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장을 통째로 씹어 먹고 싶은 작품들

대상작품: <오직 달님만이> 외 8개 작품
큐레이터: 사피엔스, 20년 11월, 조회 213

아름다운 묘사와 멋진 문장들로, 읽는 내내 감명 깊었던 작품들을 모아봤습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습니다. 묘사가 좋으니 재미가 한층 배가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표현을 구사하시는 필력과 여유가 부럽기도 하고요.

가장 먼저 장아미 작가님의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들을 워낙에 많이 쓰셔서 다 소개는 못 하고 몇 가지만 모았습니다.

유명한 작품이죠. 40화의 소제목을 참 좋아하는데요. ‘애정이란 기침이나 하품 따위만큼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입니다.

사극, 판타지, 여성 서사, 신령스러운 동물들, 전통 설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오른손 손등에는 두 마디 길이쯤 될 법한 검붉은 흉터가 잔뜩 성이 올라 꿈틀거리는 지네처럼 감사납게 도사리고 있었다.’

‘대기에 어둠이 풀어지고 달이 잿빛 구름을 물들이며 의뭉스러운 낯을 드러냈다.’

‘물을 여러 번 끼얹어 가며 숫돌에 날을 갈아 벼린 식칼은 가죽 칼집 속으로 밀려들어가며 그르릉 섬뜩한 포효를 흘렸다.’

‘눅진한 비 냄새, 아니, 이것은 후각을 마비시킬 만치 아찔한 피 냄새, 금방 잡아 딴 금수의 배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강렬한 날것의 냄새였다.’

제1회 테이스티 문학 공모전 우수작입니다. 남성적이고 묵직한 문체, 다채로운 묘사가 일품입니다. 감탄을 거듭하며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어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서는 뒤늦게 크는 남자였다. 폴로셔츠 위로 드러나 있던 목덜미가 유독 희고 보드라워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맞물리고 있던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소파에 눕다시피 한 채로 소설책을 펼쳐 들었지만,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음과 모음이 뿌옇게 뭉개지는가 싶더니 흰 종이 위로 새까맣게 돋아 올라 멋대로 뜀박질했다.’

‘한서는 웃고 있었다. 허리 높이까지 자라난 풀들이 사스락거리며 속삭였다. 이 밤을 놓치지 말라고, 여름은 짧고 덧없으니 한 눈을 판 사이에 너를 두고 멀리 떠나버릴 거라고.’

청춘들의 금지된 사랑, 가슴 아픈 사랑, 계절감을 듬뿍 담은 감성적인 묘사.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강신재 작가님의 <젊은 느티나무>를 떠올렸었어요. 아름답고 아련한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은 이난 작가님의 글들인데요. 모두 2017년에 올라온 작품들입니다. 세 작품이 다 화자가 남자인 로맨스입니다. 작품들을 관통하는 감성은 그리움, 망설임, 후회인 듯 합니다. 일상적인 소재들이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심리를 섬세하고 매끄럽게 표현하고 있어서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다 읽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집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 뒤로 마치 곤약을 꼬아놓은 듯 교차된 천이 도톰한 가슴을 한 번 받치고 저 안에 오장육부가 다 들어가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선을 따라 모이더니 이내 골반선을 따라 넓게 퍼지며 허벅지에서 신경질적으로 치마선이 끊어진 옷이었다.’

‘서로를 처음 만나게 해주었던 후배의 이름도 서로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는 햇살 가득한 이 거실에서 쏟아지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나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고 내 손은 나도 모르게 그 불확실한 모든 것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반쯤은 꿈에 머물러 있었고 메말랐던 그녀의 입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만일 그때, 내가 와이퍼를 좀 더 일찍 바꾸었더라면 지금 여기서 그녀와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수건 덜 마른 냄새 대신 덜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내 얼굴에 부빌 수 있었겠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생각했다.’

‘정말 한없이 많은 검고, 붉고, 노란 뒤통수들 사이로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나를 뒤돌아본다. 내가 어디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 조그만 점에서 빛이 반짝여 내 눈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 점은 곧게 선 160센치의 여자아이가 되었다.’

 

최근에 브릿G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보이는 어스 작가님의 작품입니다. 현재 ‘에메랄드 시티’라는 SF로맨스를 연재 중이신데요. 첫화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묘사와 흥미로운 서사에 빨리 다음 화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묘사는 아닙니다. 담담하고 잔잔하면서도 단단한 심이 느껴지는 문장들입니다. 묘사를 묘사하려니 어렵네요. ㅡㅡㅋ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에게로 맞춰진 방향 덕에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비 사이로 커다란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것은 당연히 당신이었다. 그 당연함에 심장이 뛰었다.’

소설은 1인칭과 2인칭(?)이 번갈아 가며 전개됩니다. 주인공 화자는 여자이고요, 상대에 대해 ‘그’라든가 이름을 쓰지 않고 ‘당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와의 소통과 로맨스를 그저 관찰하고 서술하기보다는, 그(당신)와의 관계를 더욱 애타게 갈구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눈을 감고 우리의 숲을 떠올렸다. 가지 사이로 투과된 인공 태양의 빛에 반짝이던 녹색의 잎사귀들과 발 밑으로 느껴지는 포슬포슬하면서도 단단한 흙과 말없이 곁에 선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를.’

어스 작가님이 최근에 쓰신 단편입니다. 동화 같기도 하고 판타지 같기도 한, 가슴이 먹먹해지는 SF 로맨스입니다. 이 작품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