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웹소설 관련한 인터뷰가 하나 나와서 소개드리려고 왔습니다.

분류: 수다, 글쓴이: 이융희, 18년 1월, 댓글7, 읽음: 192

문학신문에 웹소설 집담회와 관련한 정리 인터뷰가, 그리고 후속으로 저와 단독으로 진행한 웹소설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주일 사이에 제 살이 많이 빠졌구나. 를 사진으로 실감한 인터뷰였습니다ㅎㅎ

웹소설에 대해서 리뷰나 칼럼, 분석이나 비평의 필요성을 여쭙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사실 라이트노벨 담론이나 기본적인 대중문화 담론을 웹소설에 쉽사리 연결시키긴 어렵습니다. 국내에서 상업문화의 한 갈래로 국내에서만 대여점과 함께 20년 넘도록 역사를 누적해왔지만, 그 역사가 만들어낸 코드나 문화, 수용과 놀이적인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수용의 층위가 비슷한 ‘오타쿠’ 연구를 가져다 이야기 해 온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멀티모드성 연구나 재미 담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긴 하였지만, 그것도 학문적인 자장 안에서 인정받는 일부의 작품. <드래곤라자> 정도만 연구가 되었을 뿐, 웹소설, 나아가 장르문학 그 자체를 연구하는 움직임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두 개의 인터뷰를 통해 제가 꾸준히 이야기하려는 부분이 무엇인지, 웹소설을 비평적 관점으로 들어갈 때 어떤 부분을 고려할 수 있는지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뉴스입니다.

http://m.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17

 

앞서 게시판으로 소개해드렸던 웹소설 집담회의 내부 스케치입니다. 기자분이 꼼꼼하게 세 연사분의 이야기를 정리해주셨습니다.

 

이융희 작가는 밀러의 말인 “장르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수사학적 방식이 정형화된 것”을 인용하며, 웹소설의 정형화된 수사(클리셰)는 강력한 힘을 가지기 시작했음에도 정의를 내려주지 않으면 공감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는 없는 한계점을 가진다며 웹소설의 매커니즘이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웹소설에 관한 문제의식 또한 제기했다. 웹소설에서는 파편에 불과한 단어 한두 개 만으로 장르를 규정지을 수 있을 만큼 무의식적인 처리를 강요하지만, 그 강요를 사람들은 아무 저항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 웹소설 독자들이 웹소설을 사고체계의 관점이 아닌 동물적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만약 웹소설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정형화된 패턴으로 끊임없이 소비될 수 있다면, 실질적으로 창작자는 조립하는 사람에 불과하고 이들의 작품은 데이터베이스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수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융희 작가는 웹소설이 단순한 코드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며 “웹소설의 가치를 긍정하고 의미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웹소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준현 성신여대 교수는 먼저 소설이 매체의 산물이라고 강조하며 웹소설의 매체적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김준현 교수는 먼저 작가가 할 말이 있어 텍스트를 만들고 독자가 보고 작가의 말을 알아듣는 소통의 시대는 끝났으며, 웹은 독자의 발언권을 전면에 드러내는 양식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전 시대의 과정이 작가 -> 텍스트 -> 독자였다면 이제는 작가 <-> 매체(텍스트) <-> 독자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체와 분배자가 중요한 존재로서 대두됐고, 작가들에게 있어서 네이버 웹소설에 연재하느냐 조아라에 연재하느냐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어 조아라, 문피아 같은 웹소설 플랫폼은 출판사 문학동네, 창비와 앱스토어, 구글스토어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웹소설 작가들은 창작주체로서 글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출판주체로서 몇 시에 글을 올릴지, 어떤 제목을 지을지, 몇 요일에 글을 올릴지, 어떠한 일러스트를 사용할지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출판주체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지용 한국SF연구자는 “웹소설을 규정할 때 그 안의 구성요소를 파악해야 하며, 특히 장르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웹소설을 흔히 이야기할 때 ‘장르소설 위주로 되어 있다’ 등으로 언급되지만 “장르소설과 장르문학에 대한 정의가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르소설의 문법을 답습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나이브한 정의가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이지용 SF연구자는 장르문학에 대한 담론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부분들이 웹소설의 의미화에 있어서 맞닥뜨릴 가장 큰 장벽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르가 정의되지 않다보니 제대로 된 담론을 찾아보기 힘들며 “담론이 없다보니 관련된 작품을 써도 ‘이런 걸 왜 써’, 독서를 해도 ‘이런 걸 왜 읽어’라는 반응이 많다.”며 웹소설에 대해 논의해보려면 장르문학에 대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뉴스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웹소설 논의에 대해서 개인 인터뷰를 통해 조금 더 심도깊게 들어간 내용입니다. 제목은 좀 도발적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제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http://m.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81

이융희 작가는 기존의 문학과 웹소설이 서사 구조의 측면은 유사하지만, 형식, 독자층, 코드를 통한 조합 등은 크게 다른 지점이라고 보았다. 하나 혹은 둘로만 이뤄진 문단, 대단히 많은 대사의 사용 등 문장의 사용이 기존 문학 작품과 다른 모습을 보이며, 형태 뿐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마저도 데이터베이스에 따른 코드의 조합 과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융희 작가는 “웹소설 작품들은 스토리, 서사, 플롯의 구조들이 대부분 비슷하며, 몇 가지 코드를 조합함으로도 수 만 가지 소설이 나온다.”며 웹소설 ‘닥터 최태수’를 예시로 들었다.

‘닥터 최태수’는 연재된 편수가 2000편이 넘으며, 글자 수는 천이백 만 자가 넘는다. 권수로 따지면 90여 권에 달할 정도다. 이융희 작가는 이러한 소설이 연재되고 독자들로부터 계속 읽히는 이유를 ‘닥터 최태수가 데이터베이스의 조합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병명, 환자, 직위 등을 바꿔나가며 원 패턴 또는 투 패턴에 달하는 소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독자들의 독서 형태도 웹소설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문학적 감동이나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통해 얻게 되는 동물적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융희 작가는 웹소설과 웹소설 독자층이 보여주는 이러한 형태는 “이전까지의 독서가 하던 방식도 아니고 이전의 문학이 하던 방식도 아니다.”고 말하며 “일반적으로 웹소설이 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확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형식과 방향이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기존의 문학적 방법론을 그대로 가지고 웹소설에 도전하는 이들이 실패를 경험한다고 지적했다. 소위 본격문학 작가들이 웹소설을 도전하지만 그들이 쓰는 것은 기존 문학을 웹으로 옮겨놨을 뿐이라거나, 웹소설 공모전에서 이름난 작가들이 낙선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웹소설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융희 작가는 기존의 웹소설 작가들이 감각적으로만 웹소설에 접근하다보니 명확한 방법론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고, 본격문학 작가들은 연구를 하지 않은 채 기존 방법론만으로 성급하게 접근하다보니 제대로 된 결과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웹소설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여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평의 왜곡은 기존 문학장의 잘못… 기생 장르로 전락

웹소설에 대한 인문학적 · 비평적 접근은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기 쉽다. 웹소설 집담회에 대해서도 ‘저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성토가 인터넷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융희 작가는 이러한 반응이 기존 문학의 잘못으로 인하여 비평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융희 작가는 일례로 자신의 후배 웹툰 작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웹툰 작가에게 만화 비평에 대해 이야기하자 비평이 싫다는 반응을 보이며 “나는 작품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주제와 이야기가 있는데, 좋다 나쁘다를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내 의도와 달리 해석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를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비평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이융희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비평을 ‘좋다 나쁘다를 단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중이 보는 비평이란 기존의 문학장에서 보여주었던 호평으로만 가득한 심사평, 주례사 비평이거나 또는 반대로 혹평으로만 가득한 리뷰나 칼럼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은 개별적 창작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작품에 기생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며, 비평이 왜곡된 것에 기존 문학장의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문학적 접근과 비평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가장 큰 난제이자 당면과제라고 밝혔으며, 그러한 이들을 꼭 설득시키고 말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쪽 분야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면 어떨까- 하는 제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해당 공부를 하기 위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기도 하구요.

종종 공부에 대한 결과가 진척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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