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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의 수건 돌리기] 내 인생의 덕질

분류: 수다, 글쓴이: 아이라비, 2월 2일, 댓글8, 읽음: 209

 

아아, 너무 바쁜 1월인데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가 저를 호출하는 글귀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아이라비입니다요.

아니, 이다지도 바빠 죽겠는데 도대체 무슨 글을 쓰란 말인가! 쓸 얘기도 없다고!

이런 소리없는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며 쭈욱 리스트(수건 돌리기 주제용 리스트)를 보다가 눈에 걸린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덕질, 이렇게까지 해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덕질 모먼트는? 혹은 성덕이 된 경험이 있다면?”

그렇습니다. 성덕이란 무엇이냐, 성공한 덕후.
근데 제가 덕후질을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평생 게임과 책, 만화책과 애니메이션만 보던 인간이 말이죠. 최애 애니메이션인 <왕립우주군> DVD를 일본에 가서 직접 중고시장을 다 뒤져 사온 게 가장 능동적인 덕후질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제게도 대외 활동을 하며 연예인 덕질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이 덕질 이야기를 쓰겠다며 편집부에 이야기했을 때, 아직 파릇파릇한 20대 직원은 덕질 대상에 대해 ‘그게 누구?’라고 했습니다만(충격받았습니다)
바로 고 장진영 배우에 대한 덕질입니다.

 

장진영 배우를 처음 TV에서 본 게 1990년대 후반, KBS에서 하던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이란 곳에서였습니다.
그때 딱 보고 뭐랄까, 진짜 엄청 응원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었달까요.

그래서 그날로부터 장진영 배우가 캐스팅된 영화는 다 극장으로 찾아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시즌 즈음이 한국영화들의 부흥기라 웬만한 한국영화들은 다 극장 가서 보았으니까, 당연한 수순이었겠지요.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은 연기의 데뷔작 <자귀모>를 시작으로, <반칙왕>, <싸이렌>, <소름>, <오버 더 레인보우>까지.
(아, <오버 더 레인보우>는 장진영 배우가 출연한 영화 중 제 가장 최애입니다. DVD도 갖고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만든 DAUM의 <장진영 팬카페>에 덜컥 가입해 버립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커피차 조공이나 그런 적극적인 게 없던지라, 그냥 카페에서 응원 글 올리는 게 전부였는데도, 그게 뭐 그리 즐거웠던지. (생각해 보면 요즘 덕질과 달리 정말 돈 한 푼 들지 않는 덕질입니다.)

그런데 이 <오버 더 레인보우> 개봉 즈음인가에 처음으로 장진영 배우 팬클럽이 공식 창단하게 됩니다. 소속사 주최였고, 아마도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을 빌려서 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런 모임을 주저하는 저였지만, 좋아하는 배우의 실물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현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팬클럽 창단이 먼저인지 다음 카페 개설이 먼저인지는 잘 기억나질 않네요)

걱정과 달리 한 100명 가까이 되는 팬들이 모였고, 실물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사회자가 낸 퀴즈까지 맞춰 유일하게 투샷으로 사진도 찍게 되는 영광을 누렸지요.
그때의 사진은 이렇게 조심스레…

 

그러고 두 번째 팬클럽 모임은 시간이 지나 <싱글즈> 개봉 전이었습니다. 위치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CGV 프리미어관에서 장진영 배우와 선별된 팬과 함께 영화를 보는 기회였습니다. 다음 카페를 통해 신청했고, 덜컥 선정이 되었습니다. 아이고, 역시 돈 한 푼 안 내고 이런 기회를 얻게 되다니 그야말로 무전취식이 따로 없습니다만, 염치 불구하고 달려갔지요.

사실 성공한 덕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바로 이 순간 때문인데, 영화 상영이 끝나고 카페에서 십수 명의 팬들과 별도 미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2년 가까이 되어 다시 만났는데도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장난스럽게 “그 사이 살이 쪘잖아요!”라고 면박까지 주더라고요. 이럴 때 <매드맥스>의 대사가 머릿속에 울리는 겁니다.
“그분이 날 보셨어!”

 

당시 약간 잡지에 영화 평을 싣고 있었기에 <싱글즈>에 대한 감상평이 어떤지도 제게 물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몰랐지요. 이때 찍은 투샷은 좀 너무 개인 사진스러워서(제가 오징어로 나옵니다) 패스. 대신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사인지를 올립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아시다시피 장진영 배우는 2009년에 암으로 작고하셨습니다. 마지막 팬클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임은, 2008년쯤인가 용산에서 개최된 하우젠 행사에서였습니다. 당시 하우젠 전속 모델인 장진영 배우는 사인회를 끝내고 저녁에, 팬들이 모인 카페에 와서 한 명 한 명 사진을 찍어줍니다. 속이 좋지 못해서 다음날 병원 예약이 되어 있고, 그래서 오늘 식사는 같이 못 하고 사진만 찍고 간다고. 저한테도 손짓하며 같이 찍자고 했는데, 당시 팬클럽 회원 수가 부쩍 늘어나 있던지라 바쁜 시간을 뺏는 듯해서, “다음 모임 때 찍을게요”라고 답을 했지요.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고요. 그렇게 떠나고 며칠 후에 언론에 위암 소식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다음 장진영 배우를 볼 수 있었던 건 장진영 기념관에서였으니… 꼭 회복되어서 복귀하시길 바랐건만.

돌이켜 보면 성공한 덕후라고 할 순 있지만, 아쉬움이 큰 덕질이기도 한 제 인생의 덕질이었습니다. 마냥 받기만 한 덕질이기도 했지요. 요즘 같은 시스템이 있었다면 커피차 응원이나 생일 광고판 이런 거라도 한 번 팬들이 모여 선사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답니다.

잠깐 만나서 이야기해도 워낙 털털하고 밝은 <싱글즈>의 나난 그 자체였던 인물이라서, 제 2~30대의 힘이 되어 준 배우였기에, ‘성덕’이라는 글에 가장 먼저 반응했답니다.

자, 이제 저는 훌훌 털어버리고 연휴를 즐기러 갑니다.
다음 수건 돌리기 대상은 영국쥐 님입니다!

아이라비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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