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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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장면은 무엇인가요?
 
 다진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몇 년 전 독서 모임에서 받았던 질문을 떠올렸다. 미시마 유키오가 쓴 ‘가면의 고백’의 서두가 기억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다진은 순간 떠오른 기억을 적당히 대답했다. 사실 다진에게는 시기는 조금 늦을지 몰라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장면을 대답하지 않은 건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린애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남에게 볼품없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도 다른 기억을 제치고 가장 먼저 그 기억을 떠올린 건 이 순간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번 시간에는 가훈을 발표하도록 하겠어요. 다들 자리에 앉아요.”
 선생님의 주의에도 아이들은 교실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선생님은 손뼉을 쳤다. 아이들은 행동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칠판 위에 놓인 시계를 가리켰다. 분침이 한 눈금을 향해 느리게 나아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까먹은 수업시간만큼 쉬는 시간을 제했다. 1분이건, 10분이건 에누리 없이. 처음에는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선생님에게 투정 부렸지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군말없이 따랐다. 일사분란하게 책상과 의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숙제는 다들 해왔죠?”
 아이들은 제각기 가방에서,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가 모자라게 빼곡하게 적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 줄도 간신히 적은 아이도 있었다.
 “누구부터 발표해볼까?”
 아이들은 먼저 손드는 사람이 지는 게임처럼 책상 밑으로 손을 꽁꽁 숨겼다. 아홉 살 소년, 소녀에게는 스스로 손을 들어 발표하는 것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은 교실 구석까지 고르게 눈길을 보냈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면 지는 게임처럼.
 “가장 먼저 발표하는 친구와 박수를 제일 많이 받는 친구에게는 칭찬 스티커를 주겠어요.”
 선생님은 노랗고 빨갛고 파란 스티커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스티커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책상 밑에 숨어있는 작은 물고기들이 미끼에 동요했다. 방학식까지 칭찬 스티커를 가장 많이 모은 학생에게 선생님은 특별 선물을 주었다. 이번 상품은 36색 고급 색연필 세트다. 색연필 세트를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었고 미술에 흥미가 없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색연필 세트는 우승 트로피였다. 저번 1학기는 스티커를 남발했던 탓에 공동 1등이 4명이나 나왔다. 형평성 문제로 고생한 선생님은 2학기에는 좀처럼 스티커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발표하는 건 다른 문제다. 발표하다 실수라도 하면 친구들에게 일주일은 꼼짝없이 놀림당하고 만다.
 “정말 없어요?”
 선생님은 스티커지를 펄럭였다. 스티커를 두 개 줄까 고민하던 찰나 잠잠한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중앙 분단 맨 앞자리에 있는 아이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어, 그래. 진수가 한 번 해볼까?”
 수박 속처럼 볼이 빨간 아이는 삐뚤삐뚤한 글씨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저희 집 가훈은 ‘고진감래’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로 할아버지께서 정하셨습니다.”
 아이는 납작한 코에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너무 짧은 발표에 침묵이 잠깐 이어졌지만 선생님은 곧장 박수로 침묵을 몰아냈다.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박수를 쳤다.
 “좋아요. 진수는 가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아이는 납작한 코를 긁적이더니 “고생 안하고 복이 오면 안되나요?” 하고 도리어 되물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지 않고 복을 얻는 것이 제일 좋겠죠. 할아버지께서는 고생 속에서도 보람이 항상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발표 잘 들었어요. 다음으로 발표할 사람?”
 선생님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반짝반짝 손을 돌렸다. 아직도 아이들은 손들기를 주저했다. 발표의 물꼬를 트기에 한 명은 부족했나 보다. 선생님은 다른 떡밥을 바늘에 꿸까 고민했지만 칭찬 스티커를 남발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 두 개를 주겠다고 하면 먼저 발표한 진수에게도 미안하기도 하고 다음번에 미끼로 스티커를 사용할 때 하나로는 아이들이 물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삼 분단 네 번째 줄에서 작은 손이 공중을 허우적댔다. 선생님은 입질을 놓치지 않았다.
 “경태, 발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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