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전쟁영화의 문법으로 지루하게 읽기
우리는 엎질러질 수밖에 없는 물웅덩이에서 서로를 물어 뜯는 올챙이 새끼들이다.
-영화 [호프] 전쟁영화의 문법으로 지루하게 읽기-
영화의 도입은 인물들과 관객의 호승심을 일으킨다. 무언가 먹지도 않을 소를 사냥하다 죽였고, 그 사체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 발톱이 할퀸 자국을 보아 동네에 사는 짐승이 아닌 북쪽에서 내려온 호랑이 같다. 엽사들은 평소 만나지 못하는 큰 짐승을 잡을 생각에 설레는 기미고, 경찰서장도 그 짐승을 잡긴 잡아야 하니 그들이 허가 받지 않은 화기를 쓰는 것을 용인한다. 마을 젊은이들은 저 멀리서 났다는 산불을 끄러 다들 떠난 참이라, 그 산불이 꺼지기 전까진 별다른 수도 없다. ‘골치 아파 보이지만 재미있는 이벤트’일 수 있었던 사건은, 팔만 남은 사람의 시체가 등장하며 성격이 바뀐다. 사냥 대상은 이제 호랑이가 아니다. 내 이웃을 잡아먹는 잔인한 괴물이다. 엽사들을 지배하는 건 이제 호승심이 아니라 적개심이다.
한편 읍내로 나간 서장은 문자 그대로 ‘전쟁통’에 떨어진다. 집들이 장난감처럼 부서지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맞고 깔리고 던져지며 죽는다. 오인사격에 당하는 민간인도 나온다. 반공 현수막이 걸린 호포항의 이 벼락같은 시가전 상황에서,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만이 그나마 스스로 보전하고 빠르게 무장해 전투에 참여한다. 서장이 들고 있던 딱총도 점점 더 좋은 무기로 바뀐다. 그러나 민간이나 치안유지용 무기의 화력으론 ‘사람 잡아먹는 괴물’을 잡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괴물을 잡아 전투를 끝내는 건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 대형 트럭이다. 트럭에서는 운전수가 내리지 않는다. 그건 그냥 괴물을 깔아뭉개 죽일 수 있는 ‘아마도 우리 편일?’ 무력이다. 경찰차도 괴물과 함께 치일 뻔 했던 것도, 상황이 잘 풀렸으니 아무래도 좋다.
극의 중반부에서 ‘전방’과 ‘후방’이 돌아가는 양상은 상황을 점점 꼬아 놓는다. 엽사들은 숲에서 괴물이 저지른 짓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위협은 숲 속 어딘가 실재한다. 자신들이 같은 꼴이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괴물을 만나는 순간 먼저 총을 쏴야 한다는 건 그들에겐 타당한 결론이다. 설령 괴물이 사고하고 소통하는 지성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바꾸기엔 늦었다.
마을에서는 괴물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이 나온다. 사람과 다른 점이 눈에 띄는 괴물의 몸은 타자화의 근거가 된다. 숲에 다른 괴물들이 있다는 증언은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내집단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괴물을 자기는 한방에 죽였다며 의기양양한 얼간이도 기어 나온다. 괴물이 울었다는 목격담은 이 사이에서 힘을 못 쓴다. 그런데 증언들을 한데 모아보니 이 사단을 일으킨 첫 번째 총알이 우리 쪽이 먼저 쏜 거라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우리가 죽이고 우리를 죽인 게 괴물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걸 알더라도, 마찬가지로 이미 일어난 일과 이 이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사실을 바꾸기엔 늦었다. 뭐 어쩌겠는가. 시체를 되살릴 건가, 얼간이를 쏴 죽여 갖다 바칠 건가.
그러니 이 오합지졸 인물들(외계인들도)은 좋든 싫든 간에 다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투의 승패가 어떻게 되든지, 병사들이 죽든지 살든지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그저 산을 무너뜨리며 미사일같은 파편을 흩뿌리는 우주선과 불타는 산을 뒤로 하고 두 발로 뛰어 후퇴할 뿐이다.
역사적 상처로 인해, 한반도 국토를 배경으로 현대 전쟁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찍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도래하는 신냉전기 앞에서 그 어느 곳보다 더 민감하게 국제 정세와 현대전의 참상에 반응해야 할 국가가 제대로 된 담론장을 형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호프]는 이 한계를 극복하는 전략으로 크리처/외계인 호러 액션 장르 ‘스킨 덮어 씌우기’를 차용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영리하다고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다루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피하고, 목표하는 주제에 집중하며, 상업 영화로서의 오락성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스킨인 소재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케팅해버린 탓에 장르 매니아들에게 사기라는 원성을 듣는 것은 작품 외적으로 아쉬운 헤프닝이다.
포스터와 마케팅을 보고 갔다가 코 베이고 온 SF 매니아 동지들에게, 그냥 인외 디자인 좋다고 쩝쩝대며 먹은 다처먹이가 이 리뷰를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