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본주의적 반영웅, 워커 [포인트 블랭크(1967)]
※ 이 칼럼은 존 부어만의 포인트 블랭크(1967)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자본주의적 반영웅, 워커
원작을 따라간다면 이 영화, [포인트 블랭크]는 쏘고, 죽이고를 몇 차례 반복한 다음 주인공이 돈을 가지고 유유히 떠나는 영화였어야 했다. 그것이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원작인 [헌터]의 플롯이었다. [헌터]의 주인공인 ‘파커’는 독자에게 마초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호쾌하고 비정한 캐릭터였고, 그런 원작을 따라간다면 [포인트 블랭크]는 틀림없이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B급 영화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존 부어만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파커’대신에 주인공‘워커’를 소환했다. [헌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가 굉장히 우스운 지점은, 원작에서 마초적인 에너지를 반쯤 빼버리고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플롯 자체의 유사성은 거의 똑같다는 점이다.
워커는 친구인 말의 권유를 받아, 아내 린과 함께 알카트라즈에서 범죄 조직의 운반책을 습격하여 돈을 빼앗을 생각을 한다. 그러나 워커는 말에게 배신을 당하고 총을 맞는다. 그러나 워커는 기적적으로 죽지 않았고, 페어팩스라는 기업인의 도움을 받아 복수와 함께 자신의 돈을 되찾을 계획을 짠다. 그러나 말이 죽은 다음에도 페어펙스는 그의 상관이 돈을 들고 있다는 식으로 워커를 조종한다. 마침내 마지막 기업 간부인 브루스터까지 죽인 다음에 자신이 페어펙스에게 조종당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워커는 마지막 거래 장소였던 알카트라즈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헌터]의 플롯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파커에 의해 직접 행해진다. 파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해물을 자신의 힘으로 처리함으로서 마초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포인트 블랭크] 내에서 ‘워커’가 의도적으로 죽이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물은 사고사하거나, 혹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 죽거나, 자신의 라이벌 기업인에게 살해당한다. 워커는 그저 자신의 잃어버린 돈을 찾아 헤매는 늙은 남자로 그려진다.
[포인트 블랭크]의 플롯은 세 가지의 순환 과정 안에 있다. 먼저 워커가 돈의 행방을 쫓는다. (초반에는 자신을 속이기도 한 말의 행방도 같이 쫓는다.) 그러면 피해자가 돈을 가진 사람의 행방을 말하고, 희생자가 되어 의도치 않게 사망하고 만다. 혹은 피해자가 사망한 다음에 페어펙스가 돈을 가진 자의 행방을 알려주기도 한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점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돈의 행방은 항상 묘연하다는 점이다. 워커는 하염없이 돈을 쫓지만,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은 항상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 사람을 찾아야 하는 부조리에 빠져 있다.
다른 하나는 워커는 살인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이 사망할 때에는 어느 정도 기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고에 가깝다. 워커는 한 자루의 리볼버를 들고 바쁘게 돈을 가진 자들을 쫓아다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보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은 유령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게 피해자가 될 불운한 인물들은 워커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워커의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애초에, 워커를 두려워하기는 했을까?
그들이 워커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총’을 두려워하는 태도에 가깝다. 피해자들은 워커가 자신에게 총을 쏘는 게 두려운 것이지, 워커가 자신에게 앙갚음을 하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워커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부차적인 도구에 가깝다.
워커가 살인에 연루되고 나면, 다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조직의 더 큰 간부를 노리러 간다. 그 간부가 돈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워커는 단지 돈에 눈이 먼, 개성을 잃은 노인일 뿐이다. 리 마빈은 워커 연기를 하며 뚱한 무표정으로 모든 상황을 일관하며, 대사는 협박 내지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이다.
이 세 가지 순환과정은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점점 커진다. 이는 돈이 돈을 불러오는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성과 일치한다. 자본주의의 코드 중 하나인 돈은 작품 내의 돈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자본주의의 특성이 인간의 소외와 도구화라는 점을 볼 때 워커의 행보는 굉장히 소외된 반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워커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과거의 필름 누아르 영화의 반영웅들이 행했던 행위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거나, 범죄자와 적극적으로 싸우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워커는 붕 뜬 유령처럼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이는 소외에 빠져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복수자의 형상을 띄고 있다. 그는 복수자로서도 소외된 것이다.
소외된 개인은 개성을 잃고 도구화한다. 워커는 실제로 작품 내에서 도구화되어서 끝까지 페어팩스에게 이용당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도구화의 피해자이다.
작중에서 크리스가 말한다. ‘내 위치에서 보면 워커, 당신은 애처로워 보여. 당신은 그림자를 쫓는 거야. 당신은 영향력이 다했어. 끝났어. 당신은 끝났다고. 당신은 돈을 얻어서 뭘 할 생각이야? 그건 애초에 당신 것이 아니었어. 그냥 누워서 죽는 게 어때?’ 이 대사는 워커의 행동을 관통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돈 뿐이며, 돈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기약도 없다. 그는 돈에 매달리는 유령같다.
워커의 소외된 복수자로서의 모습은 작품 내내 분열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의 아내인 린이 죽은 다음, 깨진 유리병 안에서 여러 가지 액체가 섞이는 모습을 카메라가 비출 때 그가 이미 소외를 겪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작품은 발작적인 플래시백을 매 장면마다 겹친다. 그는 인물을 협박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인물이 했던 똑같은 대사를 들을 때마다 과거의 장면을 겹쳐 본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플래시백은 작품의 정상적인 흐름을 끊고 섬뜩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침묵과 갑자기 등장하는, 신경을 긁는 현악기 위주의 배경음악은 이런 발작적 연출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소외된 복수자 워커는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있는 페어펙스에 의해 조종당했다. 크리스가 말한 대로, 돈은 애초의 그의 것이 아니었다. 돈은 자꾸만 지금의 상대방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로 위치를 이동한다. 그것을 아무리 밟고 올라가봐도 돈은 그만큼 더 멀어질 뿐이다. 돈의 확장성은 그렇게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마지막에 돈을 받으러 오라고 도발하는 페어펙스를 내버려두고, 워커는 알카트라즈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워커는 그 때야말로 페어펙스와 그의 옆에 있던 암살자를 죽이고 돈을 빼앗을 수 있었다,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커는 돈을 회수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알카트라즈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이 장면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선 이는 워커가 자본주의의 굴레를 깨달았음을, 그리고 그것을 던져버리기로 했음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알카트라즈’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알카트라즈는 폐쇄된 감옥으로,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워커는 사회 자체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옥은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개인을 가두는 장소다. 워커는 폐쇄된 알카트라즈의 유일한 죄인으로 남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워커는 도구에서 반–자본주의적 반영웅으로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