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죽는다
이연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전문 청부 킬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번잡한 곳이었다. 바 ‘페어웰 파라다이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술집이었다. 그 것이 이연인의 미학이었다. 음습한 곳은 오히려 의심을 사기 쉽다. 몸을 숨기려면 숲이 아닌 시장에 숨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지친 몸을 이끌고 바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이연인은 본능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손님이라니, 오늘은 좀 귀찮은데.
한바탕 폭우가 내리고 나서도 밤새 조금씩 내리던 가랑비 때문에 겉이 젖어든 트렌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이연인은, 온 몸으로 탐정 티를 내뿜고 있는 호수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비어 있는 스트레이트 잔 일고여덟 개를 눈앞에 두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호수는 지척까지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저, 방금 전에 왔습니다.”
퍽이나. 이연인은 호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들 사이에 시간 까먹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 자꾸 일 벌이고 다니시면 언젠가는 저와도 접점이 생길 겁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당신과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오늘도 일이었던 겁니까?”
이연인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설픈 듯하면서도 용의주도한 사람 같으니. 이연인은 니트 소매 자락에 살짝 묻어있던 핏자국을 털어내며 말했다.
“큰 건 아니고, 좀 바쁜 일이 있었지.”
“좀 바쁜 정도가 아닌 것 같네요.”
“그러게. 쥐새끼 사냥…… 아니지, 야생을 살아가는 쥐는 더 없이 질기고 강하니까. 흐흐, 곱게 자란 탐욕스러운 햄스터에게 경고를 좀 주었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게 된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이연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호수의 어깨에 얹어둔 손을 들어올려, 한 손가락으로 호수의 턱을 쓸어내렸다. 밤새 거칠하게 솟아오른 호수의 턱수염을 벨벳 천의 결을 쓰다듬듯 매만지던 그녀는 금방 호기심을 잃고 호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주문을 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그녀를 위한 칵테일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바텐더가 내놓은 것은 아침 노을을 닮은 술이었다. 멍 하니 술잔을 바라보던 호수는, 그 칵테일이 무척 그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데킬라 선라이즈.”
“흔하지만 흔하지 않지.”
기자목의 밑에서 일하는 최고의 고문 기술자, 소문난 새디스트, 살인청부업자.
그러나 정작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진 이명은 피 냄새 풍기는 명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읽는 자.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음습하게 벌어진 일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이연인을 만나라.
호수는 술기운에 얼떨떨해진 머리를 무겁게 들어 올리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 값을 매겨줄 테니.”
“아이라비가 죽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변함없이 흘러가는 게 이상합니다. BRIT G와의 관계가 분명히 있다고 하는데,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 곳에서는.”
입에 닿은 술잔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가던 칵테일의 흐름이 순간 멈췄다. 흥이 깨진 듯 머금고 있던 술을 바로 삼켜버린 이연인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당신네들 박봉으로는 무리일 텐데. 금광이라도 캔 걸까?”
그렇겠지. 호수는 무겁게 입 안에 들이차 있던 술기운 담긴 숨을 내뱉었다.
정보의 값이 비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몇 일 동안 허탕을 치고 다닌 것도 결국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던 호수는 애원하듯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부담이 덜어졌으면 좋겠네요.”
“흠. 알고 싶다면, 리뷰를 달도록 해. 내가 그 곳에 써 올린 모든 업적에.”
업적이라. 호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유려하고 멋진 문장만이 보이겠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날이 선 문맥은 오직 청부업자들과 청부업자를 쫓는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예리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남긴 모든 부드러우면서도 가학적이기 이를 데 없는 업적에 첨언을 달려면, 한 달 밤낮을 새도 부족할 것이다.
이연인의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수의 괴로운 표정을 바라보며 흐뭇한 듯 했다. 호수는 그 표정이 두려웠다.
“젠장, 알았소, 알았어! …… 언젠가는 다 써드리지!”
“동종 업계라서 봐준 거야. 정보에 비해 무척이나 염가라는 걸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네.”
“…… 그만 놀리시고, 이제 좀 알려주세요.”
“룰이 그를 죽였을 뿐이야. 그는 죽었어. 하지만 살아있지.”
“……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죽었지만 살아있다니. 인간의 목숨은 하나다. 그건 청부업자도, 그들의 뒤를 쫓는 탐정도 마찬가지다. 호수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정보가 이토록 헐값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연인이 매긴 값어치는 정확했다.
“기술을 계승할 자에게 성이나 이름을 같이 넘겨주는 경우지. 혼인보를 알아?”
“바둑…… 설마.”
그녀의 손 안에서 갓 떠가던 해는, 잔 안에서 물결치며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듯이, 곧 머지 않아 지상이 붉게 물들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그런 것처럼. 기술 자체를 인격으로 존중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의 기술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성이나 이름을 넘겨주는 대신 닉네임을 넘겨 준 것이지. 그의 이름을 이어받고 싶어 하는 자는 넘쳐나지만 정작 선택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후보는 얼마 없었지. 설마 그런 대단한 기술을 지닌 자가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겠어?”
“그렇다면, 제가 노리는 자는 이미 죽은 것이로군요.”
“아니지. 반대로 생각해 봐. 누군가가, 아이라비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야. 두려운 일이지. 기술을 계승받은 걸로도 부족해서, 1대의 기술을 뛰어넘었다는 의미니까. 2대 째가 가장 유력하고, 만약 2대 째가 아니라면…… 그건 정말로 위험한 거지. 진짜를 뛰어넘은 가짜가 나왔다는 의미니까.”
이연인의 말대로다. 섬뜩한 이야기다.
호수가 취기 가득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동안, 이연인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타이밍이 묘했다. 하필 2대째 아이라비의 문제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때에 호수가 찾아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었다. 호수가 품고 있던 고민은 사실 이연인의 현재의 문제이기도 했다. 기자목은 영국쥐가 2대째를 계승할 적자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크기 전에 전력을 동원하여 급습했지만, 정작 영국쥐는 쥐고 있는 것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다. 표면의 계승자와 내막의 계승자가 나뉘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읽어내고 알고 있던 이연인도 선대 아이라비의 속내는 결국 읽어내지 못했다. 열쇠는, 다른 누군가라면 모를까 이연인에게도 기자목에게도 하찮은 물건일 뿐이기에 빗길 위에서 너덜너덜하게 다친 영국쥐에게 돌려 주었다.
물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기자목은 언제나 사람이 크는 걸 경계하고 있다. 동종업계란 그런 것이다. 이 곳은 결국, 실력 좋은 아군은 곧 실력 좋은 적을 의미한다. 후대를 계승한 아이라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 지 기자목의 신경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서로의 계산과는 별개로 이연인도 호수도, 이 자리에서의 용건은 모두 끝났다. 호수는 자신의 술값과 이연인의 술값을 함께 바 위에 놓아두었다. 들은 것은 충분했다. 호수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기 전에 이연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런 정보를 쥐고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날 죽이려면…… 침대 위 말고는 불가능할 거야.”
호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부터 내 주변 인생이 이렇게나 하드보일드였지?
하지만 호수는 스스로 하드보일드한 인생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변덕스러운 제안은 호수의 마음을 동하게 하지 않는다. 호수의 로맨스가 성립하려면 더 자연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읽은 자’는 호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참으로 농담 조차도 가학적인 사람이다. 호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오래 사세요.”
“고맙기도 하지.”
빈 데킬라 선라이즈를 대신해, 두 번째 칵테일이 이연인의 자리 앞에 다다른 것을 보며 호수는 바 ‘페어웰 파라다이스’를 나섰다.
내막은 알았지만 하나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한 번 잃은 목표는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는 여전히 모습을 숨기고 있고, 써야 할 리뷰만이 참혹하게 늘어났다. 이제부터 브릿지에 리뷰를 써 올리느라 날밤을 새며 허송세월을 해야 할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아득했다.
그걸 두고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숙취에 절어있던 호수에게 때마침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귀찮음에 사로잡혀 있던 호수를 붙들어 억지로 일으켰다.
‘수오 씨가 살해당했습니다.’
시체는 잠실 역 한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오후의 백화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역이었지만, 누구도 그들 가운데에 죽은 자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호수가 헛개수를 들이키며 사건 현장에 다다랐을 때, 그 곳에는 언제나처럼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오의 풍만한 복부에 칼날로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살을 찢어내 만든, 아몬드처럼 기다란 타원형, 그 가운데 배꼽이 있던 자리에는 피부를 정교하게 도려내 피 한 줄기 배어나오지 않은 피하 지방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것은 마치 금색의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풀어헤쳐진 혁대 사이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사타구니에 칼날로 새겨져 있는 문자는 나무랄 데 없이 정교했다. 어떻게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이토록 참혹한 짓을 벌일 수 있는 것인지, 호수는 술기운이 다시 치솟는 것을 느꼈다.
‘리뷰도 소설도 안 쓰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은 채 미묘하게 끊겨 있었다. 호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을 보았다. 등은 흥건하게 피로 적셔져 있었다.
피를 닦아내자, 또박또박 새겨진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씹잉여 자게 죽돌이’
금색의 고양이 눈. 설마, 그 2대째의 아이라비인가?
하지만 이런 단서로는 부족했다. 수많은 목격자 후보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이었지만, 이 수법을 아이라비와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대를 이어 나갔다고 해도, 아이라비는 칼을 쓰지 않는 자다. 이름을 이어받은 자가 갑자기 기술을 바꿔 다른 방식의 살인을 벌인다니, 이름값이 아깝다.
전설의 청부살인업자 ‘감농사 네크로맨서’가 한켠을 죽인 데 이어 몇 일 만에 두 번이나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아니, 그 자도 자신만의 미학이 있다. 한 번 살인을 저지르면 적어도 몇 년은 잠적한다. 그러나 수오를 죽일 동기는 충분하다. 자신을 몇 년 간이나 뒤쫓아 온 형사가 달가울 리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머릿속으로 브릿G에 자랑처럼 올려진 수많은 살인법을 되새기며, 수많은 살인자들의 이름과 수법을 떠올려 봐도 수오의 시체와는 선뜻 매칭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순간적으로 호수의 뇌리에 스쳐간 위화감이 있었다.
왜 난 배에 새겨진 눈을 보고 아몬드를 떠올렸던 거지?
호수는 속으로 기겁하며 수오의 시체를 뒤집었다.
그리고 죽은 수오의 얼굴에, 호수가 곧바로 얼굴을 겹쳤다.
코로 수오의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보던 호수는 곧 자신이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렇군, 아몬드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호수의 머리보다도 먼저, 후각이 단서를 잡아낸 것이었다.
이건 분명하다. 청산가리다. 사인은 독극물, 2대 째의 아이라비가 보낸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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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이 날아오는 게 눈에 보일 때는 이미 늦었으니, 핵폭탄으로부터 달아나지 말고 핵폭탄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달려야 덜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교훈을 마음에 되새기며…… 제 손으로 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깔끔한 탈주)
아니 근데 설마 이 릴레이를 이렇게 이어나가는 분위기가 생길 줄은 ㅎㄷㄷ 집이 더워서 피씨방 놀러왔다가 두 시간 동안 코 박고 써버렸네요. 저도 대세에 발 한 번 걸쳐보긴 했는데, 괜히 명작 릴레이를 망친 건 아닌지 걱정이 ㅎㄷㄷ
ps. (오후 5시 25분) 흐름이 쉽게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쥐 님을 2대째 아이라비 후보에서 제외시키는 단서를 추가했습니다. 갑자기 이야기 바꿔서 죄송합니다 (_ _) 이제 더 이상은 절대로 안 고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