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 아빠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아빠도 자리에 앉았지요. 늦도록 잔업을 하는 사람들이 층마다 대여섯 명씩은 있었습니다. 끼니를 못 챙길 정도로 업무에 치이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야근수당을 타고자 귀가를 미루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빠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 시절의 아빠는 집에 가서도 그다지 할 일이 없었거든요. 엄마를 만나고부터는 늘 제일 먼저 사무실에서 탈출했지만요.
책상 왼편에 들쭉날쭉하게 쌓인 서류철을 얼마간 뒤적거리던 아빠는 소설책을 펼치고서 더 이상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웹툰으로 관심을 옮기기 전까지, 그러니까 도서대여점 시대가 몰락하기 전까지 아빠는 시중의 무협지를 모조리 섭렵했다고 자랑한 적이 있어요. 그날도 아빠는 티백으로 우려낸 녹차를 홀짝거리며 강호의 안개 낀 대나무 숲을 훌훌 날아다녔어요. 거기엔 하늘을 찌르는 빌딩 숲도 숨 막히는 지하철도 없겠지요.
“상식 씨.”
북슬북슬 투박한 손이 아빠의 어깨를 툭 건드렸습니다. 아빠는 하마터면 녹차를 엎지를 뻔했어요. 돌아보니 경완 씨가 헤죽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라기는. 집에 가서 편하게 읽잖고.”
“아, 형님. 오늘까지 반납해야 돼서요. 가는 길에 반납하려고요.”
“나도 본 거네. 가만있자, 9권이면 하선랑이 죽던가?”
“하선랑이 죽어요?”
무심코 실언한 경완 씨는 아빠만큼이나 당황하여 횡설수설했습니다.
“농담이야, 농담.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야. 아니, 그보다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태어난 이상 반드시 한 번은 죽는 거야. 에… 그나저나 뭐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혹시 상식 씨도 그거 했어?”
“뭘 해요?”
“설문 말이야. 요새 TV나 라디오나 광고 엄청 때리는 거.”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부터 거국적으로 설문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권을 위시해 각종 크고 작은 경품을 내건 것으로도 모자라 편의점에서 소책자를 무료로 배포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어요.
“대국민 설문인가 뭔가 하는 거요? 아직 안 했어요. 왜요, 위에서 무슨 공문 내려왔어요? 하지 말래요?”
“공문은 무슨. 그냥 중간에 막히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려고 했지.”
“막히는 문제?”
“막힌다기보다는… 뭐랄까, 질문이 묘하게 까다로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개가 좋냐, 고양이가 좋냐. 죄다 이런 식이라니까. 어때, 상식 씨라면 뭘 고를 거야?”
“까다로울 것도 없구먼. 그냥 형님 좋아하는 걸로 골라요. 남한테 물어서 하면 설문조사하는 의미가 없지.”
“천국은 있다, 없다.”
“나, 원. 뭘 그리 쩔쩔 매요? 모태신앙이라면서?”
경완 씨는 아빠에게 핀잔만 들은 채 소득 없이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빠는 하선랑의 안위가 걱정되어 나이 많은 동료에게 조금 쌀쌀맞게 굴었던 거예요.
왈가닥 하선랑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와 주인공의 품에 안긴 것은 11권의 말미였습니다. 이 장대한 서사시에서 하선랑이 맡은 배역은 아주 사소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이야기 전체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했어요. 그로 인해 시종 미적지근하게 굴던 주인공은 복수를 다짐하며 무림에 투신했고, 아빠는 비로소 설문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