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쓰기에는 너무 긴 ‘댓글’
이 ‘댓글’은 공백 제외 8,000자 분량입니다. 시간을 절약하고 싶으신 분은 맨 밑의 단락장만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추상미술의 거장인 바실리 칸딘스키로 이 글을 열어볼까 합니다. 독일 뮌헨에서 미술 협회 활동을 하던 칸딘스키는 당시 인망이 있는 예술가였고, 1911년에 여러 화가들과 함께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결성하여 미술계에 전위적인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잡지를 발간하고 비주류 화풍을 전시하는 등 청기사파는 그 특유의 활력을 과시했고, 이들의 활동은 유럽 예술 사조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이토록 영향력이 있었던 칸딘스키였지만, 그는 러시아로 돌아온 후 모스크바의 보수적인 예술 사조를 극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그와 함께 목소리를 낼 동료가 부족했고, 결국 고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카데미 교수직을 내려놓은 그는 독일로 다시 떠나고 맙니다.
다른 화두로, 이번에는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해 얘기하겠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자극을 받고자 한 고흐였지만, 그의 고독은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의 전문적 화가나 야망 있는 전위적 예술가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도 아를에서도 홀로 그림을 그리는 처지였고, 고갱과의 결별을 끝으로 그는 예술적 영감과 담론을 나눌 수 있는 동지를 상실하고 맙니다. 말년에는 전시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한 점의 그림이 팔리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그는 불행히도 자신의 그림이 세상의 색채를 바꾸어 놓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위대한 큐레이터가 한 명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 반 고흐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입니다. 그녀는 고흐의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도록 암스테르담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고, 그림에 스토리를 부여하거나 고흐의 편지를 번역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요한나의 탁월한 큐레이션으로 고흐는 유럽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화가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의 미술사 강의에서 항상 얼굴을 내비치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이쯤이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하셨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홀로 설 수 있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자의 눈으로는 아담의 일그러진 그릇을 감별할 수 없고, 타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품은 대해를 떠도는 병 속의 서신과 같으며, 이름도 없이 홀로 떨어진 별은 양치기의 성좌에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교류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고, 다만 그것을 향유하는 내적인 희락만을 혼자 간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창조적 인간은,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이기적인 동족들 앞에 그의 여린 자식을 기꺼이 내어놓고, 평론가가 뾰족한 식기를 들고 그의 자아를 사정없이 난도질할 때까지 겸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상처 입을 것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평가의 세계로 기투하는, 용감한 문예의 실천가 여러분 말입니다. 저는 표범 가죽과 날개를 휘날리며 전위에서 돌격하는 후사르 같은 여러분을 존경한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위대한 실천가에게는 마땅히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활동 영역이 있어야겠지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 떠돌고, 이러한 여정 중에 브릿G로 오신 분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브릿G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유의 문예 사조가, 리뷰 시스템이, 그리고 집필을 장려하는 좋은 제도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공감하실만한 작품을 찾게 되거나, 따스하고 섬세한 리뷰를 받거나, 브릿G의 마음이 담긴 선물 상자를 받거나 하는 경험을 적지 않은 분들이 가졌으리라 짐작합니다. 저 또한 그런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고, 그 덕에 브릿G에서의 기억은 모두 벅찬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합니다.
물론 세상 모든 게 긍정적인 측면만 있으면 좋겠지만, 다양한 수요가 있는 공간에는 반드시 결핍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 결핍 중 하나를 오랜 기간 인지하고 있었고, 앞서 다른 분께서 이를 성문成文하여 계기를 만들어주신 데 있습니다. 아마 다른 작가분들께서도 체감하고 계시는 부분이겠지만, 브릿G에 게시된 작품들은 조회‧공감 수에 비해 단문응원(댓글)이 눈에 띄게 적습니다. 자칫 소중한 한 명의 창작자를 상처입힐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조심하는 것일 수도, 아니면 감상을 남길 정도로 깊이 읽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주저하는 걸 수도, 혹은 그저 충분한 시간 여유가 없어 지나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전히 창작의 나무를 배양하는 데 좋지 못한 현상입니다.
다행히 브릿G에는 단문응원 이외에도 작가가 참고할 수 있는 지표가 몇 가지 존재합니다. 단순히 평점부터 시작해서 읽음/방문 비율, 독자의 성향 평가를 통해 작가는 작품의 평가 요소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계도 아마추어 창작자의 목마름을 달래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문이나 발자취와는 다르게 사람의 생명을 느끼기 힘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아무리 짧더라도 발화자의 목적이나 언어 습관을 유추할 수 있는 데 반해, 수량화/추상화된 지표는 보는 이에게 감흥을 일으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측정치에는 독자의 즐거움plaisir이나 문제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작가는 그로부터 어떠한 인간적 교류도 기대할 수 없지요. 그것은 어쩌면, 작품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업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는 씁쓸한 결론만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만큼은, “예, 저도 ‘여러분의 더 많은 피드백과 응원이 필요하다’는 당신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보아도 문제가 많기는 합니다만,) 저도 과거에 쓴 연재작이 어떤 식으로 독자를 지루하게 했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런 의문은 글을 읽은 사람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계속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떠돌게 되겠지요. 하지만 단문응원의 양을 늘리는 방법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볼까 합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빌리 빈 단장의 이야기를 다룬 《머니볼》의 화제성으로 인해, 현대 야구를 해석하는 팬들의 관점은 점차 올드스쿨에서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로 옮겨 가고 있습니다. wOBA, BABIP 같은 한때 생소했던 지표들은 어느새 분석적인 관중의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관중의 기대나 평가를, 심지어 선수 개인의 심리마저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타율이나 방어율 같은 직관적이고 전통적인 수치입니다. 여기서는 비교적 복잡성이 낮은 타율에 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타율은 타자가 안타를 얼마나 쳤는지를 말해주는 지표입니다. 타율은 희생타‧출루‧득점‧장타‧도루 등 팀 승리에 기여하는 세부적인 플레이를 설명해주지 않고, 그렇기에 타율만 놓고 타자를 비교하면 그가 팀에 도움이 되는 타자인지를 제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율은 다른 지표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접근성)이 있고,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지표이기에 경로 의존성을 띱니다. 낡았지만 익숙한 도구를 쉽게 처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타율은 이러한 특성을 통해 여전히 타자를 나타내는 지표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제 이 내용을 가지고 다시 본래의 주제로 복귀하겠습니다.
한 명당 10회의 연재분을 게시한다고 가정했을 때, 작가 10명이면 100개, 작가 100명이면 1000개의 회차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단문응원의 수사적 변화량은 백이나 천에 비하면 비교적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잘 읽었습니다.”라는 표현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려면 독해 경험을 반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는 댓글을 작성하는 데 있어 복잡성과 절차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만약 일정 기간 댓글을 달지 않으면 제명되는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면, 구성원은 자원을 더 할애하여 적절한 단문을 만드는 대신, 마치 고서를 필사하듯 정해진 형식을 인용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즉, 의존적 경로에 고착될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형판에서 꺼낸 듯한 표현도 그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누구든 응원이나 칭찬이 달리면 기분이 좋고, 또 그런 말들이 작품 하단에 남기를 바라니까요. 문제는 이것이 ‘반복’된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구독자 수나 평점이 그러하듯, 이런 종류의 작은 호의도 계속 유사한 형태로 누적되다 보면 ― 참으로 애석하게도 ― 인간적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하나의 숫자로 변질하고 맙니다. 댓글의 내용 분석이 무의미하니 그 숫자를 양적 지표로 삼게 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은 두 가지로, 하나는 ‘둔감화’이며 다른 하나는 ‘형평성 논란’입니다.
수량화된 정보의 평균은 해석자에게 역치로서 기능합니다. 받는 사람이 댓글 수의 평균치를 인지하게 되면, 그 뒤로 같은 수의 단문응원은 당사자에게 일반적인 수준으로 여겨질 것이고, 평균보다 못한 역치하閾値下 자극 상황에서 도파민은 이전만큼 분비되지 못할 겁니다. 이는 둔감화가 진행될수록 단문형 댓글이 보상으로서의 의의를 점차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유된 의제와 목표를 가진 집단이라 하더라도, 집단 구성원의 작업량과 가용 자원이 달라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다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필삼례一筆三禮하며 더 적은 텍스트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문해력이나 읽는 속도가 상이하고, 독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인들이 작용하는 한, 값이 고정된 할당량은 일부 구성원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써도 타당성을 의심받게 될 겁니다.
이제 양화量化된 개념의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해졌습니다. 숫자로 치환된 대상은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특성과 상관없이 수량적 정보로 처리됩니다. 최초에는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를 향해 보내는 작은 격려였더라도, 그것이 양적 지표가 되는 순간 인간적 메시지는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껍데기husk만 남는 겁니다. 홀로 분투하고 있는 작가들을 응원하기 위한 본래의 구상과는 아주 판이하겠지요.
이 지점에서 슬슬 바닥을 뒹구는 빵부스러기를 회수할까 합니다. 우리는 브릿G 야구팀에서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부지런한 타자들로 선수단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이 구성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팀 성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득점권에서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하고, 장타가 나오지 않아 상대 수비가 대응 시프트를 내놓고, 컨디션 난조나 부상으로 인해 전력에 공백이 생기면 분위기는 점차 뒤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율의 함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율은 직관적이고 간편한 양적 지표이지만, 타격에 관한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타율은 그 안타가 1루타인지 2루타인지, 득점권에서 친 안타인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두타자일 때의 출루율이 얼마나 되는지, 장타력으로 위협해 수비 시프트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지, 패스트볼을 풀스윙으로 컨택할 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팀 타율은 준수해도 실제 그것이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가는 판단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간편하다는 특성과 경로 고착으로 인해 타율로 성적을 예측하는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위의 비유를 그대로 주제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브릿G에 게시된 다양한 작품에 꾸준히 단문응원을 달 수도 있습니다. 단문응원을 많이 작성한 사람에게 보상을 지급하거나, 적게 작성한 사람에게 패널티를 주는 식으로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초기에는 이러한 과업을 실천에 옮긴 분들께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은 응원글을 남길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며, 수사적 가짓수의 한계로 응원글의 형태가 굳어지면 받는 이는 금세 적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이용률 자체가 감소하게 되면, 사람들은 점차 수행 저하를 체감하기 시작할 겁니다.
단문응원의 수가 부족하다는 분석에 공감하는 분들이 다수라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댓글의 양’이라는 독립변인이 ‘작가의 창작 동기’라는 종속변인과 상관‧인과 관계에 있다 보기엔 매끄럽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단문응원의 증가가 작가의 동기와 양의 상관관계에 있는지, 어느 시점에서 뇌의 보상회로가 변화할지, 이 훌륭한 운동의 실천가들이 탈력을 느끼지 않게 할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줄 근거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설령 같은 주제로 연구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결과의 어두운 전망을 다소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속변인의 특성이 독립변인과 비교해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필자의 단순한 추측만으로 이루어진 주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체감한 사람으로서 남기고 싶은 말이지요. 작년에 다른 곳에서 〈회고담〉을 분할 연재했을 때, 저는 운 좋게도 독자들의 호의를 입어 여러 견해나 응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댓글이 소중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녔겠지마는, 저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주었던 댓글은 단순한 응원보다는 구체적인 감상이나 피드백이었습니다. “인물에게 어울리는 아티팩트를 넣어보는 건 어떤가”하는 아이디어부터, 인물의 생김새로 인해 직위를 혼동하는 작은 오해, 그리고 “원작의 실제 번역본을 읽는 것 같다”라는 찬사까지, 글쓴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력이 되어주는 말들은 모두 독자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척 단순합니다. 상술했듯이, 창작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행위입니다. 발화자는 사적 언어를 표출함으로써 자아를 인정받고, 타인과 생각을 주고받고, 자신의 내적 구조를 점검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창작자가 작품으로부터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나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별이 알파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또 누군가는 텍스트의 비밀 정원을 가꿔놓고 그곳으로 이름 모를 나그네를 부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서 있는 전장을, 세계에 균열을 낸 차별과 폭력을, 그 속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을 그립니다. 그리고 독자가 건네받게 될 이 다양한 세계의 초대장에는 언제나 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작품은 곧 작가 자신인 동시에, 한 사람의 사유를 매개로 탄생한 세계의 모방Mimesis이니까요. 그러니까 작가란 동물은, 출아出芽한 미메시스를 통해 자신의 구조를 타자에게 허락받고자 하는 복잡한 심리를 지닌 셈입니다.
그렇기에 작가의 심부를 울릴 수 있는 코멘트는 언제나 ‘대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따로 대답할 필요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독자는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샤먼이고, 텍스트를 통해 죽은 사람과도 대화할 능력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작품과의 심야 대화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절을 인용하여 작가를 놀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작가의 간담을 흔드는 평론가라 하여도 그 정도의 노력 없이는 한 사람의 성장이나 도약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브릿G를 선택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꼽자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리뷰 때문일 겁니다. 브릿G는 리뷰어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체계를 갖추고 있고, 덕분에 이곳은 텍스트의 미식가‧감별사가 모이는 전당이 되었습니다. 재능있는 리뷰어 분들이 남겨주신 비평과 감상은, 다양한 제전이 벌어지는 이 엘리시온에서 문예의 넥타르가 되어 여러 문예가의 갈증을 달래주고는 합니다.
이러한 체계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마는, 한편으로는 리뷰를 양조하는 장인이 수요에 비해 적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파 밸리Napa Valley에서 풍작의 해vintage year를 맞이한 훌륭한 포도라 하여도, 양조장이 부족하다면 시장의 수요를 따라갈만큼 좋은 와인이 생산되지 못하겠지요.
필자의 관점에서 리뷰는 또 하나의 창작입니다. 작품이 세계와의 채널링을 통해 만들어진 거라면, 비평은 작품과의 내밀한 대화 끝에 만들어진 문장의 집합이지요. 리뷰는 그 효과에 정비례하는 지적 고뇌를 수반하며, 강가에서 조약돌을 던지듯 편하게 아무 시점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돌이 일으키는 파문과 그 무심한 투석에 맞을 수도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리뷰어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브릿G의 좋은 리뷰들을 보고 있자면, 어떨 때는 퓌티아Pythia의 후예들이 저마다의 신탁을 내놓는 예언의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는 착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행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각자의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바쁜 현대인이고, 작품 수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리뷰어가 힘들게 시간을 내어 창작에 ‘창작’으로 보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응과 평가를 기다리는 작가들은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공급으로 허덕이고, 단문응원이라도 남겨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댓글마저 쉽게 달리지 않는 경향이 지속하여 오늘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더 많은 분들이 리뷰와 단문응원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가 될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필자가 진정으로 걱정하고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위에서 상관관계를 논한 것도 문제의 핵심과 상통하기 때문이지요.
상기한 문제의 변인 간 상관관계를 연구할 경우, 표본집단으로부터 도출된 통계 자료를 통해 모집단의 특성을 유추하게 됩니다. 그런데 표집 방법에 따라 표본집단이 모집단을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여기에 관여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집단의 크기’입니다.
구체적인 통계를 활용할 수 없어 다소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자료일지 모르지만, 브릿G에서 독자 반응‧평가가 부족한 진짜 이유는 ‘액티브 유저 수’에 있습니다. 이 글이 게시된 자유게시판에서 (현 시점 기준) 게시글 당 ‘방문자 수’의 일반적인 수치는 약 60~100명으로 표시되고, 2~3일 내로 증가율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으며, 거의 10명당 반응(좋아요 또는 댓글)을 1개씩 받습니다. 이는 ‘적극적 이용자’가 방문자의 10분의 1이나 그보다 못한 수이며,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는 이 적은 수의 인원으로부터 창출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에 홍보나 리뷰를 받지 못한 작품의 반응 지표는 더 낮다는 것을 굳이 인용할 필요는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이렇게 표집 대상의 크기 자체가 작은 상황이라면, 우리가 어떤 변인과 표집 방법을 중점으로 궁리를 하더라도 해법 도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브릿G 이용자’라는 집단이 ‘모든(∀) 웹소설 플랫폼 이용자’의 특성을 예측하기에는 충분히 크지 않고, 해결책을 지속할 수 있는 인원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문예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 그러면서도 동료 문인을 독려하고 논의를 주고받는 일련의 과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무게를 소수의 시시포스Sisyphos가 지고 오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작년 12월부터 필자의 의식 한 켠에 똬리를 튼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브릿G에 합류할까?’ 이것은 단순하지만 엄숙한 질문입니다. 저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은 만큼, 제가 쓴 글이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랍니다.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감히 확언합니다. 창작자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지 공허로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장을 편식하고 평문을 주저하는 나쁜 버릇이 들어 부지런한 이용자는 되지 못합니다. 이용률로 보자면 문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겠지요. 그런 만큼 단문응원과 리뷰를 작성할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하며, 사설이나 나름의 작법을 브릿G에 공유할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지 재능은 없지만, 홍보가 될만한 만화를 기획하거나 집필 활동과 연계된 소셜 네트워크 계정을 만들까도 고민을 해봤습니다. 어떤 게 도움이 될지,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지 그 답을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요.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쯤 이러한 의제들을 심층적으로, 그리고 다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논의에 참여하는 것도, 응원을 남기는 것도, 외부의 독자를 중계하는 것도 모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각자의 사정에 맞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쌓아나가면 됩니다. 여기에 더할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 전당, 나아가 국문학을 견인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의식일 겁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는 한 마디를 가지고 있다면, 문예의 대양으로 나아가는 이 배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나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행운은 담대한 자의 편입니다audentes fortuna iuvat. 여러분이 낸 용기는 타인에게도 전해지고, 그렇게 그들 또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정을 이끌고, 그렇게 새로운 지평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바로 ‘행운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길고 지루한 글을 인내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글쟁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만 물러가오니, 여러분께서는 건강하시고 행운이 따르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