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광년 너머 초고도문명을 직관하는 우연한 방법

외계생명체가 인간의 몸을 빌린다는 이야기는 SF에서 낯설지 않죠.
숙주를 지배하는 기생체, 인간을 대체하는 침략자, 기억을 조작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 수많은 바디 스내처(Body Snatcher) 계열 작품들은 인간의 몸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외부 존재를 그려 왔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침략당하고, 몸은 빼앗기고, 인간은 기억을 되찾으려 저항합니다.
<몸이 없는 그들> 역시 이러한 스내처물로 일단 출발합니다. 어느 날 내 뇌 속에 무형의 외계생명체 ‘그들(GUDLE)’이 스며들어 내 몸을 어딘가로 데려가니까요.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기존 스내처물과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들(GUDLE)은 지구를 정복하러 온 침략자가 아니고, 몸을 강탈하는 기생생물도 아닙니다. 이미 육체를 초월한 존재들이고, 애초부터 미개행성 지구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구행성시간으로, 수억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몸을 버리고 우주 전역에 무의식으로 편재되는 단계까지 도달한 초고도문명체들이거든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무지막지한 진화는 막다른 장벽을 만납니다.
물질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영적 안식에 들기를 바랐겠지만, 물질세계에 직접 개입할 능력을 상실한 탓에 (몸이 없는) 그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문제에 직면하게 된 거죠.
그들이 다시 몸 가진 생명체를 찾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우주 전역의 지적생명체를 이용하고 있고, 지구인도 그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주인공의 수십 년 여사친인 ‘춘희’가 가진 초능력(사물이나 사건의 시작점을 거슬러 볼 수 있음)은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몸의 효능이었죠.
여기서 우리 지구인 독자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생깁니다.
초고도문명체가 우주에서 펼치는 일을 직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우연히 내 뇌에 돌연변이가 일어나 그들의 뇌 침투에도 불구하고 원래의식을 지킬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되어줄 숙주체만을 원하므로, 그 인간의 의식은 (컴퓨터 하드를 리셋하듯) 말끔히 지운 뒤 데려가는 게 원칙입니다.
그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다중의 의식이 공존하게 되고, (그들의 지적 관점과 시선으로) 그들의 거대한 우주적 미션을 생중계하듯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직관만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늘 그렇듯) 원치 않게 그들 미션에 등떠밀리듯 참여하게 되겠지요.
이때부터 SF작가는 진짜 문제에 도전하게 됩니다. 소위, 과학 설정의 ‘핍진성’에 목숨 거는 하드SF 작가라면, 광막한 우주공간을 거의 실시간으로 순간이동하는 초고도문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전우주에 편재된 그들 관점에서 직면하는 우주문제는 무엇인지, 지구물리학 또는 지구천문학을 그들과학 범주 속에 얼마나 포섭할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반동적으로 접근할 건지 등등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에 ‘그들(GUDLE)’을 상상했으나, 저 역시 블랙홀 같은 이런 문제의식에 사로잡혀 다시 수년을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숱한 고민 끝에 난타당할 각오로 제 작품의 알몸을 여러분께 드러내 보입니다.
만약 당신이 SF에서 단순한 외계침공보다 지구 밖 광대한 우주광장을 대상으로 거대한 스케일의 이벤트를 기대한다면, 인류를 넘어선 존재들은 어떤 문제와 마주하는가를 궁금해한 적이 있다면, 그리고 초고도문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 몸엔 어떻게 인식될 것인지 상상해 보고 싶다면, <몸이 없는 그들>을 통해 함께 답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1억 광년 너머 초고도문명을 직관하는 우연한 방법. 그들(GUDLE)이 되는 것. 너를 기억하라. 지구로 돌아오고 싶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