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을 깡그리 잊는다는게 가능한 것일까? 대학 친구였던 그녀는 기억하면서, 연인이었던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일이 박영석에게 벌어졌다. 또다른 대학동기 민재에게 돈을 꾸러간 날이었다. 한때는 허물없는 사이였으나 졸업 후 뚜렷한 벽이 생겨버린 옛친구. 돈 한푼 없이 전전긍긍하는 나날이 아니었다면, 노동을 하는 것보다 돈을 꾸는 것이 더 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면, 처음 돈을 빌리고자 했던 박일상과 전화 연결이 됐다면 방문하지 않았을 집. 영석은 낯설고 어색한 친구의 집에서 어떻게 돈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다 옛친구 박일상을 거론한다. 공통의 추억거리가 일상 말고는 없기도 해서 일상이는 어떻게 사냐는 둥 통 전화를 안받더라는 둥으로 너스레를 떠는데 민재는 노발대발하며 대꾸한다. 일상이 죽은 게 3년 전이다. 아무리 사귀다 헤어졌대도 그런 소식 하나 못듣고 뭐했냐고 화를 낸다. 영석은 당황스럽다.
믿기지 않겠지만 민재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 동거까지 했던 옛연인을 영석은 대학 동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기숙사를 나와 부모님 몰래 함께 살았던 시간들,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시면 어떻게든 집에 들이지 않기 위해 벌였던 소동과 미처 어머니를 막지 못한 날엔 베란다에 숨어 있던 일상의 뒷모습, 그녀의 머리색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떠올랐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지금 영석에게 필요한 건 돈이고 옛애인이 3년 전에 죽었든 10년 전에 죽었든 당장 돈을 꿔야만 하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친구에게 빚을 지겠다는 영석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한다. 영석뿐 아니라 한때 잘 살던 집 아들이었던 민재도 직장이 있는 친구들도 누구에게 돈을 빌려줄만한 형편은 못되어서 영석은 결국 옛교수에게까지 돈을 꿀 생각으로 큰 한숨을 내쉰 끝에 통화를 시도한다. 서울로 올라간다. 교수를 만나러 가기 전 일상과 함께 살았던 건물을 방문한다. 문은 잠겼고 비밀번호는 바뀌었다. 한심한 자신과 썩어 흔적도 없을 일상을 생각한다. 일상이 사라졌다. 영석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날마다 반복되는, 의미 그대로의 일상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또다른 일상도 함께 사라진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변변찮은 꿈도 없이 미대를 갔고 변변찮게 방황하며 학교를 다니다 졸업을 했고 변변찮은 직업 하나 구하지 못한 채 일상을 빚으로만 채우다 그 변변찮은 일상조차 깨어지며 돈을 꾸러다니는 청춘의 고단한 모습이 안쓰럽지만 한심하고 안타까운데 또 한대 쥐어박고 싶기도 하고 참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비슷한 심정으로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고 꾸역꾸역 일하며 푼돈 밖에 못버는 인생을 살고 있어서 그런가 영석을 보는 내내 좋은 의미로 좋지 않은 의미로 속이 뜨끈뜨끈했다. 그 푼돈이 별 거 아닌 것도 맞지만 그 별 거 아닌 게 이어져야만 유지되는 일상의 의미를 영석이 더 늦기 전에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단편 소설인 줄 알면서도 영성의 다음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 짧지만 울컥 마음을 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