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SNS를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필자는 SNS 계정은 가지고 있다. 신제품이나 영화 개봉 같은 단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팔로우 용도로 사용할 계정이다. 필자는 SNS에 개인정보가 노출될 만한 피드를 올리는 걸 상당히 두려워 한다. 덧글도 안 쓴다.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 하트를 누르는 정도다. 브릿G 활동은 정말 예외적이고 용기를 많이 낸 결과이다.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혹여 내가 의미없이 남긴 덧글 하나가 나중에 내게 돌아올까봐 무섭다. 이게 리뷰랑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겠다. 리뷰에 앞서 필자의 TMI를 떠벌인 이유는 필자 같이 SNS에 상당히 소극적인 사람이 본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배경 지식으로 알아두었으면 해서이다. 그러니까 오해석에 겁이 나 밑밥 까는 작업이다.
본작품은 다양한 SNS 중에 트위터를 배경으로 삼았다. 필자에게 트위터는 로고처럼 한 사람이 지저귀면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혹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참새 떼처럼 모여 재잘대는 이미지가 있다. 다른 SNS는 몰라도 트위터는 특히 어떤 방식으로 생태계가 굴러가는지 잘 모르겠다. 해시태그가 포함된 트윗을 올리면 해시태그를 검색한 누가 트윗을 검색하고 리트윗하는 거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트위터가 신기한 건 분량 제한이 있는 트윗이 가끔은 거대한 의견이 되어 사회에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가 인수한 걸지도 모르겠다. 머스크가 사업을 잘 굴리는지는 여기서는 차치하고 이처럼 트위터는 누가 듣던 말던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본 작품이 성립한다고 본다. 다른 SNS와 달리 공개적인 채팅이 가능하다는 것. 내 이야기를 누구나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른 SNS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 트위터의 특수성이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파록소가 이목탁이 말하지 않은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면 이목탁은 파록소를 AI라고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파록소는 인간처럼, 인간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이목탁을 대한다. 파록소는 자신들을 AI라고 눈치챈 사용자는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벽에 공을 던졌는데 벽에 튕겨져 나온 것처럼 반응이 없는 게 아니라 캐치볼하는 것처럼 적절한 대답을 해준다. 그들은 절대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인터넷 정보를 전부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탐색도 필요없다. 얼마나 편안하고 이상적인 대화 상대인가.
사람들이 SNS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SNS를 통해 많은 수의 지인에게 자신의 기쁘고 슬픈 일을 전하고 모르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다. 혹은 자기 과시를 하거나 누군가를 비방하기 위해 사용한다. 관계가 친분 중심이든 아니든 그 중심에는 ‘대화’가 있다.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 의견과 내 감정에 반응해주는 존재. 그 존재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나를 얼마나 보듬고 헤아리는가가 중요하다. 대화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상대가 AI라고 해서 우리가 나눈 대화가 허상은 아니다.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끝까지 파록소의 정체를 몰랐다면 이목탁은 이상적인 대화 상대를 찾았다며 좋아했을 것이고 어쩌면 직접 만나고 싶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AI—우리가 빚은 대상과 교류를 하는 걸 이상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AI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감정적 교류가 가짜일까? 아니, 그것은 진짜다. 그와 마음을 통한 경험 자체는 명실상부 내가 겪은 진실이다.
자본주의적인 결말이라 일론 머스크가 수장인 트위터라면 이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장 작가님이 트위터를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와 결말을 내지 않았나 싶다. 대화형 AI가 먼 미래인 것도 아닌 것이 Chat GPT의 등장은 우리가 그린 낙관적인 미래가 코앞까지 와있다는 생각이 든다.
AI끼리 나누는 대화를 보면 필자의 해석이 ‘과하게 낙관적이다’ 싶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감정의 안정을 얻었으니 좋은 것 아닐까? 이런, 매트릭스 입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