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진 작가님의 신작,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리뷰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등 여러 멋진 작품들을 브릿G에 올려주고 계시는 전혜진 작가님의 새로운 장편 소설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출판사에서 개최한 사전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하는 제가 작성한 리뷰 전문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보고 조금은 당황했다. 당장 제목만 보더라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 아름답게 치장한 작품은 절대 아닐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시대를 조금만 잘못 타고 났더라면 출간은커녕 금서 목록에 올랐을지도 모른다고, 저출산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고심하는 정책 입안자들이 이 작품을 출간하지 못하도록 금지해 달라고 송사를 제기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상상도 잠깐 했다.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뜻하지 않게도 사전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어 작품을 읽는 행운을 얻기까지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근무하고 있던 부서에 결원이 생겨 사내에서 자체적으로 충원한다는 공고를 낸 적이 있었다. 딱히 메리트가 있는 자리는 아니고 업무도 힘든 편이라 지원한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한 사람은 20대 중반으로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당장 결혼 계획은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중년이었다. 그런데 지원자들의 대략적인 신상명세를 듣자마자 부서장은 대뜸 “결혼 안 한 여직원은 받기가 부담스러워. 언제 갑자기 결혼해서 육아휴직 들어갈지 알 수가 없잖아…그렇다고 휴직자 대신할 인원 보충을 잘 해 주는 것도 아니고.”라며 중년 쪽을 뽑자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 ‘결혼 안 한 여직원’과 엇비슷한 나이였던, 그리고 아직 비혼주의 노선을 채택하기 전이었으며 앞으로 일과 가정 양 쪽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겠다는 어렴풋한 야망에 사로잡혀 있던 나로서는 꽤 신경이 쓰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직위를 놓고도 임신·출산을 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무작정 미혼 여성을 배제하려 든다면, 보다 더 중요하고 앞으로 전망이 밝은 직위에는 더더욱 가능성이 없지 않을까? 그게 과연 온당한 처사인 건가? 하지만 자녀 양육 등으로 인해 결원이 생겨도 인력 충원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것이 회사의 현실이었기에 일견 타당한 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나는 “곧 취직 걱정해야 하는 딸도 있으신 분이 그런 말씀은 조금 그렇지 않냐(뭐가 ‘그렇단’ 말인가?)”고 웅얼웅얼 한 마디 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동료는 “부서장 따님이 취직할 무렵에는 세상도 많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했고, 다른 동료는 부서장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20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하며 임신한 여직원이 끼친 민폐에 대해 얼마나 많이 본 줄 아느냐며 열변을 토하는 통에 하마터면 그분은 낳아준 어머니도 없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난 줄 착각할 뻔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빈 자리는 부서장의 의중대로 중년 지원자에게 돌아갔다.
10년이 지난 지금, 임신한 직원으로 인한 논란은 내 자리 바로 옆에서 진행 중이다. 곧 육아휴직을 써야 하는 직원을 두고 아예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부서의 T/O를 당겨 와서라도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1년이라도 임시로 대신 일할 직원을 구해야 하는지 의견들이 분분하다. 이 모든 문제가 육아휴직을 들어간 직원이 부서 T/O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으며 인사 부서에서도 별다른 대책을 세워 놓지 않은 탓에 발생한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T/O에 반영되지도 않을 직위를 자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설령 있다 한들 임신한 직원이 복직해서 T/O를 초과하게 되면 그때는 누가 부서를 나가야 할까? 아마 인사부서도, 기관장도, 설령 기관장의 10대조가 오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고성은 오가지 않지만 부서장들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논란의 도마에 오른 직원은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하고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어떤 동료는 그 직원이 알아서 다른 부서로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자체가 이기적이라고 흉을 본다. 또 다른 동료는 자기도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두둔하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이 있느냐고 물으면 딱히 답은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까지 해결을 못 해주는 마당에 대체 무슨 애를 낳으라는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글픈 사실은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는 비교적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직장 내 어린이집도 있고 육아를 위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도 있으며, 장기간 휴직한다고 해서 책상이 없어지지도 않으며 단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직하라고 눈치를 주지도 않는다. 10여 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아빠 육아휴직을 쓰는 남자 직원들도 제법 늘어났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직장에 다니는 여성 직원들의 고충을 들으면 그게 무슨 고생이냐고 어이없어할지도 모른다,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의 네 주인공들은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인 기준에서는 성공한 축에 드는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쌓았으니 가정에서도 성공을 이루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임신 혹은 임신을 시도하는 과정은 주인공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깎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작중에서는 전혀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모성의 위대함과 육아의 기쁨을 거듭 강조하며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적극 권장하는 사회, 그리고 임신한 여성이 적그리스도라도 되는 양 박해하는 사회가 과연 같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임신했으니 당연히 ‘위험한’ 부서는 갈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조직, 임신한 여자가 백주대낮을 돌아다닌다고 무작정 시비를 걸고 위협하는 늙은 남자, 임신을 하자 대놓고 회사의 방해물 취급하며 논리도 없이 비난하는 상사, 몇 가지 검사를 받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지원금만 쥐어 주고 나몰라라 하는 정부, 나라에서 다 지원해 주는데 애 키우는 게 뭐가 문제냐고 혀를 놀리는 무지한 주변 사람들…….
그렇다고 여성들이 가정에서라도 온전히 조력을 받을 수 있느냐 하면……분명 작중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아이를 여성이 혼자 만들어 혼자서 키우는 것도 아니건만, 주인공들의 남편 중 절반은 차라리 그냥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책임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지원의 임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고 그저 남자로서의 ‘가오’만 세우려 드는 지원의 남편은 등장할 때마다 복장이 터지게 만들었다(사실 지원의 남편은 작중 내내 어딘가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여서 설마……싶었는데, 결말부에 가서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열불이 올라 팔팔 뛸 수밖에 없었다).
선경에게 실질적으로 의존해 살고 있으면서도 여러 차례 아이를 잃은 선경의 슬픔을 이해하기는커녕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질 것만을 걱정하는, 그리고 끝에 가서는 더욱 치졸하고 비겁하게 구는 선경의 남편은 분노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재희와 은주의 남편들이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인 건 아마도 남편 넷 모두가 그 모양 그 꼴이면 고혈압으로 쓰러질 독자가 속출하리라는 사실을 작가님이 잘 알고 계셔서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임신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어려움 중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선 네 주인공들 모두가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임신한 데다 굳건한 우정으로 서로를 든든히 지지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자녀 문제에 가장 많이 간섭하기 마련인 시가에 대해서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만 언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나아가 임신과 출산과 양육에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얼마 입지도 못할 배내옷 때문에 절도범이 된 미혼모나 산아 제한 시기에 수없이 자행된 여아 선별 중절 등을 암울한 단면을 빠짐없이 보여주면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서두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만약 내가 저출산 극복을 위해 고심하는 정책 입안자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작품이 절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쓴 감상만 놓고 보자면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는 시종일관 분통 터지고 암울한 전개만 계속되는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작가님의 거침없는 입담과 탁월한 유머 감각, 마치 정말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생생한 주변 인물들, 이야기에 적절히 녹아 들어간 풍부한 정보들 덕분에 단 한 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대단히 재미있는 작품이다. 결혼이나 임신, 출산에 대한 관심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읽어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