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말할 때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리고 아마 많은 분들이 역시 좋아하실 텐데 어드벤쳐 타임과 스티븐 유니버스의 작가 레베카 슈거입니다. 한 페스티벌의 질의응답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팬이 물었어요.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자질이 안 되는 것 같을 때, 어떻게 시작이란 걸 할 수 있죠?”
레베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거 뭔지 너무 잘 알아요. 저는 매일매일 고통받고 있어요. 뭘 쓰고 싶은 건지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요. 근데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내가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쓸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죠. 너무 괴로운데 그게 또 사실이거든. 계속 그 한계를 넘으려고, 최소한 근접해보려고 애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전혀 좋게 느껴지지 않죠. 끔찍해요. 최소한 나는 알고 있거든, 이건 내가 쓰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좋은 평을 해줘도 마찬가지예요. 이건 ‘바로 그것’이 아닌데, 아무도 못 알아본단 말이야? 이게 실패의 결과라는 걸 당신들은 정말 모르는 거냐고! 대체 이딴 걸 왜 좋아하시는 거야…
근데요, 별수 없어요. 그냥 조금 잘못된 상태로 계속 해나가는 수밖에요. 예술은 고통스러운 거예요,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냥 하세요. 그리고 상처받고, 그리고 살아가는 거죠.”
사실 이 글은 브릿G의 추천사와 추천작에 대해 총체적으로 리뷰해주신 한 리뷰 글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그 글이 저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문단에선 약간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본문에 밝히신, 처음에 쓰셨다는 차가운 댓글과 최종적인 리뷰의 논조의 차이가 감동적이었어요. 해서, 읽고나니 연달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나 지면이 없어 자유게시판으로 오게 됐습니다. ‘자유’ 게시판이라 일단 글을 올립니다만, 혹 다른 작품이나 리뷰글을 특정하여 언급하는 것이 게시판 취지에 맞지 않는다면 본 문단과 언급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취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리고 호불호를 떠나 굉장히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를테면 류승완 혹은 봉준호 같은 감독님들이 어떤 듣도 보도 못한 영화 VIP 시사회 클립에 등장해서 호평을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그 작품은 어느 측면에서도 그 정도의 호평에는 못 미치는 작품 같은 겁니다.
그럴 때, 봉준호한테 속아서 형편없는 영화를 봤다고 분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사실의 한 측면이니까요.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봉준호가 정말 저를 ‘속인 걸까’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제 생각엔 봉준호 감독도 그 영화가 잉마르 베리만 수준이 아니라는 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성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건 아마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히치콕이 되는 데 실패한, 알드리치가 되지 못한 영화라는 건 일천한 저보다 봉준호 감독님이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제 말은, 봉준호가 내 보기엔 형편없는 영화에 응원과 추천의 메세지를 남길 때 혹시 봉준호가 저 영화의 실패한 부분들을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지, 안절부절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아마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부분에 대해선 그도 알 테니까요.
유명한 졸업 축사에서 코난 오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했죠. 우리는 모두 다른 누군가가 되는 데 실패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결국엔 우리 모두가 무언가의 실패작이라면, 그 실패의 가운데서 일군 작은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어차피 실패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안다면, 아는 얘기는 잠깐 제쳐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다음 얘기를 해보는 것도요.
실패의 지점을 이야기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레베카 슈거도 그렇게 말했죠. ‘당신 작품에서 실패의 지점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 당신은 엄청난 것들을 학습하게 돼요. 내가 왜 이렇게 한 거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선택은 다 하고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바로 그때가 배움의 순간이라고.
다만 작은 성취에 대해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 여기 산재한 실패의 증거들이 있는데, 왜 다들 이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거지? 아무도 이게 실패라는 걸 모르면 어쩌지, 하며 안절부절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어쩌면 그 지점에 대해서라면 다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일천한 내가 봐도 별로인 영화를 봉준호는 왜 칭찬했을까. <꽃, 다시 꽃>이라는 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죠. “성에 차지 않아도, 턱없이 미흡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게 그것뿐이라면 그것들로 어떻게든 꾸려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뻥입니다. 이 대사 나오려면 한참 멀었음.)
그래서, 실패를 말할 때 약간의 상냥함은 해롭지 않습니다. 아마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건 레베카 슈거가, 코난 오브라이언이, 아무튼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지 몰라요. 실패한 지점에 대한 지적은커녕 성취한 부분에 대한 호평을 들어도 정작 당사자는 이건 ‘바로 그것’이 아닌데? 저 칭찬의 8할은 단지 상냥함일지도 몰라, 의심하고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2할이 진실일 가능성을 붙들고, 상처받고, 그리고 살아가는 거죠.
그런 지점에서, 해당 리뷰 작성자 스스로 댓글의 문제점에 대해 주위에 물어보고, 자성하고, 그 결과 해당 작품의 성취에 대해 숙고하고 첨언하고 응원하는 결말에 이르러 저는 약간 감동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패를 말할 때 약간의 상냥함은 해롭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가 실패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뼈아픈 일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