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설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 되어야 할까요
여기 브릿G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끄는 작가들 중 하나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일 겁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이 이름은 그저 유명한 우주적 공포 작가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이름은 크툴루 신화와 크툴루 신화에서 뻗은 수많은 후대 창작물들과 거기에 얽힌 대중 문화를 가리킵니다. 클라이브 바커 같은 유명한 공포 작가부터 <다키스트 던전> 같은 던전 탐험 게임까지, 크툴루 신화는 오늘날의 SF 및 판타지 창작계에 무수한 영감을 미치는 중입니다.
만약 어떤 사정 때문에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소설들을 쓰지 않았다면, 현대 장르 소설들과 만화들과 게임들은 아주 크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동료들과 후계자들과 정신적인 계승자들은 여전히 숱한 괴물들과 외계인들과 악마들을 낳는 중입니다. 이런 광경을 본다면, 누군가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매우 풍족하게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커다란 명예와 인기를 누렸을 거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는 매우 가난했고, 꽤나 절망했고,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소설 <정신 기생체>의 서문에서 문화 평론가 콜린 윌슨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불우하고 가난한 아웃사이더였다고 평가합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개인적인 수입이나 외부의 원조를 절실하게 바랐으나, 그저 작은 인세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러브크래프트가 개인적인 수입을 얻거나 외부의 풍족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콜린 윌슨은 러브크래프트가 몇몇 특질을 발전시키고 소설의 품격을 크게 높일 수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콜린 윌슨은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에 어떤 싸구려 같은 단점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러브크래프트가 자유롭게 생활하고 외국들로 여행할 수 있었다면, 러브크래프트는 기발한 상상력을 한껏 펼칠 수 있을 테고, 호르헤 보르헤스 같은 작가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콜린 윌슨이 옳게 추측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러브크래프트는 금전적인 어려움에 시달렸고, 그런 어려움은 창작 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오늘날에 수많은 SF 및 판타지 창작가들은 러브크래프트를 추앙하나, 러브크래프트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숱한 소설 창작 서적들은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라고 열심히 강조합니다.
SF 작가 존 브루너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겠죠. 존 브루너는 <잔지바르에 서다>와 <양들은 올려다본다> 같은 소설들을 썼습니다. 황폐하고 절망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처절하고 생생하게 전망한 작가로서 존 브루너는 유명합니다. SF 창작계는 존 브루너를 주목했고, 누군가는 존 브루너가 풍족하게 명예롭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존 브루너는 꽤나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SF 축제장에서 존 브루너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토로했고 잡일거리라도 맡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단이 주목하는 작가, 자본주의 세상을 처절하게 묘사한 작가, <잔지바르에 서다>로서 명예를 남긴 작가. 이런 문구들은 존 브루너를 수식하나, 금전적인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 작가들은 금전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애씁니다. 그들은 열심히 인문학 강의들에 출석하거나, 집안 살림을 해치우거나, 다른 업무들을 겸하거나, 돈벌이를 찾느라 애씁니다. 그런 어려움은 창작 활동을 압박할 테고, 작가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한껏 펼치지 못하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례들에서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라는 문구를 연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금전적인 어려움은 다른 어려움들을 동반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최고의 SF 작가이나, 그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창작 활동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버틀러는 1970년대를 살아가는 흑인 여자 작가였습니다. 버틀러는 흑인 여자 SF 작가였습니다. 미국 SF 창작계에 유명한 흑인 여자 작가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정답은 하나도 없다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인기를 끌기 전까지, 아무도 흑인 여자 작가가 성공적인 SF 소설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버틀러는 비단 가난만이 아니라 인종 차별이나 성 차별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흑인 여자 노동자들은 많았으나, 유명한 흑인 여자 SF 작가는 하나도 없었어요.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자 작가가 성공적인 SF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첫걸음을 뗐죠.
하지만 이런 여러 어려움들 중 금전적인 어려움은 가장 큰 장애물이었을 겁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부유했다면, 비록 흑인 여자라고 해도, 훨씬 수월하게 창작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측면들에 여유로운 시선을 돌릴 수 있겠죠.
누군가는 비단 작가들만 아니라 숱한 비정규직들, 여자들, 제3세계 인민들, 원주민들이 굶어죽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작가들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처했죠. 하지만 여기가 소설 창작 사이트이기 때문에 저는 굶주리는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라고 말하나, 저는 그런 문구가 고정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절망과 빈곤을 이용해 창작 열기를 불태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작가들은 빈곤을 반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들이 좀 더 여유롭게 창작 활동에 전념할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기본 소득이 그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작가들이 기본 소득을 받는다면, 작가들은 적당히 노동하고, 적당히 공부하고, 여유 시간을 창작 활동에 투여할 수 있겠죠.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사치스럽게 살지 못하나 굶어죽지 않을 수입’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기본 소득과 상통하는 개념일 겁니다. 게다가 이런 기본 소득이 기본적인 권리가 된다면, (굶어죽는 작가들 이외에) 수많은 비정규직들이나 빈민들 역시 보다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기본 소득은 대중적인 논의가 되었으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기본 소득이 가능한지 묻습니다. 기본 소득을 위한 충분한 재정이 존재할까요? 기본 소득이 노동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계속 즐겁게 노동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여기 브릿G를 보세요. 수많은 작가들과 리뷰어들은 금전적인 보상 없이 소설들과 비평들을 씁니다. 금전적인 보상은 노동을 자극하는 유일한 동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벗어난다면, 우리가 임금 노예 제도를 타파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기본 소득을 위한 재정을 훨씬 폭넓게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일반적인 기본 소득 논의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기본 소득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왜 우리가 대기업들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야 할까요? 대기업들에게는 우리를 지배할 아무 권한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필립 반 파레이스 같은 학자보다 에릭 올린 라이트 같은 학자를 훨씬 더 추천하고 싶어요.
여기는 소설 창작 사이트이고, 저는 이런 논의를 길게 끌고 가지 않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은 기본 소득에 공감했어요. 기본 소득이 궁금한 사람들은 그런 학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옥타비아 버틀러는 최고의 작가가 되었으나, 어쩌면 버틀러는 그런 기회를 놓쳤을지 모릅니다. 금전적인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흑인 여자 작가들은 그런 기회를 놓칠지 모릅니다. 기본 소득은 그런 작가들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죠. 여기 브릿G에는 그런 어려움에 처한 작가가 있을지 모르고, 기본 소득은 그런 작가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말이죠.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