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숙 작가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예전에 도서관에서 조금 훑어봤던 기억이 나서 이 작품을 읽었다.
원래 내 취향이 순정만화하곤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읽진 않았지만(그래서 지금도 후회 중이다) 그래도 작품 속 가상 왕국 ‘아르미안’ 왕녀들의 비극적인 삶을 접할 때마다 나의 마음은 마치 코끼리에 밟힌 듯이 흔들렸다. 특히 내 마음에 깊은 발자국을 남긴 건 1왕녀 ‘마누아’와 4왕녀 ‘샤르휘나’의 삶이었다.
마누아는 자매들 간의 후계 분쟁을 피하고 싶었던 어머니 ‘기르샤’에 의해 태어났을 때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었고 본인의 능력 또한 제왕이 되기에 걸맞았다. 아마 마누아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아르미안의 국가적 생명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 같다. 마누아는 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상당히 냉혹한 정치를 지향했는데, 그런 면은 귀족들뿐만 아니라 여동생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 큰여동생인 2왕녀 ‘스와르다’가 좋아하는 남자를 이용하고, 막내 여동생 4왕녀 ‘샤르휘나’가 제왕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징표를 드러내자 가차없이 추방해 버리는 장면은 내게 있어 단순한 동경심을 넘어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 만화를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 장면이 기억날 정도다.
추방되었던 샤르휘나가 아르미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되어 나라의 문을 닫아 버리는 장면도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샤르휘나는 작품 속에서 아르미안 태조 ‘마하시바야’의 신비한 힘을 타고나 여러 신이나 정령들과 교류하며 모험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보통 창작물에선 그런 사람이 왕이 되면 기울어가던 왕국을 되살리는데,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샤르휘나가 왕이 되었어도 멸망으로 달려가는 나라의 운명을 막을 수 없었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샤르휘나가 잘못을 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나라가 망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고, 샤르휘나는 자국을 짓밟으러 오는 침략자의 군대에 맞서서 나라 전체를 자신과 함께 사막 아래로 묻어 버린다. 어찌보면 샤르휘나가 왕국에 순장당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공식 프리퀄인 이 작품 <블랙 애쉬>를 읽고 나선, 등장인물들이 내 가슴 속에 남긴 발자국이 더 깊어졌다.
일단 이 작품에서 ‘마고’로 등장한 마누아가 어릴 땐 제왕이 되기 적합한 인재가 아니었단 점이 놀라웠다. 이 작품에 묘사된 어린 시절 마누아는 잔인하고 제국주의적인 성정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성정을 공유하던 신관 ‘테르틴’이 타락하고 나서, 마누아는 부지불식간에 그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 같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본편에서 나오는 어른 마누아는 냉혹할지언정 잔인하지 않고, 제국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부국강병과 나라의 생존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작품에 나타난 사건은 마누아의 이성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마누아의 감성적 성장도 드러난다. 냉혈한이던 마누아가 샤르휘나와 함께 모험을 하며 본인 딴에는 장난이란 것도 치는 데다, 사람의 정이란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감성이 성장한 뒤에도 마누아는 자신의 영원한 짝사랑남 케네스를 받아 주지 않는다.
(케네스는 어떻게 된 게 프리퀄에서도 가엾기 짝이 없다. 고생만 억세게 했지 얻은 게 없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자면 나는 어릴 때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본편을 읽으면서도 케네스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샤르휘나는 <블랙 애쉬>에서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나오는 데다 용감한 모습까지 부각된 덕분에,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샤르휘나는 자기가 타고난 금발을 좋아해서, 검은 염색이 벗겨질 때마다 어머니가 매번 다시 염색해 주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샤르휘나가 크게 저항하는 모습은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 마지막에 샤르휘나가 자기 본질과 대면하고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데, 머지않아 그에게 닥칠 수난을 아는 독자 입장에서는 그의 용감함이 슬프게 느껴진다. 아르미안 태조 마하시바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의 환생 샤르휘나의 마지막을 그렇게 끝내기로 결정했을까?
본편에서는 언니와 동생의 파란만장한 삶에 약간 가려졌던 스와르다와 3왕녀 ‘아스파샤’의 인생들도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참 아릿한 상처처럼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 스와르다는 어둠의 힘을 다룰 줄 알면서 왜 본편에서 자기를 둘러싼 부조리에 저항을 못 했을꼬? 물론 언니한테 남자 뺏길 때는 언니가 왕인 걸 고려해서 어둠의 힘을 못 썼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똥차 2호(똥차 1호는 마누아 남편 리할)한테 시집간 뒤로는 자기를 집단으로 괴롭혀 대는 그의 부인들에게 어둠의 힘 한 번 발사해 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스와르다의 삶이 정말로 아쉬웠다. 그리고 우리 박식한 아스파샤는 그리스 똥차 만나지 말고 아르미안에 남아서 신관이나 박사, 교수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것 같았다.
여하튼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나중에 한가할 때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정주행해 보고 싶어졌다. 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한국 만화계의 전설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프리퀄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본편은 얼마나 더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내가 직접 꼭 꼼꼼히 읽어 봐야겠다.
이 작품을 쓰신 미메시스 작가님과 본편을 쓰신 신일숙 작가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