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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비의 죽음

글쓴이: 신원섭, 17년 5월, 댓글25, 읽음: 162

붕붕은 도마뱀 같은 인상의 노인네였다. 영국쥐가 편지를 내밀자 노인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편지는 폭우에 젖어 축축했다. 영국쥐가 말했다.

 

“놀란 척 하지 마세요.”

“노안 때문에 그래. 글씨가 잘 안보이거든.”

 

붕붕은 돋보기를 끼고 한참 동안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영국쥐에게 작은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은행 대여금고 열쇠였다.

 

“축하하네 친구. 이제 브릿지팀 수장은 자네야.”

“편지는 진짜였군요.”

“봉투에 찍힌 표식은 황금가지의 인장이야. 판별하는 것 만큼이나 위조도 어렵지. 아이라비는 죽었네.”

“괜찮겠어요? 이렇게 쉽게 넘겨도?”

“어쩌겠나. 룰은 룰인데. 아이라비 자신이 만든 룰이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아이라비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이제 놈들이 노리는 건 자네일테니까.”

“기자목 패거리가 분명해요. 힘든 싸움이 되겠군요.”

“눈 앞의 복수에 집중해. 그게 바로 브릿지의 방식이야.”

 

영국쥐는 붕붕과 악수를 한 뒤 뒷문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는 밤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거리를 내려다보니 정문에 스타렉스 두 대가 정차해 있었다. 우비를 입은 똘마니 하나가 길 모퉁이로 망을 보러 갔다.

영국쥐는 난간을 밟고 옆 건물로 뛰어 넘어갔다. 네온 조명으로 치장한 싸구려 러브호텔이었다. 조명이 깜빡일 때마다 새빨간 네온 아가씨가 엉덩이를 흔들었다.

영국쥐의 그림자가 도로 위로 아치를 그렸다.

 

“옥상이다!”

 

망을 보던 똘마니가 외쳤다. 빌어먹을 네온싸인. 기자목의 패거리들이 영국쥐를 쫓아 옥상으로 올라왔다. 날쎈놈들은 벌써 꽁무니까지 따라붙었다.

영국쥐는 가스관을 타고 건물을 기어 내려왔다. 반쯤 내려오다가 창문을 걷어차고 호텔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중년의 남자와 창녀 하나가 이불 뒤로 몸을 숨겼다.

 

“당신 뭐야?”

“실례지만 옷 좀 빌립시다.”

 

영국쥐는 소파 위에 널브러진 레인코트와 중절모를 집어들었다. 남자가 침대에서 뛰쳐나와 영국쥐의 멱살을 잡았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영국쥐는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꺾고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영국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남자에게 던져주었다.

 

“이걸로 새 옷을 사요.”

 

영국쥐는 비상계단에서 소화기를 뜯어냈다. 손에 들고있자니 우스꽝스런 물건이었다. 주차장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자목 패거리 두 명이 그를 찾고 있었다. 영국쥐는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똘마니 하나가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지금은 아무도 못 나가.”

“왜요? 집에 가려는 것 뿐인데요.”

“소화기는 왜 들고 있는 거야?”

“부엌에 갖다 놓으려고요. 와이프가 건망증이 심해서 외출할 때마다 가스불을 켜놓거든요.”

“이봐, 좀도둑 양반. 날을 잘못 골랐어. 쥐새끼를 하나 찾고 있거든. 우리 형님 말씀이 누구든 이 건물에서 나오는 놈은……”

 

영국쥐는 손이 빨랐다. 똘마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턱에다 주먹을 꽂았다.

곁에 있던 놈이 야구빠따를 치켜들었다. 영국쥐는 소화기를 휘둘러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빨 몇 개가 끈 떨어진 진주처럼 바닥에 튀어 굴러다녔다.

두 사람 다 죽진 않을 것 같았다.

레인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자동차 키가 나왔다. 버튼을 누르자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구형 그랜저 한대가 윙크를 했다.

영국쥐는 남자의 차를 잠시 빌리기로 했다. 브릿지팀의 열쇠는 양말 안에 숨겼다. 거추장스런 코트를 조수석에 벗어던지고 시동을 걸었다. 영국쥐는 남자에게 코트를 돌려줄 수 있어 기뻤다.

영국쥐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차를 몰았다. 주차장 모퉁이를 돌자 반대편에서 하이빔을 켠 갤로퍼 한대가 다가왔다. 영국쥐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없는 여자가 갤로퍼 운전석에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연인이었다. 살인청부업자. 킬러들의 킬러. 소문난 새디스트이자 기자목의 고문기술자.

그녀가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젠장.”

 

영국쥐는 있는 힘껏 가속패달을 밟았다. 구형 그랜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튀어나갔다. 이연인의 갤로퍼가 그랜저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깨진 차창으로 빗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영국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신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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