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휴가

  • 장르: 추리/스릴러, 일반
  • 평점×205 | 분량: 78매
  • 소개: 어느 날, 누군가 내 아이의 유모차를 밀어 살해했다. 더보기
작가

다정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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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

원흉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날 아침 미우가 설거지를 하다 주저앉아 악을 쓰며 울어버린 탓에 티브이를 보며 식판에 담긴 아침을 먹고 있던 세나가 어린이용 젓가락을 손가락에 끼고 낯선 미우를 공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 곧 미우를 따라 입 안 가득 분해되지 못한 멸치볶음과 밥알을 그대로 내보인 채 울게 된 그 모든 일의 이유는 안방에 있었다. 태어난 지 13개월 된 리한 탓이었다.

미우는 리한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업무로 복귀한 지 열흘이 지났다. 첫째 딸아이 세나를 길렀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세나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휴직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기대심이 가득 차 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미우보다 한 해 먼저 육아휴직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던 마케팅 부서 혜진의 말로는 휴가보다 중노동 출장이 더 맞는 표현이라며 한 달도 채 채우기 전에 차라리 일을 하게 해달라고 빌게 될 거라고 말했다.

진호도 세나를 가졌을 때에는 미우와 같이 휴직을 냈다. 그때 당시 진호에게도 주변에서 조언을 가정하여 혀를 많이 내둘렀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것은 둘이서 같이 육아휴직 내봤자 급여는 한 명에게만 지원이 되니 무엇하러 아내와 꽉 채운 1년 휴직을 내느냐는 것이었다. 개월에 조금이라도 차이를 두라고 했지만 진호가 느끼기에 곧 바빠 올 연말에 인력 하나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 같았다. 하지만 진호는 완강히 한날 한 시, 미우와 함께 휴직을 했다. 아이를 위한 휴직이라고 말을 붙였지만 사실 출산이라는, 진호는 결단코 가늠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미우를 극진히 보살피기 위함이 컸다. 세나를 가졌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이 계획대로, 무리 없이 흘러갔다. 결혼의 현실이라든가 육아 지옥, 현실과 가정이라는 극단의 축에 가랑이가 찢어져라 서 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쩌면 첫째 세나의 타고난 성상이 얌전했던 덕일지도 모른다고, 미우는 둘째 아들 리한을 낳고 생각했다.

“전날 지출결의서 확인하고 다시 연락 주세요. 문제 있으면 애 업고서라도 가야지 어쩌겠어요?”

미우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아마 자신이 리한을 업고, 한 손에는 세나의 손을 잡고 회사로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휴대폰에 불이 나는 한이 있어도 누구도 미우에게 두 아이를 데리고 회사에 오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 자기들도 전화로 일을 시킬지언정 급하게 낸 연차 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일을 시키기에는 퍽 미안할 테니까.

리한은 세나와 달랐다. 임신했을 때부터 전에는 이처럼 심한 입덧과 몸살을 앓은 적이 없었다. 성별을 확인하기 전부터 시어머니는 아들이라 그렇다며 자신의 고통과는 전혀 상관없이 진호를 임신했을 때 자신이 겪었던 고통만을 줄줄이 나열했다. 집안일을 도와주겠다고 이른 아침부터 소식도 없이 찾아왔으나 결국 사과를 깎거나 그릇을 치우는 것도 미우의 몫이 된 이후로, 다음부터는 시어머니가 찾아와도 집에 없는 척 휴대폰도 꺼두고 갈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저녁에야 엄마한테 갔다 왔다는 둥의 연락을 했다. 정말로 엄마한테 갔으면 덜 서럽기라도 하겠으나 그 얌전한 세나를 몇 달 봐주면서도 몸이 망가진 엄마라 미우는 자신이 찾아감으로써 한 시도 가만있지 않을 엄마를 생각하면 짐을 싸다가도 손이 절로 멈췄다. 정말로 그나마, 세나가 얌전한 아이어서 다행이었다.

올해로 7살이 된 세나는 지난해부터 유치원에 다녔다. 누구에게 아이를 맡기든 집에 계속 있는 것보다야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과 어울리고 오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세나는 마치 타고나기를 제 엄마를 위해 천사가 내려온 듯한 아이였다. 태어나던 순간에도 긴 진통 없었으며 몇 번 만에 매끄럽게 나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울지 않아 걱정이었으나 곧 의사는 요즘은 아이들이 울지 않아야 편안하게 나온 것이라며 안심시키며 방과 똑같이 생긴 출산실에서 미우의 가슴에 세나를 안겼다. 이마가 볼록하고 눈썹이 긴, 감고 있는 눈만 보아도 얼마나 사슴 같이 큰 눈망울을 가지고 있을지 짐작되는 딸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새끼 기린처럼 빨갛고 쭈글쭈글해서 징그럽다는데 미우에게 세나는 그저 예쁘기만 했다. 7년이나 지났으니 해가 바뀔수록 기억이 점점 더 미화됐다고 하더라도 미우는 세나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의 포근한 인상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였다.

세나의 밥상을 치워주려던 순간 잠든 지 기껏 이십 분이 좀 지난 리한이 또 울기 시작했다. 식판에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미우가 “잠시만.”하고 세나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고는 안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두 층 위에 사는 정씨가 돈을 받고 아이들을 돌봐줬다. 리한을 낳고 두 번째 육아휴직을 지내고 있을 적에 더는 엄마에게 아이를 부탁하지 못함을 알고 어린이집이나 유모를 구하기 위해 동네 어린이집과 인터넷을 샅샅이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어린이집이고 유치원이고 흉흉한 일이 많았으며 인터넷은 정보를 찾으려고 할수록 유모에게 덴 일화들이 자꾸만 눈에 보였다. 그렇게 쉬이 어느 곳도 결정하지 못하고 광속처럼 휴직기간이 끝나갈 무렵,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아파트 1층 광고판에 붙은 어린이집에 연락을 하려던 찰나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간간히 눈인사를 나눴던 정씨가 먼저 ‘아이 맡기시려고?’하고 물어왔다. 정씨가 아파트의 아이들을 맡아 왔다는 건 그때 알았다. 미우는 그제야 분리수거장에서 정씨를 만날 때마다 등에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키도 작고 마른 몸에 나이도 이제 쉰 끝자락이라서 정씨가 아이 둘을 봐줄 여력이 있을까 싶다가도, 그간의 내공도 있을 것이고 쌩 판 모르는 남보다는 나았으며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리한이는 아침 8시부터 미우가 퇴근해서 오는 7시까지, 세나는 유치원을 마치고 오는 시간부터 7시까지 봐주는 걸로 적지 않은 금액을 월급으로 주었다. 미우의 수입 중 절반이 정씨에게 가는 것이어서 개인 적금통장에 돈을 넣었던 것도 그때부터 뚝 끊겼고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까 싶어 간간히 정해진 액수보다 돈을 더 많이 넣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고 8시 10분까지도 정씨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기다리다 전화를 걸려던 찰나에 정씨가 전화를 해왔다. 며느리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빨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새벽에 응급실로 갔다는데 정신이 없어 해가 좀 뜨고 전화한다는 걸 이제야 하게 됐다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미우는 왈칵 ‘그럼 저는요?’하고 외치고 싶었으나 알겠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야 손자 보신 걸 축하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왜 우는 거야, 응?”

13개월을 조금 넘긴 리한은 이제 제법 앉은 자세를 유지하거나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일어나려는 시늉을 보이기는 했으나 아직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있었으며 틈만 나면 울었다. 피부가 예민해 웬만한 이불은 손빨래하지 않으면 살갗에 닿는 부분에 금방 두드러기가 일어났다. 잔열도 쉽게 올라서 몇 번이나 응급실에 갔는지 모른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이므로 각별히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세나 때에는 이런 적 없었는데…….’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괜히 리한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이럴수록 세나와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이 하나를 키웠다고 둘째에는 기고만장해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세나야 왜? 필요한 거 있어?”

세나가 문지방을 밟고 서서 안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설거지 내가 했어. 내 거.”

“어머, 그 사이에? 내버려두면 엄마가 할 텐데.”

세나가 큰 눈으로 미우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뻗었다. 가리키는 것은 미우 품에서 겨우 울음을 그친 리한이었다. 미우가 민망함에 웃었다.

“우리 세나가 최고다, 정말 고마워.”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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