽어버려서였을까.

늘은 십 년 전에 죽은 첫사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은 아무래도 결혼 스트레스와 수면제 남용 때문에 환각을 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는 꼬마야?”

다른 칸을 구경하다가 온 Z가 물었다.

“저 애가 보여?”

늘이 Z에게 되물었다.

“이 아저씨는 누구야?”

A도 늘에게 물었다.

“잠깐만 생각 좀 하고.”

늘은 빠른 말투로 내뱉고 나서 A가 손에 들고 온 스트로베리 스무디를 뺏어서 들이켰다. 목이 탔다. 그리고 맛도 없었다. 십 년 전 바로 그 불량 스무디 맛 그대로였다.

“더럽게.”

A는 그녀의 손에서 스무디를 뺏은 뒤 그녀가 입을 댄 빨대를 어떡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나요?”

A와 Z과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늘이 안내원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즐겁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왠지 관음증 환자 같았다.

“글쎄요. 놀라시긴 아직 이른데. 흠. 고객님은 참 많이도 엇갈린 분이시더군요. 요즘 사람들이 뭐 다 그렇긴 하겠지만.”

안내원은 그녀를 피곤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의 엇갈린 사랑들 역’에 정차하겠습니다.”

모노레일이 다시 멈췄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Z는 앞, 뒷문을 통해 찌질한 남자 생물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모두 열두 명. 멍한 표정들이었는데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늘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혹시 눈의 오류가 아닐까. 그녀는 눈을 오랫동안 감았다가 떠보았다. 모두 사라지지 않았다. 열 시 방향에 D가 보였다. 깜박. 열한 시 방향에는 G. 아홉 시 방향에는 회색 라이더재킷을 입은 I가 후광을 빛내며 다가왔다.

두 시와 네 시 방향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한 명은 검은 재킷을 입은 날씬한 남자였고 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가오는 다른 한 명의 남자는 처음에는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맹세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서늘해서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늘은 눈만 깜박거렸다. 차가운 스무디 종이컵이 남긴 축축함이 그녀 손에 머물렀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