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사실 장르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미 장르와 장르가 섞이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근원적인 것, 시작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나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호러겠지. 경외감? SF. 가슴을 울리는 사랑? 로맨스. 계속해서 나를 추적해 오는 뭔가? 스릴러. 그런 식으로
팔란티어가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일때 읽었엇고, 그때 나는 이 작품을 겜판소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게임 플레이를 배경으로한 판타지니가 겜판소. 하지만 그때도 다른 겜판소와는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사건과 장면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무거웠다. 다른 수많은 겜판소에선 주인공은 현실에서 이미 성공의 씨앗을 가지고 있고, 게임을 통해 그것이 개화한다. 선천적인 노가다 꾼은 게임속에서 노가다를 통해 성공하며 무술의 재능을 살리거나, 그렇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게임 안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의 주인공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한다. 그리고 게임 속의 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게 주된 스토리다. 이질적이지만 재밋다는 생각을 했고, 그땐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팔란티어로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이때쯤 뉴로맨서에 푹 빠져 있었고, 이 책의 장르는 사이버 펑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임도 당연 사이버 스페이스로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팔란티어 또한 게임이 현실을 덮치는 내용이니까. 단순히 게임의 능력을 빌어오는 설정의 겜판소는 많다. 하지만 게임속 인격이 자신을 덮친다면 어떨까?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을 수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상일가 아니면 또 하나의 진실일까. 다시 읽어도 흥미로운 스토리다. 사람들은 엽기범죄의 원인을 가상세계, 즉 게임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비판받아 왔지만, 어쩌면…이란 생각또한 들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현실과 가상현실을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제 팔란티어-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로 다시 연재되고 있다. 그리고 잘 쓰여진 SF의 숙명을 맞이했다. 예전까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 이들의 살인은 일종의 망상으로 취급돼 왔다. 하지만 지금은? 게임은 하나의 훈련 툴로 이용해 다양한 기술에 숙련시킨다. 게임이 마약이라는 거은 지나친 비약이지만 잘 구현된 가상현실은 현실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휴대폰 안에만 존재하는 포켓몬을 잡기위해 하루에 10km를 걷게 되었다. 3000만원이 넘는 게임상의 아이템 때문에 재판을 벌인다. 게임이 현실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자들은 오늘도 연구하고 있다.
인터넷, 넓게 잡아서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는 우리 삶에 추가된 옵션이다. 하지만 지금 태어나면서 부터 삶에 컴퓨터가 있는, 인터넷의 아이들이 사회로 나오고 있다. 이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은 우리들이 쉽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나는 따라서 이 책의 장르를 호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