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 제5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이 마감 되었네요. 근래에 브릿G에 올라온 작품들과 과거 수상작들을 두루 읽었는데, 여러가지 기발한 변주도 있고, 아이디어보다는 정서적인 감동이 강했던 작품도 있었어요. 여러 작가님들이 보여주신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가 되어 즐거웠고, 어떤 작품이 당선의 영광을 차지할지 기대가 됩니다.
타임리프 소설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토리는 과거로 가서 어그러진 상황을 바꾸고자 시도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얼룩을 지우려는 노력이라고 한다면, 우리를 과거로 보내주는 타임머신은 일종의 워싱머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세탁기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소설들을 모았습니다. 시작 버튼을 눌러주세요.
제가 브릿G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모퉁이 빵집>을 쓰신 제로위크 님의 짧은 단편입니다. 아무도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궁금해하지 않는 삭막한 동네. 화자는 여관 카운터에서 일을 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지만, 굳이 그들을 기억에 담아 두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가죠.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20분이나 걸어서 멀리 떨어진 빨래방에 가는 성격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마주친 아가씨가 자꾸 선을 넘네요.
법원으로부터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을 받은 남자가 코인빨래방에 갑니다. 남자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이혼을 했고, 부주의로 인해 반려동물이 가출했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덮고 잡니다. 절제된 감정이 켜켜이 쌓인 문장들이 인상적인 엽편입니다.
이나경
윗집에서 매일 밤 자정만 되면 세탁기를 돌려요. 텅, 텅, 텅 하고 울리는 소음 때문에 불면증을 얻은 화자는 열흘을 참다 결국 퀭한 눈으로 항의차 윗집을 방문합니다. 알고 보니, 독거노인이 잡생각을 없애려고 세탁기를 돌리다 생긴 습관이라는 서글픈 사연이 있었어요. 그런데…
엄성용
개인 세탁기를 소유하는 소소한 로망이 있는 효정은 의심스러울만치 저렴한 가격에 멀쩡한 세탁기까지 딸린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해요. 수상한 낌새가 있긴 했지만 1층 사는 훈남을 비롯해 거부할 수 없는 좋은 조건들에 그만 그 방에 발을 들여요. 옙, 예상대로 그 세탁기에서 귀신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어요. 쉬엄쉬엄 읽어야 할 정도로 끔찍한 내용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읽어서 결말을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
유권조
채림은 병원 세탁실에서 일하는 도깨비입니다. 갑작스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야전병원으로 지정되어, 일은 더욱 고되어지고, 근무 여건은 형편없이 나빠져요. 주먹밥 하나를 나눠 먹어야 하고, 휴가는 기약이 없이 꿈 속에서나 가능하죠. 그러던 중에 위층에서 일하면 통조림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바르데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거들고 싶은 마음에 소녀는 세탁기를 이리저리 조작해봅니다. 고양이도 야옹 야옹, 하며 참견을 해요. 부모님이 귀가하고 세탁기 작동법을 배운 소녀가 세탁기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귀엽다고 생각하며 빙긋 웃다보면, 어느새 인생에 대한 작가님의 통찰이 스윽 들어옵니다. 그나저나 고양이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싶네요.
홍윤표
양말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집니다. 범인은 세탁기! 빨래를 돌리고 나면 뭔가 자꾸 없어져요. 새탁기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외계인의 메시지를 전해주기까지 합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어 보이는 외계인들과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일이 점점 커지네요.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처럼 좌충우돌, 왁자지껄한 이야기의 결말은?
세탁소 장씨의 딸 미선은 자전거로 세탁물 배달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옵니다. 왠지 내려가 있던 셔터를 올리고 들어가니 가게에 피가 흥건하고 세탁기에 시체가…? 그대로 기절해버렸던 미선이 아버지인 장씨을 의심하면서 강순경의 눈을 피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과연 세탁소는 과거를 세탁해 줄까요? 깨끗하고 구김 없게?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면, 혼자서 다 해지도록 무작정 문질러대기 보다는 주위 사람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아요. 그것이 옷감이든 마음이든. 오늘은 맘 놓고 이불을 세탁해 널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햇볕도 좋고 공기도 맑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도, 모레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