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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한 잔 마셨습니다

분류: 작품추천, 글쓴이: 아도치, 24시간전, 읽음: 57

오늘 같은 날 읽기 좋은 소설 하나 추천드립니다.

 

<은하영웅전설>, 혹시 읽어 보셨나요? 198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저는 작년에서야 읽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취업이 너무 안 되어서 1년 꼬박 취업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취업했는데, 간신히 들어간 직장은 밖에서 보기에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는 완전히 블랙기업이었고,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상사에게 찍히는 바람에 매일 갈굼을 당했습니다.

물론 제 인생에 갈굼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너만 미친놈이냐? 나도 미친놈이다.” 정신으로 꿋꿋이 버텨 보려고 하였으나… 장렬히 실패. 저는 첫 직장에서 출근 25일만에 사표를 던지고 한 달만에 때려친 다음 다시 기나긴 히키코모리 생활을 재개합니다. (예, 취업 전에도 히키코모리였습니다)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예전에 작품 제목 언급을 몇 번 본 것 같아서 우연히 잡은 작품이 <은하영웅전설>이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침대에 누워서 이 책을 읽으며 버텼습니다.

 

소설의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일종의 밸런스 게임입니다. “유능한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와 무능하고 부패한 민주공화정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나 할까요…

이야기는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라는 독재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은하제국을 만들고 스스로 황제가 된 지 몇백 년 후, 귀족들의 전횡으로 고통받던 민중들 중 일부가 제국 탈출 및 망명을 감행해 자유행성동맹을 수립함으로써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아름다운 소녀를 수집하는 성벽이 있는 은하제국의 늙은 황제 프리드리히 4세. 그에게 누이를 빼앗긴 10세 소년, 라인하르트 폰 뮈젤은 친구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와 함께 황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반드시 제국을 뒤집어 엎겠다는 각오로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임관합니다.

은하계 반대편, 자유행성동맹에서는 제국군과 대치 중이던 동맹군 소장이 행성 1개 단위의 민간인들을 버려두고 도주했습니다. 그때 갓 임관한 젊은 중위가 민간인 대피 계획을 수립, 멋지게 성공해 300만 명을 데리고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 중위의 이름은 양 웬리.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중국계입니다.

(제국은 백인 위주의 사회이고 등장인물 이름이 독일식입니다. 동맹은 다인종 사회이고 등장인물 이름이 영국계, 프랑스계, 러시아계, 중국계 등입니다)

 

자신이 ‘유능한 군주’가 되어 부패한 제국을 뒤집어 엎고 개혁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겠다고 다짐한 라인하르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군사적 재능으로 차곡차곡 업적을 쌓으며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한편 자유행성동맹의 양 웬리는, 빨리 예편하고 연금을 받으며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는 게 목표인데 퇴역하지 못하고 있는데다(“허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할 줄 아는 게 주전주의 선동밖에 없는 무능한 국가원수 욥 트뤼니히트 밑에서 싸워야 합니다. 욥 트뤼니히트가 다수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요.

 

‘상승의 천재(항상 이기는 천재)’ 라인하르트와 ‘불패의 마술사’ 양 웬리의 격돌과 대결은 단순한 두 남자의 싸움이 아니라 전제정과 민주주의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두 인물 모두 독자들 사이에서 팬층이 두터운 것 같은데, 라인하르트의 불꽃 같은 카리스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양 웬리의 인간적인 매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전제정과 전제군주의 효율성, 장점 등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라인하르트의 정반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열혈 혁명가인 게 아니라, 양 웬리인 게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다(“내가 왜 트뤼니히트 같은 놈하고 악수를…”) 가슴 속에 예편원 한 장 품고 언젠가는 백수 히키니트 생활을 하리라는 소박한 꿈만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양 웬리는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같은 인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어쩔 수 없이 모험을 떠나는 영웅 말입니다…

 

라인하르트는 양 웬리에게 묻습니다. 욥 트뤼니히트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게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 체제가 군주정보다 나은 점이 있기는 하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국으로 전향해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고 합니다.

양 웬리는 대답합니다. “저는 반박할 수 있습니다.”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반박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반박했을지 궁금하시다면, 한번 읽어주십사…

 

P. S. 나온 지 오래된 작품이라 만화도 2개,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2개나 있습니다. 원작 소설과 만화 작품은 모두 한글 번역으로 정발되어 있으며, 애니메이션의 경우 2018년부터 나오고 있는 DNT 시리즈를 웨이브에서 정액제로 보실 수 있습니다.

책을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에 다카라즈카 DVD와 무대판 DVD도 사서 봤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언젠가 많은 분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목은 양 웬리가 홍차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건강과 미용을 위한 식후 한 잔의 홍차. 모두 홍차 향기 그윽한 오후 되시길 바랍니다.

아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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