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와 시나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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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전에 한 적이 있던가요?”

그가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은, ‘최근에 누군가와 감정적인 교류를 가져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였다. 사실 한참 답이 없었기에 이 질문은 헛수고로구나 하고 질문자도 포기할 무렵이었다.

예도 아니오도 아닌 엉뚱한 저 한마디만 불쑥 던진 후 그는 또 한참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 숱이 많고 덥수룩한 머리만 만지작거릴 뿐. 그 머리는 먼지 쌓인 부연 창문에서 스미는 햇빛을 받아 원래보다 더 붉어 보였고, 안경 너머 내리깐 눈은 잠이라도 든 것처럼 조금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물론 그가 ‘이 이야기’란 걸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도 질문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 끝에, 그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듯 허공으로 던진 시선은 이미 멀리 떠나 이 시간, 이 장소가 아닌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질문한 상대방 또한 없는 세상이었다. 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느리게 목소리를 냈다.

“아마도 2년 전, 겨울 끝 무렵…….”

싸구려 머그컵이 달칵 소리를 냈다. 하얀 손이 뻗어와, 테이블 가장자리에 떨어질 듯 불안하게 걸쳐졌던 컵을 바로 놓았다. 이어서 그 손은 커피 서버를 내밀어 컵에 커피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는 신문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러자 기름으로 끈적거리는 메뉴판이 그의 안경과 신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식사는?”

1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샌드위치, 구운 가지와 양파가 들어간……”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눈앞에 들이밀려진 메뉴가 휙 빠져나가더니 웨이트리스는 끝까지 듣지 않고 바쁜 듯 가 버렸다. 뭐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밤샘 근무로 자신이 피곤한 만큼 웨이트리스도 바쁠 권리는 있을 테니. 그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움츠리고는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머그컵이 테이블 안쪽에 안전하게 자리를 차지한 덕에 신문을 펼칠 장소가 더 좁아졌다.

두 번째로 무례하게 접시가 밀고 들어왔을 때도 그는 짜증 내지 않았다.

“주문하신 그릴드 샌드위치와 달걀 나왔습니다.” 쾌활한 음성으로 좀 전의 웨이트리스가 아침 식사를 내려놓았다. 짜증은커녕, 그 접시를 보았을 때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삼 웨이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반응이 재미있는 듯 싱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자는 늘 해시브라운이고, 달걀은 오늘은 스크램블드에그. 맞죠?”

정확하게 맞았다. 혹시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인가 했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윤기 없는 금발을 아무렇게나 위로 틀어 올린 비쩍 마른 웨이트리스는 그냥 한번 웃고는 저쪽으로 바쁘게 가 버렸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접시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 식당에 드나든 지도 벌써 3년. 이곳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가깝고, 적당히 시끄럽고, 24시간 오픈인 데다가 다른 곳을 찾기 귀찮아서 습관처럼 오다 보니 본의 아니게 3년이나 계속 찾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처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도 부담 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식당이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맛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그 3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주문도 하기 전에 알아서 나온 접시가 이상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빈약한 그릴 샌드위치와 뻣뻣한 스크램블드에그가 덩그러니 접시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귀찮아진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신문을 옆으로 접고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며칠 후, 오전 11시. 그는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 앉아 또 구깃구 깃한 신문을 펴서 읽고 있었다.
커피 서버는 한 손에, 기름때 묻은 메뉴는 한 팔에 낀 같은 웨이트리스가 찾아왔다. 그녀는 그를 웃음기 띤 눈으로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반숙 프라이군요.”

“어떻게 알았나요?”

그가 묻자 그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직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문서에 커피를 체크하고는 가득 찬 머그잔을 가져다주었다.

“손님, 주변에 별로 관심 없죠?”

“……네?”

“거의 매일 같이 여기서 식사하면서도 매일 보는 웨이트리스도 기억 못 하잖아요. 내가 2~3일에 한 번씩 당신에게 주문 받는 것도 몰랐을걸요. 늘 같은 샌드위치에 커피 두 잔. 사이드로는 해시 브라운하고……”

그녀는 마치 사람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이라도 부리듯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철야한 새벽에는 스크램블드에그를 시키더군요. 평소에는 반숙 프라이고.”

자신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나 싶어 그는 손톱을 입가로 가져갔다.
철야한 건 또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 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침 6시도 되기 전에 다 구겨진 옷차림과 피곤한 얼굴을 한 남자가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에 들어서면 뻔한 것 아닌가.

기억도 못 하던 웨이트리스의 관심이 성가시다는 생각보다, 그는 그저 생판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 요즘 자신이 비어 보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위태롭거나 불안한.

저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나몬!”

곧 간다고, 크게 대꾸한 후 그녀는 가슴에 단 명찰을 그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시나몬이라 적혀 있다.

“난 보통 오후 1시까지 있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요.”

마치 손아래 동생을 어르듯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주방 쪽으로 종종걸음 쳤다. 아주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접시를 가까이 당겼다. 샌드위치를 두 입 정도 먹었을 때 이미 그는 시나몬이란 여자에 대해서 잊었다. 할 일이 많았다. 며칠 정신없이 본부와 현장과 잠복근무 사이를 오가는 동안, 그 일은 완전히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날이었다. 겨울은 순순히 물러가지 않고 끝내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시경 본부 정문에서 몇 걸음 걸어오는 사이 머리와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버린 그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식당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반사적으로 주문하고 흐려진 안경을 닦았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커피 서버를 들고 에이프런을 두른 실루엣이 비쳤다. 그 실루엣이 그의 젖은 머리 위에 커다란 냅킨을 떨어뜨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네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기억 속에서 시나몬 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묵묵히 그가 머리를 닦아 내는 동안 그녀는 그의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 스크램블드에그에 감자튀김. 의아하게 바라보자 시나몬은 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좀 전에 튀김 기름을 갈았어요. 해시드브라운보다 지금은 감자튀김이 나을 거야.”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철야한 새벽만큼이나 피곤해 보이는 걸까, 하고 그는 스크램블드에그를 보며 생각했다. 두툼하게 썰어 갓 튀겨내 온 뜨거운 감자튀김은 그녀 말대로 해시드브라운보다 더 맛이 좋았다. 별말 없이 샌드위치와 감자와 달걀을 먹는 그를 내려다보던 시나몬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즐거운 듯 말했다.

“1시 정각 땡땡! 내 업무 시간이 끝났네요. 여기 앉아서 손님이랑 수다 떤다고 뭐랄 사람 없겠지?”

시나몬은 태연하게 에이프런을 벗어던지더니 그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차가운 물방울이 맺히고, 식당 안은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 가라앉듯 단조로운 음악이 섞이고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잡담을 하듯 요즘 날씨와 주방장에 대한 불평과 예전에 살던 동네 이야기를 섞어서 떠들었다. 그녀는 웨스트 미드웨이 출신이고 계속 버나드에 살다가 이곳 윈즈데일에는 6개월 전에 이사 왔다고 했다.

아무런 두서도 맥락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시나몬의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묵묵히 들으며 그가 마지막 감자튀김과 달걀을 다 먹었을 때, 시나몬은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며칠 안 보이더라.”

“아니. 하는 일 때문에.”

“그러고 보니 직업이 뭐예요? 이른 새벽에도 불쑥불쑥 나타나고. 수상한 일 하는 거 아니죠?”

그는 맹물 같은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조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찰.”

“거짓말.”

“…….”

“설마. 진짜?”

와, 하면서 그녀는 새삼 놀리는 듯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비에 젖어 아직 조금 축축한 재킷 위로 느슨하게 감아 늘어뜨린 낡은 목도리, 숱이 많은 붉은색 고수머리, 큰 안경 탓에 그는 방심하고 있으면 허술해 보였다. 그에 비해 머그컵을 쥔 손은 놀랄 만큼 날렵하고 야무졌지만. 그는 조금 어색한 듯 컵을 따라 테이블 위에 동그랗게 얼룩진 갈색 자국을 내려다봤다.

“뭐, 별것도 아니지만요.”

“별거 아니긴. 어디서 컴퓨터나 만지는 학생처럼 생겼다 했는데 배지 씨일 줄이야. 그럼 이름은? 이름은 뭔데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나?”

아이처럼 시나몬의 미소가 환하게 밝아졌다. 안 될 이유는 없다.
그는 손톱을 깨물며 툭 내뱉듯 답했다.

“Kate.”

확인이라도 하려는 양 시나몬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케… 뭐? 케이트?”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의 엷은 녹색 눈을 들여다보더니 시나몬은 쿡 하고 터지는 웃음을 손등으로 막았다.

“진짜? 아무리 봐도 여자처럼은 안 보이는데. 헬로우, 미스 케이트. 헬로우, 캐서린?”

“그게.”

그는 덥수룩한 붉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물론 다시 흘러내려 무성하게 안경테 위까지 덮었지만.

“본명은 아니지만요.”

“그럼 뭔데요? 무슨 코드명 같은 거라도 돼요?”

뭐라고 대답할까 싶어 곤혹스러워하던 그가 고개를 얼결에 끄덕이는 걸 보고, 시나몬은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듯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우리 식당에 제임스 본드가 있었어!”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코드명도 아니고…… 별명이라 해야 하나.”

“변명도 서툴러.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진짜로 케이트 아니에요?”

다른 손님들과 종업원들마저 전부 쳐다볼 정도로 그녀가 하도 거침없이 웃자, 조금 오기가 난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안주머니, 바지 뒷주머니, 여기저기 손을 찔러보다가 재킷 주머니 안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녀 앞에 확 펼쳐 보였다. 코앞에 뭔가 스쳐 가자 시나몬은 눈을 깜박였다.

“뭔데요? 못 봤어요.”

“내 경찰 ID요.”

“다시, 다시.”

이번에도 휙 하고 지나가자 고개를 쭉 빼서 따라가던 그녀는 화를 냈다.

“보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미스 케이트.”

“소속 부서가 적혀 있어서 자세히 보면 안 된다고요.”

“그럼 보여주질 말던가, 미스 케이트.”

표정 없이 투덜거리면서 그는 다른 지갑을 꺼내 들었다. 운전면허증을 펼쳐 보여주자 시나몬은 다시 못 감추게 두 손으로 꼭 잡고는 꼼꼼히 살폈다.

“헤에, 정말 멀쩡한 이름이네. 그런데 어쩌다 케이트가 됐대요.”

“별명이라고 했잖아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 나도 그쪽이 익숙하고.”

“흐음, 생일이 4월이구나. 나보다 네 살 어리고.”

“……그만 봐요.”

그가 지갑을 잡아당겨도 시나몬은 웃으면서 한참을 더 들여다보았다.

“뭐야, 사진 언제 찍은 거죠? 머리 짧으니 더 젊고 잘생겨 보이네. 근데 찍을 때 좀 웃지. 이게 뭐야.”

장난스럽게 그와 실랑이를 한 후 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요. 쓸데없는 수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케이트. 아니, 케이트 말고 본명으로 불러줄까요? 미스터……”

“됐어요.”

성가시니 그냥 케이트라고 부르라며 그는 다시 지갑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왜 하필 케이트예요?”

“단순한 착오로…… 별일 아니었어요.”

“그 말 자주 듣네. 별건 아니라는 거 입버릇이죠?”

“그럴지도요.”

“이 손님, 주변에 관심도 없고 귀찮으면 얼버무리는 성격인가 봐.

그런 사람이 용케도 내 쓸데없는 수다는 잘 들어줬네.”

“듣는 건 좋아하는 편이라서.”

잘 됐네. 난 말하는 걸 좋아하니. 고개를 쳐들며 시나몬은 중얼거렸다.

약간 눈썹을 찡그린 그녀는 붙임성 좋은 웨이트리스보다는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여교사 같았다. 반년 전에 처음 이 도시에 와 2개월 전부터 이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는 여자. 케이트란 별명이 이상하다고 핀잔하면서도 자신은 시나몬이라 불리길 원하는 여자.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빛바랜 금발에 깡마른 허리에는 싸구려 식당의 검은 에이프런을 감은 여자. 그녀는 그렇게 케이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별것 아니다.

“오늘의 서비스.”

커피 잔 옆에 오렌지주스 잔을 하나 더 내려놓으며 시나몬은 거들먹거렸다. “커피만 마시면 뼈가 삭는단 말 못 들었어요?”

뼈가 삭는 것보다 총 맞아 죽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케이트는 묵묵히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아는 친한 웨이트리스가 있다는 건 때로는 편리했다. 아침과 점심 사이의 잠깐 한가한 시간이라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키가 껑충하게 큰 여자라 스커트 사이로 무릎 스타킹의 밴드가 드러났지만 또 그런 걸 신경 쓸 성격도 아니었다.

“이제 봄인데 그 목도리는 언제까지 하고 다닐 셈이에요?”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테이블에 걸쳐진 지팡이도 발견했다.

서른 전후의 창창한 젊은 남자가 목도리에 지팡이라니.

“……노인이야?”

기가 막힌 듯한 눈을 하는 그녀 앞에서 마지막 커피 한 모금까지 마신 후 케이트는 천천히 대답했다.

“비슷하죠. 목도리도 지팡이도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거니. 비번일 때는 지팡이에 햇볕도 쬘 겸 공원에 가기도 하고요.”

“왜? 어째서? 차라리 펫을 키우지? 지팡이를 키우지 말고 개라도 산책시켜요!”

“개나 고양이는, 애인이 싫어해서. 사실은 이 목도리도 지팡이도 싫어하지만.”

평온하게 덧붙인 말에 시나몬은 잠깐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난 정말 당신이 샌드위치만 먹다 혼자 집 안에 처박혀 시체로 발굴될 줄 알았다니까. 그나마 여자친구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과연 제대로 애인이 있는 남자가 이틀이 멀다 하고 혼자 멍한 몰골로 찾아와 샌드위치 나부랭이로 끼니를 때우고 갈까. 문득 미심쩍어진 시나몬은 가느다란 눈썹을 휘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 여자친구, 실제로 존재하기나 해요?”

유감스럽게도.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쓴웃음이 감돌았다.

“요즘 날 본명으로 불러주는 건 그녀뿐이죠. ‘케이트’는 자기 언니 이름이라 싫다던가.”

“그건 그렇겠네.”

상상이라도 해봤는지 시나몬은 넌더리를 냈다. 가족과 얽힌 자신의 안 좋은 기억까지 따라온 듯, 낡은 티셔츠 속으로 좁고 둥근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말을 많이 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가벼운 잡담뿐이라 정작 케이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득 시나몬이란 여자에 대한 엷은 흥미가 일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케이트로서는 드문 흥미라,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가장 알고 싶었던 게 있었다.

“왜 내게 말을 걸었던 겁니까?”

그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눈에 띄지 않는 자신에게. 다른 건 몰라도 직업 특성상 사람들 틈에 녹아드는 방법만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웅성거리는 소음 밑에 깔려 있는 듯 마는 듯한 음악 같다고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두 달간 곁에서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소한 버릇과 생활 패턴을 기억해 두었다. 시나몬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코끝을 문질렀다.

“글쎄. 그냥 항상 혼자인 게 눈에 띄어서? 이상하긴 하네요. 혼자 오는 단골들도 많은데 왜 하필 당신이었을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던 시나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을 걸어야만 할 것 같아서?”

역시 자신이 문제였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참견을 불러들일 만큼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케이트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하긴, 그 무렵부터 ‘그녀’와 말다툼이 잦아지긴 했다.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른 모습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손톱을 깨물며 다시 시나몬에게 물었다.

“그럼 하나 더. 당신은 왜 ‘시나몬’인데요?”

“아, 그걸 이제야 물어보다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거리낌 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케이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왜냐고 물었던 게 생각나서 그는 새삼 자신이 참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재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곧 웃음을 멈추고 그녀는 창백한 얼굴색 위로 잔잔한 눈빛을 띄우며 말했다.

“고향을 떠나 버나드에 정착하면서, 그게 열여덟 살 때였던가. 그때부터 이름을 바꿨어. 컨트리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 버나드에서는 작은 악단을 따라 순회공연도 다니곤 했어. 이런 노랠 불렀죠. 머나먼 노스 베이스 갈림길에서 제비꽃 향을 품은 바람을 맞으며……. ”

흥얼거리면서 그녀는 머리를 고정시킨 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충 묶어 얹었던 빳빳한 머리칼이 귓가를 스치며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모래 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시나몬은 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 두 눈에 열렬한 빛을 띄웠다. 사람 틈에 부대껴 닳고 지친 웨이트리스에서 순간 다른 인물, 좀 더 반짝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술이 달린 카우보이 조끼에 비즈를 잔뜩 박은 가죽부츠를 신고 말이지. 꺽다리에 볼품없는 촌구석 계집애였지만 즐거웠어요. 뭐 대체로 세상사가 그렇듯 결국 이렇게 됐지만. 정신 차려보니 남은 건 이름뿐이라 미련이 남아서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말하다 말고 문득 그녀는 케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짓궂게 그의 붉은 진저색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좀 봐. 진저와 시나몬! 제법 괜찮은 팀 같지 않아?”

안경이 흘러내린 케이트는 마치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것 같은 그녀의 손길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피하지는 않았다. 또다시 주방에서 시나몬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네네, 갑니다. 나 참,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보지.”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며, 구겨 신었던 굽 낮은 신을 제대로 발꿈치에 꿰었다.

“케이트.” 하고 한 번 더 그녀가 불렀다. “돌아가요. 휴일이면. 애인 얼굴도 좀 봐야지.”

과연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에게 아직 돌아갈 곳이란 게 남아 있는 걸까. ‘그녀’의 냉담한 표정과 할퀴는 듯한 목소리를 떠올리자 심장이 조용히 차가워졌다. 확신 없는 상태로 케이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지만 시나몬의 치뜬 눈은 엄격했다.

“가서 곁에 있어 줘. 어떤 웨이트리스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말고.”

벌떡 일어서며 그녀는 단 한 번 뒤돌아보았다.

“난 레즈비언이니까.”

언제나처럼 놀려 대는 농담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풀었던 머리를 다시 가다듬어 위로 올리는 그녀의 팔 사이로 마주친 시선은 확고했다. 좀 전에 웃고 노래하던 그녀와는 다른. 진지하고 삭막한 눈이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집 밖에 서서 케이트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 그는 낡은 목도리를 끌러 손에 들고, 원래 그 손에 들었던 지팡이는 벽 한구석에 기대어 세워 두었다. 초인종을 힘주어 눌렀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없는 건가. 가벼운 실망과 당연하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 자물쇠 푸는 철컥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낮부터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케이트를 바라보고 있다. 그날 아침에도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서로 비난하고 다툰 후였다. 그런데도 왜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는지.

케이트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이나 말이 없었으나, 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붉어진 눈가에 딱딱한 미소를 머금었다.

“들어와.”

짧게 한마디만 던지고 그녀는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케이트는 팔을 뻗어 그 어깨를 잡았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취해 있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확인하듯 입맞춤했다. 처음에는 밀쳐 내던 그녀도 어느덧 그의 목에 팔을 걸며 기대 오고 있었다. 애인에게 잘 대해 줘, 라고 말하는 시나몬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들은 전부 혼자였으니까.

창백한 푸른색의 헤드라이트가 뒷골목을 훑었다. 비상계단의 난간과 얄팍한 양철 쓰레기통을 지났고 깨진 벽에 붙은 벽보가 펄럭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던 용의자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낌새를 챘는지 용의자는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뛰더니 좁은 사잇길로 달려 들어갔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안드레아가 무전에 대고 고함을 쳤다.

“눈치 챘다! 도주 중. D4 포인트 쪽, 도보로 가고 있다. 우리도 그쪽에서 합류를……”

파트너가 운전대를 돌리려는 순간 케이트가 퍼뜩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 안쪽 골목길은 모두 큰길로 이어져 있어서 독안의 쥐처럼 보였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설명할 틈도 없이 케이트는 조수석 문을 벌컥 열고 막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 차에서 달려 나갔다.

“잠깐, 케이트! 뭐하는 거야!” 안드레아가 놀라서 외쳤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곧바로 용의자를 뒤따라 골목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내가 못 살아, 중얼거리며 그녀는 무전에 대고 급히 말했다.

“돌발 상황 발생! 케이트가 직접 추격을 시작했다. 백업 요청한다.”

겨우내 입었던 코트가 거센 바람을 받아 흔들렸다. 길 건너 메인스트리트에서 퍼져 온 현란한 네온 빛이 어둠에 묻어났다. 케이트는 잠시 서서, 악취가 깔린 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디선가 철컹 하는 소리가 났다. 급히 돌아보니 얼기설기 엮인 펜스 위로 기어오르는 그림자가 보였다. 혹시나 싶었던 대로, 용의자는 쓰레기장으로 침입해 집하용 지하 통로를 통해 탈출할 작정인 모양이다.

케이트는 곧바로 움직였다. 팔을 뻗어 용의자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철컹 하고 펜스가 떨어져 나갈 듯 흔들리고 짧은 고함이 들렸다.

빗물이 고인 더럽고 좁은 보도블록 위에서 두 그림자가 뭉쳐 굴렀다. 용의자의 주먹질이 케이트의 광대뼈를 스치고 안경을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용의자는 몸을 뒤로 기댄 채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균형을 잃은 틈에 다시 케이트의 무릎이 그의 등을 찍어 눌렀다.

목이 바짝 말라 숨을 몰아쉴 때마다 목구멍이 차갑게 긁혔다. 케이트는 엎드린 채 날뛰는 용의자를 누른 채, 뒤 벨트에 꽂아 놓은 총을 더듬어 뽑았다. 총부리가 뒤통수에 와 닿는 감각에 용의자는 몸부림치다 뻣뻣이 조용해졌다. 총구 너머 케이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움직이지 마.”

겨우 숨을 가다듬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사방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조명을 등진 그림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수갑이 채워진 용의자가 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지친 케이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하늘로 길게 한숨을, 하얀 숨결을 토했다.

“괜찮아?” 안드레아가 다가오며 물었을 때 그는 붉은 머리칼 틈새로 손가락을 들이밀고 이마를 문질렀다.

“…….”

“뭐라고? 안 들려. 어디 다쳤어?”

“…내 안경…….”

밟혀서 깨진 것 대신 예비 안경을 쓴 케이트는 데스크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고함 소리, 분을 이기지 못해 산산이 흩뿌려지는 서류. 볼펜을 머리에 맞았으나 대단한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머그컵이 통째로 날아왔으니까. 뜨거운 커피를 담은 채로.

“멋대로 단독 행동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 처먹으니 귀가 병신이냐? 아님 머리냐? 대갈통에 총알 쑤셔 박고 사는 게 뭔지 알려 줘? 너 혼자 해 먹고 살아? 팀이고 조직이고 다 개좆으로 보이면 너 혼자 따로 부서 만들어서 나가. 나가서 좀 혼자 뒈지라고! 미행만 하랬지 누가 용의자한테 덤비래. 체포 중 가혹 행위 당했다고 고소하면 네가 막을 거야? 팀장이 네놈 뒤치다꺼리 하는 호구인줄 아냐? 어?”

팀장이 욕설을 퍼붓는 동안, 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케이트는텅 빈 뒷골목을 내달리며 들이마셨던 싸늘하고 냄새나는 공기를 떠올렸다. 하얗게 재를 삼키는 듯 얼어붙은 숨결, 심하게 뛰어 욱신거리던 옆구리, 네온사인에 은색으로 부서지던 어둠. 그는 아직 그 안에 있었다. 잡아야 할 범인도 없는데 계속 그 안을 떠돌고 있다.

“오늘도 수고.”

팀장실을 나오며 조용히 문을 닫는데 안드레아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걸었다.

“신나게 깨질 줄 알았지.” 그녀는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그에게도 커피를 내밀었다. 그는 멀거니 서 있다가 그게 자기 몫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받아 들었다.

“고마워, 제임스.”

“별말씀을, 케이트.”

선배답게 위엄 있는 태도로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실패한 그녀는 킬킬 웃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 대체 위장 신분증을 남녀 착각해서 가져가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아니, 펼쳐 보고 그 자리에서 여자 이름이 나오면 알아봤어야지. ‘케이트?’ 하니까 냉큼 ‘네’라고 해 버리냐. 난 뭐가 되냐고.”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