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구로사와 기요시 (黒沢清) 감독의 회로 (回路) 봤습니다.

요컨대 “소름끼칠 정도로 세련된 호러 장면들을 뻔한 일본식 휴먼드라마와 섞은 수작”.
큐어를 본 직후에 봐서 그런지, ‘이 감독은 김치찌개집에서 김치찌개 만드는 사람 (잘하는 하나를 잘한다는 뜻) 이구나?’ 싶었어요.
2001년 영화라 볼 분들은 다 보셨을 것 같아서 굳이 스포를 조심하진 않겠습니다.
초반 30분 정도의 긴장감, 그리고 여자 귀신이 춤추듯 쓰러지듯 다가오는 건 점프스케어나 컷 편집, 기괴한 분장이 없는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음. 봉준호 감독이 “친구들과 따라해봤다”는 이유를 알겠어요.
다만 이상현상 규모가 커지고, 실종자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거의 절멸할 정도가 된 후반부 가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어요.
개인 간의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적 혼란으로 넘어가려면 적절한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그냥 훅 넘어가버리니 몰입이 안 됨.
거기에 커뮤니케이션 부족 – 인터넷이란 매체가 있어도 본질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 가족이나 형제나 애인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 사회적 연결에서 배제된 고독한 인간들 (히키코모리 등) – 얘기할 땐 ‘이거 에바에서 다 한 얘기 아냐?’ 싶을 정도.
최근 영화인 백룸이 이 면에선 더 세련됐습니다. 물론 2026년 영화와 2001년 영화의 세련됨을 비교하는 건 좋지 않긴 한데, 이 영화의 인류애 관련 얘기하는 부분이 다 이래요. 행동보단 등장인물 입으로 다 말해서 설명충 느낌이고, 살짝 중2병 걸린 것 같고, 특히 “이 사람들이 유령이랑 뭐가 달라!?”라고 외치는 부분에선 으으.
다만 앞서 얘기한 장면 뿐만 아니라,
귀신이 “도와줘”라고 얘기하는 걸 눈앞에서 듣는 장면의 사운드 연출, 도망칠 때의 비명지르는 듯한 사운드, 하루에가 “혼자가 아니야”라면서 카메라 끌어안는 장면, 준코가 벽에 붙어 그을음이 되는 장면 등
기괴하지 않은데도 지금 봐도 세련된 호러 장면들이 장르 마니아들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 상당히 인상깊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확실하고, 멋진 부분도 확실합니다. 남들에게 추천하기엔 좀 어떨까 하는데, 장르 팬이라면 한 번쯤 보시면 정말 좋겠다 싶음.
독립영화관에서 주로 상영 중이라, 저는 본가인 인천 쪽에서 봤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아직 다 내려가지 않았으니 호러 팬이시라면 한 번쯤 보셔도 좋을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