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게북클럽] 최근 재평가 받는 단편집 ‘혼자 읽는 그댈 위해’ 리뷰
[혼자 읽는 그댈 위해]는 10여 년 전 모 출판사로부터 시작된 장르 단편선 유행에 편승한 기획물들 중 하나입니다.
검색해 보니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코로나 시기 즈음 폐업을 한 모양이더군요.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약간 유치한 로맨스물인 ‘호방왕자와 덜렁공주 이야기’를 제외한 8편 모두 넓은 의미의 공포 소설에 포함되는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글 수급이 어려웠던 모양인지 8편의 공포 소설 중 3편은 같은 작가의 작품입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얘기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고로, 모두 6명의 작가가 참여했고(호방왕자…의 작가도 공포 소설을 하나 수록했습니다.) 글들의 설정이나 세부 장르는 의외로 겹치지 않고 다양한 편이라 적어도 편집부가 기획에 신경 썼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개별 글들의 수준이 편차가 커서 어떤 글은 습작 수준에 머무르는 것도 있어요. (굳이 언급은 않겠지만 책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아 그거!하고 바로 아실 듯)
그중에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세 편을 리뷰할까 합니다.
1) ‘이산가족의 밤’ – 배일수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팩션입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가족끼리 거실에 모여 보는 장면부터 시작해요. 주인공 현훈의 가족 역시 전쟁 당시 연락이 끊어진 아버지의 형제가 있는 이산가족입니다. 그런데 방송을 보던 중, 헤어졌던 형(현훈에겐 큰아버지)으로 보이는 남성이 등장하는 거죠. 당장 방송국에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그때 방송에서 그 남자가 자기 큰아들이라며 노파가 등장해요. 바로 현훈의 친할머니였죠. 하지만 할머니께선 이미 6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400여 시간 이어진 이산가족 방송 속에 등장한 갖가지 원혼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의 아픔과 혈육을 향한 강한 원념을 서늘하면서도 끝내 감동적으로 다룹니다.
2) ‘좀비 없는 좀비의 밤’ – 김순영
제목 그대로 좀비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재밌게도 진짜 좀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벌어질 뻔 했지만 끝내 치료제를 개발하여 좀비 판데믹을 막아낸 이후 한국이 배경입니다.
이 소설 속 좀비는 일종의 병증입니다. 죽은 시체인 줄 알았는데 외계에서 온 것으로 의심되는 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에 걸렸던 거죠.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으로 회복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아포칼립스 수준의 재난의 여파가 그리 쉽게 치유되는 건 아니죠.
전직 경찰이었던 주인공 인수의 시선을 통해 좀비 판데믹이 남긴 갖가지 후유증을 소설은 서술합니다.
매우 현실적인 범죄와 좀비 현상이 뒤섞이며 생기는 아이러니를 주로 다루는데 좀비보다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매우 끔찍하고 무섭게 그려져요. 예컨대, 좀비였던 당시 물어 죽였던 사람들의 유가족들에게 협박받으며 언제 죽게 될지 모를 두려움에 사는 남자라거나. 좀비가 되어 사망자로 처리되며 법적 권리를 상실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은 여자가 새살림 차린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좀비 바이러스를 구하러 다닌다거나 하는 식이죠. 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상당히 깊게 다뤄지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법조계 사람일 것 같은데 아이디어나 현실감은 뛰어나지만 살짝 지루한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인수와 관련된 마지막 에피소드는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단편보다는 연작 형식의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여의도 침묵의 밤’ – 곽진
출간 당시엔 심드렁하게 읽은 작품인데 지금 다시 보면 재평가하게 되는 단편입니다.
작가인 곽진은 이것 말고도 두 편의 공포 소설을 더 수록하였는데 모두 섬뜩한 부분이 있어요, 이건 나중에.
소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네,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가 벌어지고 마침 추모 행사로 국회에 모여 있던 의원들이 모두 잡혀가는 가운데 극적으로 탈출한 주인공 야당 의원 주현이 구데타를 주모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하룻밤을 묘사합니다.
공포의 대상이 국회를 밀고 들어온 군인과 정체불명의 청년 조직이란 점.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는 진상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였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예언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부 묘사는 출간 당시였던 MB정권에 맞춰져 있어 지금 현실과 차이가 크지만, 전체적인 상황의 흐름은 12.3 계엄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들어요. 게다가 구데타가 성공하는 충격적 결말이라 지금 보면 오히려 더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곽진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그가 쓴 다른 두 작품도 각각 동일본대지진과 러·우전쟁을 직접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소설들이죠.
이 책이 출간된 당시엔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마치 본 것처럼 서술한 디테일들이 있어서 뒤늦게 이 책을 접한 사람들 사이에선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다, 한국판 ‘내가 본 미래’다라는 말들이 많았어요.
아쉽지만 검색해도 작가에 관한 정보는 이 책과, 웹에서 연재했던 소설 한 편 정도가 전부입니다.
책에 실린 소설보다 이 작가에 관한 소문 때문에 더욱 소름이 돋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 장르문학 단편선 [혼자 읽는 그댈 위해]의 리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