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재 장편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는 신일숙 작가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프리퀄 소설이다. 작가에 대해서는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1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 당시 종이로 읽는 만화(또는 웹툰)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차츰 만화에 흥미가 생겨 그쪽으로 책을 찾아보니 신일숙 작가는 이미 다양한 상상력으로 오랫동안 대단한 작품을 쌓아 올렸으며 두터운 팬층 역시 지니고 있었다. 만화를 보기 전에 프리퀄을 읽는다면 그 맛이 완전히 전해질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분히 원작에 대한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왕녀를 주인공으로 한다. ‘주술과 불새의 나라’로 소개되는 아르미안에서 네 명의 왕녀는 저마다의 입장으로 살아간다. 아르미안의 최고 권력자 레마누 기르샤의 딸인 마고, 스와르다, 아스파샤, 샤리. 그들에게 얽힌 운명만 세어보아도 한 나라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아르미안의 주변국인 페르시아 등의 이름으로 시대 배경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미 낯설지 않은 지명으로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간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이국적 색채가 결합한 이 소설은 하나의 불길한 징조에서 출발한다.
타오르지 않는 불꽃나무
아르미안에는 ‘라숨마’라는 이름의 불꽃나무 숲이 있다. 그곳은 단순히 신성시되는 지역이 아닌 아르미안의 의식주, 그리고 경제/정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실용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라숨마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은 역사상 최악의 사태라고도 볼 수 있으며 상당히 나쁜 예감으로 해석된다. 소설은 바로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불꽃나무가 시들었다고 한다”. 이 문장을 통해 상당히 복잡한 층위의 어둠이 암시된다.
나라에 위태로움이 암시되면 권력의 중심부가 요동하기 마련이다. 일반 국민은 왕국의 처지를 알지 못한 채 축제를 즐기지만, 왕녀들을 비롯한 권력층은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작품의 초반에 불꽃나무를 시들게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둘째 왕녀 스와르다였다. 스와르다는 출생 이후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죽음을 밟고 있는 신’이자 어둠의 신인 ‘나바야’의 힘을 몸 안에 받아들이게 된다. 창조신으로 숭배되는 마하시바야와 대척점에 있는 나바야는 ‘악’으로 구분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긍정적으로 대우받는 신은 아니었다. 스와르다는 나바야의 힘으로 병을 고치고 “아름다운 외모”까지 가질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행복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의 가장 큰 특징은 중심이 되는 인물의 시점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네 명의 왕녀, 그리고 주변 인물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 왕녀 스와르다의 시점은 아프다. “별은 서로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스와르다는 “사후 모든 아르미아느는 하늘의 별이 된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믿었고 그랬기에 죽음을 두려워했다.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 안에서 살지만 죽을 수 없던 스와르다의 말은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눈을 돌리면 셋째 왕녀 아스파샤가 있다. 아스파샤는 매사에 도전 정신이 있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그런 아스파샤는 불꽃나무가 시들어가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화의 힘을 가진 ‘레다의 별’ 아르베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스와르다가 아스파샤의 유능함에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둠의 힘을 받아들인 다음 숨어 살아야만 했던 스와르다에게 능력 있는 아스파샤는 온전히 동생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파샤가 아르베스에게 거절당한 상황은 스와르다의 “마음에 들어”버린다. 스와르다는 “동생의 불행을 즐기”는 자신에게도 실망을 느낀다. 하지만 독자들은 스와르다의 진심을 알기에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며 때로 몰입한다.
아스파샤와 스와르다처럼 첫째 왕녀인 마고와 넷째 왕녀인 샤리는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단순히 나이와 직급의 차원이 아닌 캐릭터의 전반적 면모가 반대 성향을 보인다. 마고는 차기 레마누의 자리가 확정시 되어 있으며, 그 자리에 걸맞는 권위를 보여준다. 반면 샤리는 작품 안에서 발랄한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때로 어른들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마고의 인물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만, 샤리는 악의 세력과 싸우며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혈통’에 있다. 아르미안은 모계 혈통을 이으며 대대로 왕녀를 배출했다. 막내인 샤리는 마고, 스와르다, 아스파샤와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랬기 때문에 금발의 머리를 숨겼고, 염색을 했으며, 마고가 레마누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모종의 위험을 겪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고와 샤리는 종종 일반의 자매처럼 보이기보다는 약간의 정치적 위계관계 아래에 놓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런 마고와 샤리가 협동하여 악한 인물인 테르틴과 어둠의 신 나바야에게 대적하는 모습은 흥미롭다. 소설의 전반부에 작가는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고와 스와르다, 아스파샤와 샤리를 묶는다. 연령대가 비슷하여 각각의 인물이 서로 잘 어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후반부의 반전에 방점을 찍기 위한 의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일종의 운명으로 묶여 있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만 같던 두 인물의 후반부 활약상은 의외로 퍼즐처럼 꼭 맞는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는 이렇듯 사소한 동시에 심각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왕국의 상황을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왕녀들의 관계,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 축제가 한창인 왕국의 이면에 펼쳐지고 있던 어두운 음모는 중반과 후반에 걸쳐 상세히 드러난다. 각 왕녀의 상황과 그것에 얽힌 다양한 사건, 초점화자로서 기능하는 각각의 인물 심리를 추측하며 읽는다면 왕국의 상황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흥미 위주인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초반을 읽었다면 뒷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아르미안의 마법과 이국적 색채가 빛을 발한다. 마고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 테르틴이 나바야의 편에 섬으로써 작품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선과 악, 또한 그 사이의 것들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는 제목에서 ‘검정’과 ‘회색’의 색감을 드러낸다. 검정이 악이라면 왜 그 뒤에 ‘화이트(흰색)’이 아닌 애쉬가 오는 것일까. 이런 형식의 제목은 이 작품이 완전히 선과 악을 나누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왕녀들과 기르샤, 그리고 아르미안의 편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의심의 여지없이 선인으로 그려지지만, 악인들 중에는 완전히 악의 편에는 서지 않은, ‘이유 있는 악당’이 포함되어 있다. 블랙과 화이트가 아닌 애쉬. 중간의 것들은 어느 쪽으로 관점을 달리하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선과 악을 동시에 고려하게끔 한다.
샤리가 머리를 염색하는 동안 나타나 마지막까지 도와주는 ‘해시’라는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 해시는 선한 인물처럼 샤리를 돕는다. 마고와 함께 샤리가 탑을 오를 때에도 마지막 층까지 가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다. 하지만 해시는 악의 수장처럼 보이던 나바야의 애인이었다. 물론 해시가 그의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나바야의 연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샤리와 마고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따지고 본다면 해시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에 대해 마고와 샤리는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해시는 완전히 선한 쪽으로도 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이어서 ‘애쉬’의 계열에 있는 주요 인물로 나바야를 보자. 나바야는 아르미안을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의 전반에 걸쳐 절대악으로 명명되지는 않는다. 나바야는 그저 ‘어둠의 신’으로 표현되며 다신을 숭배하는 이 지역의 특성을 따져보자면 여러 신 중 한 명일 뿐이다. 이 점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보통의 판타지에서 왕녀가 창조신의 대척점에 있는 어둠의 힘을 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상황은 생각하기 힘들다. 또한 스와르다는 자신의 검은 힘을 다시 악을 물리치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선과 악의 위치를 완전히 재해석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힘’의 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아르미안’의 재앙은 암시한다. 아르미안의 편이었지만, 악의 편에 선 테르틴과 검은 힘을 받아들이고도 왕국을 구한 스와르다처럼.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에는 평면적인 인물이 거의 없다. 마고는 샤리를 못미더운 어린아이로만 여기다가 탑에 오르며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을 본다. 스와르다는 악의 힘을 받아 외로움에 잠식되는 인물이었지만, 결말에서 누구보다 강한 힘으로 악의 수장인 테르틴을 홀로 상대한다. 샤리는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밝고 명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창조신 마하시바야의 후생(後生)을 잇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리는 사실상 이 작품의 중심이자, 진행 안에서 가장 많이 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테르틴을 사랑하던 도무르는 변해버린 그녀를 막으며 아르미안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인물 개인이 이루는 성장과 변화의 모양, 그리고 그것이 아르미안 왕국의 존재에 미치는 영향은 각각 다르다. 그것을 스펙트럼으로 표현하자면 어느 하나에 몰린 것이 아닌 고른 분포를 보일 것이다. 중간과 양 극단, 그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아르미안을 살리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들의 얽히는 모습은 블랙 또는 애쉬, 검거나 회색이다.
맺으며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블랙 애쉬》는 프리퀄 소설이 아닌 독립적인 작품으로 보아도 상당한 완결성을 지닌다. 작가 특유의 판타지적인 느낌과 모계 사회를 이어가는 왕국의 등장, 그 나라를 둘러싼 모종의 음모,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인물의 설정을 보며 독자들은 100회의 긴 진행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아르미안’이라는 말 안에는 수많은 인생이 중첩되어 있으므로 그들 역시 이 소설을 구성하는 큰 요소이다.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기 전에 이 작품을 본다면 진입의 문턱이 훨씬 낮아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소설은 진입의 문턱을 완전히 부수어 버린다. 그만큼 화끈하지만 섬세하며 때로 슬프다. 이 시점과 저 시점이 다르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삶이 다르다.
신화로 이어진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무너뜨리려는 세력의 싸움, 선과 악의 대립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 작품은 운명대로 시작될 하나의 세상을 보여준다. 거부할 수 없이 그 세계에 몸을 맡기는 건 당연하다는 듯.
불꽃처럼 화려하게, 더는 견딜 수 없는 모험을 떠나는 건 이렇듯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