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단편선, ‘텅 빈 거품’을 읽고…
과학 전공을 하신 작가님들의 SF 단편선, ‘토피아 세트’ 입니다. 브릿G를 이용하시는 다른 분들도 관심이 있으실 만한 책이기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여기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이번에 읽은 디스토피아 단편선에 대한 감상부터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 소개글을 읽고 서점에서 이 단편집을 집어드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네요ㅎㅎ
총평
맘에 드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었지만, 다양한 작가님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상이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신 독자분들의 시선도 작품마다 다를 거 같아요.
언인스톨: 죽은 자들을 인공지능의 형태로 보존한다는 소재는 브릿G 장편 중 하나인 ‘그림자의 방주’를 떠오르게 합니다. 죽은 자들을 떠받드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과연 개인주의를 누르고 미래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제 생각으론 당장 21세기에 태어난 세대조차 그러한 체제를 납득하지 않을 것 같은데, 작품 속 24세기의 인물들 중 저항하려는 의지가 있는 건 화자와 그 주변 인물들 뿐입니다. ‘조상들’의 시스템을 꺼버릴 수 있는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굽신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저는 제사를 힘겨워하시면서도 그만두는 것은 생각도 못하시는 부모님 세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어른은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금기시되는 시대를 살아오신 작가님의 가장 큰 반란일지도 모르겠어요.
서론이 길었네요. 이야기는 화자와 친구, 그리고 아이의 대화로 잔잔하게 진행됩니다. 나름 목숨을 건 갈등이 있음에도 전반적인 분위기가 평화롭게 느껴진 건, 갈등이 마치 유리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다소 거리감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스릴러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갈등이 취향이시라면 조금 심심하실 수도 있어요.
평범한 수준의 독자 한 명으로서, 솔직히 np 완전문제를 해결하는 알고리즘이 어째서 암호의 안정성을 낮추고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냥 자연의 섭리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여기서부터 풀려나가는 결말 부분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화자가 유리를 보고 ‘뭔가 다르다’고만 할 뿐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어째서 유리만을 유독 아끼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감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수 세대를 뛰어넘은 잔잔한 우정은 분명 돋보입니다. 이 이야기의 매력은, 소위 ‘꼰대’라 불리는 자들이 점점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손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는 세상에 대한 저항 의식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벗 : 알 수 없는 세계에 툭 던져지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조금씩 조금씩 흘려주며 읽는 이를 빨아들이더니, 긴박한 전개 끝에 반전과 함께 인상적인 결말을 선사합니다. 이야기의 호흡도 단편의 분량에 딱 맞아떨어져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귀에 연결되어 주인공을 통제하는 ‘벗’의 존재가 이야기의 내러티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도입부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벗’과 나의 대결이라고 기대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결말을 읽고 나니, 이 이야기에서 ‘벗’과 심신동일화 훈련 부분을 전부 들어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어요.
사실 의심점수나 집정청, 가문에 대한 개념 등 다양한 소재가 언뜻언뜻 드러나는 걸 보면, 작가님은 작품을 쓰시면서 보다 큰 세계관을 구상하신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장점이기도 한 ‘단편의 짧은 플롯’ 안에서 온전히 소화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던 것 같아요. 어쩌면 이 부분은 다른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너의 유토피아 : 사람이 떠난 행성에서 펼쳐지는 한 인공지능 차량의 여행기입니다. 인공지능의 독백을 읽다 보면 세계관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게 쌓아올린 몰입감 속에서, 화자가 위기에 빠지고 탈출하는 일련의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전력이 부족한 위기 상황에서 거대한 적을 만나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독자는 자연스레 화자를 응원하게 됩니다.
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뒷좌석에 태우고 다니는 314라는 로봇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존재임에도 화자가 마음을 의지할 상대라는 점에서,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이 떠올랐습니다. 소통할 존재를 찾을 수 없는 화자가 느끼는 외로움은, 무인도에 표류한 사내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314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의 정체가 결국 마지막까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는 않은 점은 아쉬웠습니다. 화자가 꼭 유토피아에 도착해서 314를 고쳐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두 행성의 구조신호 : 심우주에서 온 구조신호를 조사하러 떠난 조사선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쉽게도, 시작부터 삐그덕거리는 두 주연의 말싸움이 조금 어린애들의 대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한달이라는 먼 거리를 구조하러 가는 구조선에서, 팀장이라는 직책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팀의 리더는 충분히 객관적인 논의 대신 서로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극대화된 부분은 조사를 결정할 때 한 팀장이 “우리도 내려간다! 보고할 때 자기들만 일하고 우린 놀았다고 할 작정인가 본데, 그럴 순 없지!” 라고 외치는 대사입니다. 의사 결정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확실히 현실감이 느껴지는 전개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이혼한 관계라고 해도 공과 사를 이 정도로 구분하지 못하는데 과연 조사팀을 이끌 자격이 있을까요?
이 연장선 상에서, 조사 결과 밝혀진 두 행성의 마지막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외계인들과 교신하는 수준에 다다른, 서로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춘 두 문명이 대화가 아니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이 다소 작위적이기까지 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폭력적인 성향이 내재된 지성체라면 애초에 그 정도의 기술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결말을 읽고 어느 정도 수긍하기는 했지만, 사실 첫인상을 지워낼 정도는 아니었어요. 만약 두 팀장의 태도가 보다 합리적이었다면, 그래서 글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진중했더라면 결말이 지금보다 훨씬 임팩트가 있었을 것 같아요.
주인공들이 당사자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새로운 행성의 이름을 마음대로 지어주는 장면은, 어쩐지 유럽 열강들이 다른 민족의 땅을 임의로 가르던 식민지 시대가 떠올라 거북했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갈라지기 전 조상 종족의 이름을 붙였으면 조금은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그들이 조사한 두 행성이 하나가 되는 결말은 이혼한 관계인 둘이 화해하고 다시 합쳐질 것을 암시할까요?
텅 빈 거품 : ‘역시 해도연 작가님’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글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모든 창의적인 종말을 상상해 내시는 데 재미가 들리신 듯 합니다. 이번에도 지구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것도 0.05초 만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책의 취지이기도 한 ‘작가의 전공을 살린 SF’에 가장 부합하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옛 애인을 만나 자신의 발견을 이야기합니다. 작품을 읽는 동안, 이 평온한 부분은 회상이나 과거 이야기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손난로의 메커니즘으로 작품을 시작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하신건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은근히 중요한 요소거든요. 텅 빈 거품 = 손난로 비유를 고려하면, 이 작품은 수미상관의 구조가 되기도 하구요.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주인공은 종말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종말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반응 뿐이죠. 막을 수 없는 종말이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화자의 태도에 때로는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대화하게 됩니다.
태양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다이슨 스피어가 모양을 바꾸며 움직이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경이롭습니다. 이러한 경이야말로 SF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한 존재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거인 앞에서 개미가 된 기분? 아마도 우리 지구가 우주에 떠 있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족으로, 주연 중 한 명의 이름이 제 글 중 하나와 같은 ‘조슈’라서 살짝 놀랐어요. 흔한 이름이 아닌데…ㅎㅎ 저와 같은 의도였을지 궁금합니다.
마치며
제가 처음 글을 쓰게 된 것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에서 였습니다. 2015년 초였던 걸로 기억해요. 독자들이 올린 부족한 글들도 필진 작가님들이 정성스레 리뷰를 해 주시던 시절이었죠. (지금은 우수작으로 선정된 일부 작품들에 대해서만 써 주시는 것으로 알아요) 초창기에 갈 곳을 모르고 보잘것 없는 습작을 쓰며 갈팡질팡하던 제게 이른바 나침반이 되어준 곳이었습니다. 2년 전 브릿G가 생긴 후로는 조금씩 거울로 향하는 걸음이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종종 들어가보고는 있어요.
이 단편집에 참여하신 작가님들 대부분이 (브릿G에도 글을 올리시곤 하지만) 바로 그 거울에서 활동하는 필진 분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감상문을 적어내려가면서 많이 반갑기도 하더라구요.
이제 유토피아를 소재로 한 단편선인 ‘전쟁은 끝났어요’를 읽어야 하는데, 개인적인 일로 한동안은 책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 같네요. 언젠가 다 읽는 대로 그 책에 대한 리뷰도 올려보고 싶습니다. 이 감상문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신 다른 분들과도 감상을 나누어보고 싶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