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
첫 장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텅 빈 페이지들을 지나
칠백 아흔 여섯 장 쯤의 공백 후
‘그뿐이다’라고 적혀있는
낡은 책
인생을 압축한다면 그와같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당신은 마치 항상 늦게 일어나던 아가씨와 같소. 날이면 날마다 늦게 일어나던 아가씨는 옆 마을로 시집가서 난생 처음 일찍 일어나야 했다오.
아가씨는 문득 들판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것을 보고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소
‘우리 마을에는 저런 것이 없어요!’
바로 그 아가씨처럼 당신은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볼 수 있을만큼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사랑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데 말이오.
-하자르 사전
사랑 이야기를 쓴다는건…
어쩌다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보니
그러니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로들 연연한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 하니
그 어떤 사랑도 해피엔딩도 그 자체로 비극인 것만 같고
저들끼리 좋다 해도 어쩐지 내 마음은 만 갈래로 찢어지고
치료제 없는 광기와도 닮은 그것, 도대체 사랑 몰까 싶어지고
제정신의 한계치 위로 한 방울이 떨어진다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 되고
얘들아 그 길로 가지 말아라 싶다가도
그 길이 아니면 또 무슨 의미랴 싶기도 하고
그 티끌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세상의 수많은 의미 중에 이 아이들은 왜 하필 사랑 이야기를 택했을까 원망도 해보다가
새벽이 되도록
달과 친구가 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볼 수 있을 만큼 일찍 일어나기는 그른 거지요.
지금 내 위로 티끌만한 무게만 더해진대도
나는 그대로 무너져
영영 깨어나지 않을 잠에 빠져들 거예요
저 나쁜 것들을 모두 몰아내고
나를 달래어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음악으로 된 꿈을 꾸겠죠
모양을 바꾸며 꿈 속으로 디졸브되는 그대가 보여요
또다른 꿈이 찾아오면
그대는 전혀 낯선 다른 곳에 가있게 되겠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오늘 밤 달빛은 오직 나만의 것이에요
나만이 깨어 저 달과 친구가 되어 주니까요
이건 전혀 아픈 게 아니에요
그저 천천히 잠이 들게 해줄 뿐이죠
이제 내겐 소망이 없어요
그러니 제대로만 한다면
당신이 모르게,
나조차도 내가 죽어간다는 걸 모르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잔혹한가요
그게 누구의 잘못인가요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정해진 자리가 있듯
달빛 아래서도 마찬가지일 뿐이에요
내 위로 티끌 같은 무게만 더해져도
당신을 사랑하고 말 거예요
티끌 같은 것 / 엘리엇 스미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