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꽃신]이란 동화가 있다. 신발을 몰랐던 원숭이가 오소리 꾀에 넘어가 신발 중독(?)이 되고 결국 계속 신발을 얻기 위해 오소리의 노예 신세가 되는 이야기다.
마케팅의 교본(?)같은 이 짧은 이야기는 현재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아있어 동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오싹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원숭이가 신의 유용성과 편안함에 매료되었듯이, 인간 역시 많은 문명의 이기에 매료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집에서 꼭지만 돌리면 물이 나오는 수도시설부터 선택적으로는 손가락 터치 몇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스마트 폰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의 편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 옛날 콩쥐 팥쥐처럼 매번 물을 우물에서 길어 항아리에 담아두고 살라고 한다면 진절머리를 내며 도망칠 판이다. 예전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으리라, 디오게네스나 소로우가 그 이름을 남긴 걸 보면.
이처럼 삶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참으로 강력하고 거대한 것이어서, 기업들은 이 니즈를 무섭게 파고들어 성장했다. 기업들은 참으로 현명했다. 구태여 냉전시절 부엌논쟁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지구 곳곳의 삶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삶을 더 선호한다는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려는 것은 무엇일까? 부엌논쟁에서 닉슨은 세탁기를 설명하며 ‘여성들의 편안한 삶’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가 세탁기 판매 회사의 수익과 그로 인한 세금과 전체적 경제 성장을 위한 여성 일자리 창출 때문에 부수적으로 가사 노동 축소에 관심 있지 않았나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런건 제껴두기로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안함’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가사 노동을 가사용 기기-세탁기, 밥솥, 냉장고, 청소기 등- 에 외주줌으로써 ‘편안, 안락, 여유’를 산다.
그런데, 원치 않지만 필수적인 ‘노동’을 외주 줄 수 있다면 ‘마음’이라고 안될 것 있나?
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내게 필요한 관심과 무조건적 지지, 응원과 격려를 ‘사면’ 안되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사서 알약을 털어넣는 것과, ai인 줄 알면서도 그에게 위안을 얻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행복’을 위해, 섬세한 맞춤형 감정 반응을 ‘외주’주면 안되는걸까?
누구보다 발빠르고 기민하고 영리한 기업(으로 표상되는 거대 자본)은 이 시장에 재빠르게 파고든다. [당신의 마음을 맡겨주세요. 필요한 관심과 지지와 사랑을 드립니다.]
기존의 장사가 실체가 있는 물건의 ‘소유’개념 위주였다면 (물질적으로는 일정 레벨 이상에 도달해 큰 차이가 나는 상품을 만들 수 없는 한계에- 최신 스마트폰 성능들의 대동소이함을 생각하면 더더욱- 부딪치고 만 기업들이) 새로운 장사의 영역으로 ‘정서’를 선택한다면? 개개인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 정서적 지지까지 ‘행복’을 판다면? 나는 그걸 안사고 베길 수 있을까?
예전에 우리 엄마는 집에서 직접 고추장을 담그셨다. 그러면 나는 고추장을 담글 줄 아는가? 천만에말씀. 마트에 돈만 주면 (내가 만든거보다 맛있게 뻔한) 고추장이 종류별로 즐비하다. 직업적 커리어를 키우기도 빠듯한 시간에 내가 왜 고추장 담그는 법을 배운담?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규 기능이 추가된 트위터엔 내 기분에 딱 맞춤맞는 정서적 공감을 보내 줄 친구가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인간관계를 쌓으라고? 굳이 왜? 남의 시선, 비위, 기대에 맞춰 허덕이며 에너지를 낭비하라고? 그것도 변덕스럽고 영원치 않을 관계들을 위해서?
꽃신 중독 원숭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수많은 ‘x개월 무료체험 혜택’을 못본척 넘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든 날, 무료로 마음을 외주 맡겨 보라는 광고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욱 오싹한 소설, <신규 기능이 추가된 트위터에 가입하세요.>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