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의 무게
“It’s a strange destiny that brought me to a new life, a new home, a new father.”
“기이한 운명.” 영화 벤허(Ben Hur, 1959)에서 유다 벤 허가 퀸투스 아리우스에게 입양될 때 썼던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는, 장구한 세상에서 사람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우리를 이끄는 힘은 과연 무엇인지 묻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비록 유대의 대부호에서 갤리선 노예를 거쳐 로마 집정관의 아들이 되는 경험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한 사람의 좁은 식견으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관성과 흐름을 새삼 느끼며 이 표현을 차용합니다.
뜻밖의 인연과 그분들이 베푼 호의가 한 선물을 제게로 보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년필로, 수기로 글을 쓰던 시대의 마지막 황금이요, 금세기에도 여전히 그 권위를 인정받는 상징적인 도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황금이나 은처럼 여겨졌던 가치가 철의 시대에 다시 빛날 수 있도록, 저는 항상 낡은 형식을 고집하고 먼지가 묻어나는 글을 쓰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 만년필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의미·가치·힘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과거의 문장을 찬미하면서도 제 스스로는 아둔하여 과거의 것을 바르게 쓰는 것을 알지 못하고, 때문에 제 손으로는 훌륭한 도구로도 선을 올곧게 긋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배운 것을 좀처럼 거스르지 못합니다. 제 정신의 일부에는, 스탠튼이 감정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을 입안한 둥근 마호가니 티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각들은 필연적으로 제 글에 나타나게 될 것이고, 저는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곳을 찾아 브릿G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진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선물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계기도 과정도 결과물도 무엇 하나 연결되는 게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이한” 이끌림을 느끼곤 합니다. 젊은 아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감사와 애정과 명예를 이 선물과 함께 간직하겠습니다.
이같이 귀한 선물을 받게 되어 감격스럽고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이 만년필에는 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본명도 아니고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지만, 마치 이름을 불리면 사람은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명칭에는 어떤 강한 인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펜은 종종 칼과 비교되고는 합니다. 요컨대, 저는 지금 제 이름이 선명하게 음각된 칼을 받은 기분입니다.
이름이 새겨진 펜이란 글쟁이에게 있어 참으로 무서운 선물입니다. 누군가의 인정으로 그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글로 하여금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마술적인 힘은 치명적인 방향으로도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는 언어로 말미암아 서로를 음해하고, 모욕하고, 속이고,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여전히 가짓수가 적고 보잘것없는 재주이긴 하지만, 저 또한 어느새 ― 감히 사람을 향해 사용하지는 않지만 ― 간교한 주술과 혹독한 저주를 말할 수 있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은 여전히 어렵기만 한데, 어째서 사악하고 오류로 점철된 문장은 그리도 쓰기 쉬운지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런 제 앞에 저의 필명이 새겨진 만년필이 ― 번뜩이는 철필촉이 여러 가능성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실로 섬뜩한 느낌입니다.
글의 좋은 점을 찾아내고 작가에게 힘이 되겠다는 리뷰어로서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제가 글을 통해 그릇된 정보나 편향된 생각을 전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습니다. 독자의 수용·검증 능력과는 별개로, 이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조심하고 방지해야 할 일입니다. 만년필에 필명을 새겨 저에게 주신 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베고 독사와 전갈의 독을 퍼뜨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브릿G의 리뷰어로 인정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2022년에는 리뷰어로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었으니, 올해에는 부지런히 글을 써서 소설가로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학의 저변을 넓히고 계신 동료 문인 여러분과 브릿G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