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삭이는 돌은 언제나 우연한 계기로 인류의 역사 속에 출현했어요. 서기 2048년, 자메이카 출신 다이버 콰트로 보일삭스는 북극해의 버핀 섬에서 테니스공만 한 푸른빛의 돌을 채굴하게 되죠.
순박한 심성의 콰트로는 열세 살짜리 딸에게 그것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고 북극해에서 발견된 돌은 대륙을 가로질러 자메이카 한 마을의 소녀의 손에 들어갔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콰트로는 얼어서 길쭉해진 콧물로 동료 광부와 칼싸움을 하던 도중 딸에게서 짤막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죠.
‘아버지. 돌이 말을 해요.’
딸의 말로는 푸른빛의 돌을 손에 꽉 쥐고 있으면 기묘한 중얼거림이 들려온다는 것이었어요. 오직 돌에 접촉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불가해한 소리. 돌 역시 소유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기묘한 언어로 대답을 할 뿐이었죠. 결국 속삭이는 돌은 마을의 명물이 되었어요.
콰트로의 딸은 처음엔 돌이 무서웠으나 나중에는 흡족한 기분에 젖게 되었답니다. 돌을 만져보기 위해, 혹은 속임수를 밝혀내겠다는 목적 하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집을 찾아온 거예요. 문전성시를 이루었겠죠? 누군가는 악마의 주문이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외계 성운에서 지적 생명체가 보내는 전보라고 주장했답니다. 그러나 마을의 어느 누구도 돌이 속삭이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자는 없었어요.
보름 후, 방문객들이 선물한 과자들 때문에 4키로나 몸무게가 늘었다는 것을 깨닫고 홈쇼핑으로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를 주문하려던 콰트로의 딸은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는 소문을 듣고 수도 킹스턴에서 찾아온 언어학자였죠.
콰트로의 딸은 방문객에 진저리가 나 있는 상태여서 그를 내쫓으려 손을 휘둘렀고, 언어학자는 말없이 모기 눈알 초콜릿을 슬쩍 내밀었어요. 콰트로의 딸은 순간 멈칫했답니다. 최고의 고단백 상품인 동물 눈알 컬렉션은 그녀가 평생 꿈꿔 온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요. 머릿속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는 모기 눈알에게 격퇴되었고 언어학자는 소문의 ‘속삭이는 돌’을 손에 쥐게 되었죠.
언어학자는 13일 동안 돌의 언어를 분석해 대었고, 그동안 콰트로의 딸은 2만 8900마리의 모기 눈알을 위장 속으로 집어넣었어요. 13일째 되던 날의 새벽. 2만 8900마리의 모기들에게 쫓기며 피를 빨리는 꿈을 꾸던 콰트로의 딸은 새된 목소리로 내지르는 언어학자의 외침을 들었죠.
“해냈다!”
전 세계의 모든 언어를 대조한 끝에 그가 결국 돌의 속삭임을 해독해 낸 거예요. 그것은 페니키아 어와 아카드 어의 유형과 매우 흡사했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는 그것이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해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인 유럽어학 교수를 부르기로 했고, 콰트로의 딸 역시 겸허히 텅 빈 초콜릿 상자를 가리키며 이번엔 두 배로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되도록이면 피를 빠는 주둥이가 없는 곤충으로.”
붉은 수염을 지닌 유럽어학 교수는 이튿날 한달음에 자메이카로 날아왔고, 교수답게 속삭이는 돌이 꺼내는 말이 페니키아 어의 원형이 되는 ‘셈 어’와 부분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어요. 유럽어학 교수는 언어학자와 콰트로의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속삭이는 돌과 대화를 시도했답니다. 그는 두껍기 그지없는 셈 어 사전을 바닥에 펼쳐둔 채 붉은 수염을 쥐어뜯으며 힘겹게 돌에게 말을 건네었죠.
“이름이 뭔가?”
그러자 놀랍게도 그 말을 알아들은 돌에게서 대답이 전해져왔어요.
「나는 아야마룩.」
돌은 자신을 아야마룩이라고 밝혔고, 다섯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다고 말했죠. 붉은 수염의 유럽어학 교수와 언어학자는 이 돌이 ‘누군가와 교신할 수 있는 어떠한 통신수단’이라는 것에 서로 동의했어요. 물론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인공위성 전화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아야마룩이라는 사람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한 거죠. 붉은 수염의 교수는 또다시 셈 어 사전을 한참 뒤적인 후에 물었어요.
“아야마룩.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사는 곳은 우가리트다.」
생소한 도시의 이름이었어요. 붉은 수염의 교수는 언어학자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언어학자는 콰트로의 딸에게 넓적사슴벌레 눈알 초콜릿 한 통을 더 쥐어 주었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으며 오직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안구 인식 컴퓨터를 작동시켜 ‘우가리트’라는 지명을 찾아보았습니다.
모니터가 뱉어놓은 검색 결과에 붉은 수염의 교수는 한 움큼의 수염을 부욱 쥐어뜯었고, 언어학자는 찢어져라 입을 쩍 벌렸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고 해요. ‘우가리트’는 기원전 3400년 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고대 도시의 이름이었거든요.
그들은 50세기 전의 인물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2.
저런, 당혹스러우신가 보네요. 하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가 아직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해요. 하지만 설빈 씨. 국내 최고의 영화배우인 당신의 아침 시간을 뺏으면서까지 이렇게 앉아 있는 저의 절박함을 조금은 알아주시길 바래요. 늘 정갈하게 프린트 된 시나리오만 받아 보던 설빈 씨에게 있어 구두(口頭)로 시나리오를 들려주는 일 또한 괴이하게 느껴지시겠죠.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지면으로 옮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대한민국의 그 어떤 배우도 해 낼 수 없는 일이며 오직 당신만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전 늘 생각해 왔어요. 그러니, 이왕 시작한 이야기 조금만 더 제게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물론 설빈 씨가 요새 마음고생이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일본의 아이돌 그룹 ‘핑구히메’의 메인보컬인 유미 다카코와의 스캔들 때문이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매스컴이라는 것이 원래 스타들의 틈을 파고들어 먹고 사는 하이에나같은 부류들이니까요. 혹시 알아요? 제가 들려드리고 있는 이 시나리오가 그 모든 부스러기들을 날려버릴 대작 영화의 시발점이 될지.
조금은 표정이 누그러지셨군요. 물론 어떤 표정을 지어도 여자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키실 정도로 수려한 얼굴이긴 하지만요. 이런 노처녀인 제게까지 말이에요. 호호.
그런데 조금 긴 이야기라 마음 편하게 들으시려면 다과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정도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빈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런 중요한 사안을 논의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쉼 없이 말을 해야 하는 저도 조금 목이 탈 테고 말이죠.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참, 전 밀크티가 좋답니다.
3.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속임수였어요. 과거와의 정신 교감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죠. 세 남녀 중 물리학에 조예가 깊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시간 역행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명제임이 밝혀진 것은 오래된 일이었어요.
그러나 돌을 통해 이야기하는 남자 아야마룩은 가짜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죠. 청동기 시대의 풍습에서부터 이미 멸종한 식물의 특성까지. 무엇보다 이미 소실되어 버린 셈 어를, 대학에서 강의를 펼치는 붉은 수염의 교수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증거였답니다.
“인정해야겠군. 뭐, 어때. 돌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백악기 공룡 트리케라톱스의 위장 속에 있는 기생충과 텔레파시를 나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지.”
언어학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야마룩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야마룩은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해 그동안 꽤나 공포에 떨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오기 전까지, 아야마룩의 최대 고민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 문제에 있었어요. 이웃 부족이 아야마룩의 부족 여자를 훔쳐가는 중대 사건이 벌어졌고, 아야마룩을 비롯한 마을 전사들은 여자를 되돌려 받기 위해 무력 충돌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었죠.
“하지만 우리 화살, 닿지 않는다. 그들 부족 울타리, 너무 높다.”
아야마룩의 말을 듣고 있던 붉은 수염의 교수는 콰트로의 딸과 그녀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있던 언어학자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고 세 남녀는 고민에 휩싸였어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정들어 버린 과거의 청년 아야마룩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대포로 쏴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격한 스트레칭을 한 뒤라 헉헉대며 콰트로의 딸이 말을 꺼냈어요. 언어학자는 그녀의 불어난 체중이 자신 탓이라는 미안함에 잠자코 있었지만 붉은 수염의 교수는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드러냈답니다. 기껏해야 나무에 청동을 묶어 만든 창칼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시대에 어떻게 대포를 구한단 말이에요.
결국 세 남녀는 청동기 시대의 화살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조사해 보았고 아야마룩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어요. 그리고 30세기에 걸친 무기 발전 역사를 모두 꿰고 있는 컴퓨터는 답을 토해 냈죠.
“아야마룩. 그들 담, 높아서 화살 넘을 수 없다고?”
붉은 수염의 교수가 이제는 조금 능숙해진 셈 어로 물었고, 아야마룩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언어학자가 교수를 재촉했고 붉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교수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죠.
“내가 방법 알려준다. 날아가는 새, 잡아서 깃털, 화살촉 반대편에 달아 봐라. 그러면 화살, 더 멀리 날아간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 남녀는 뿌듯한 마음에 맥주잔을 부딪치며 우정을 나눴을까요? 속삭이는 돌을 발견한 공로로 《타임》지의 표지 모델에 선정되었을까요?
아녜요. 그 뒤에 아야마룩이 붉은 수염의 교수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세 남녀 모두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어요. 아야마룩에게 방법을 전수해 준 순간 그들을 감싸고 있던 시간의 우주가, 어항에 물을 비우고 새 물을 붓듯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죠.
사실 그들이 아야마룩에게 알려 준 ‘화살깃’의 아이디어는 셈 족에게 있어 217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려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세 남녀는 아야마룩에게 화살깃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고 그때부터 시간의 톱니바퀴는 3400년 이전으로 돌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아야마룩은 화살깃을 붙인 화살로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그로 인해 이웃 부족의 여자들은 하룻밤 사이 아야마룩의 부족 남자들과 동침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발악을 했지만 잠자리에서 발휘되는 아야마룩의 색다른 기술에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라면 태어날 수 없었을 ‘소부타’라는 한 전사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죠.
소부타는 용맹한 무력과 뛰어난 카리스마, 그리고 큼직한 거시기로 우가리트 일대를 통일했고 강대해진 셈 족은 수메르 인들과의 전쟁 판도를 뒤바꾸어 놓기에 이르러요. 그리하여 원래대로라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인이 되었을 수메르 인들은 셈 족의 지배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소부타의 큼직한 거시기에서 쏟아져 나온 올챙이들은 유럽 일대로 퍼져나가게 되었답니다.
먼 훗날 그 올챙이들 중 하나였던 ‘하비레논’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의 오디세우스 장군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트로이 목마 속에서 잠복 중이었어요. 그러다 동료 병사가 뀐 방귀에 기도가 막혀 불행히도 질식사하고야 말았죠.
또 다른 올챙이였던 ‘장 꼴레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날,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하녀의 젖가슴을 뒤에서 더듬던 중 광분한 시민들의 외침소리에 깜짝 놀라 옥상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어요. 물론 비음 섞인 교성을 내지르던 하녀도 함께요.
그러나 질기게 살아남은 올챙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스파냐 해군 사령관 판데 에스키벨이었어요.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메이카로 넘어가 원주민이었던 아라와크 족을 이구아나 잡듯 제압해 버렸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답니다.
그날, 포도주에 잔뜩 취해 밤 상대를 불러오라 명한 판데 에스키벨의 얼굴에 포로로 잡혀온 한 아라와크 족 소녀가 용감하게도 가래침을 뱉어 버렸고 격노한 판데 에스키벨은 그 소녀의 목을 단칼에 잘라 버렸어요. 그 소녀는 643년 뒤 북극해에서 ‘속삭이는 돌’을 채굴할 운명인 콰트로 보일삭스의 머나먼 조상이었죠.
자, 이리하여 콰트로 보일삭스는 새로 쓰여진 역사의 페이지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렸어요. 물론 그에게서 돌을 선물 받을 콰트로의 딸도 태어나지 않게 되었고요. 자연스럽게 ‘속삭이는 돌’을 둘러싼 세 남녀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버렸답니다. 광대한 우주의 그 누구도 그 일들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어요.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끼인 티끌처럼 묻혀 버린 거예요.
그러나 ‘속삭이는 돌’은 묻히지 않았답니다.
북극해에서 묵묵히 푸른빛을 내뿜던 돌은 콰트로 보일삭스를 대신할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처음 발견되었던 2048년이 되던 해 다른 이의 손에 캐내어져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어요. 속삭이는 돌은 그것을 주운 자에게 또다시 과거의 인물과 연결시켜 주었고, 아야마룩에게 일어났던 일이 한 번 더 일어났습니다. 아주 사소한 ‘그들만의 속삭임’이 시간의 운명을 또다시 뒤집기 시작한 거예요.
돌은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기 시작했죠.
4.
영감이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감’은 양로원에서 기체조를 하는 할아버지를 향해 기둥 뒤에 숨은 할머니가 추파를 던질 때 쓰는 말은 아니에요. 인류 문명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한 발명가들이나, 자나 깨나 인간의 고뇌와 환희를 표현하고 싶어 몸부림쳤던 예술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냥 퍼뜩 떠오르는 것 아니냐고요? 물론 그말도 일리가 있죠. 뇌에서 파바박, 불꽃이 튀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머릿속에서, 혹은 고흐의 영혼 속에서 약동하기 시작한 그 영감들은 정말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일까요? 혹시 누군가 금기의 비밀을 살짝 엿보여 주듯이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뮤즈의 속삭임’ 같은 거 말이에요.
5.
속삭이는 돌은 쉬지 않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새것으로 갈아 끼웠어요. 적절한 시간에 맞지 않는 ‘때 이른 발명의 아이디어’는 세상의 수많은 발명품들을 앞당겨 놓았고요. 속삭이는 돌이 2048년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교환원이 통화를 연결시켜주듯 연결시켜 준 과거의 사람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뮤즈의 속삭임’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물론, 아무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오로지 ‘영감’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만 그것은 들려오는 것이었죠.
기원전 2511년. 이집트의 석수장이 실로스 라네는 주문 받은 코뿔소 석상을 옮길 걱정에 빠져 있었어요. 귀하신 집정관이 주문한 것이라 정성 들여 만들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집정관의 저택으로 옮길 인력이 부족했던 거죠. 집정관은 정해진 날짜에 자신의 앞마당으로 석상을 가져오라 명령했고, 장정 서른 명이 달려들어야 낑낑대며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석상의 존재는 실로스 라네의 시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어요. 100명 정도의 노예를 고용하면 수월하게 옮길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면 집정관이 준 수고비를 훨씬 웃도는 돈이 들어갈 터였고요. 그래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 거죠.
“확 그냥 코뿔소 머리만 싹둑 잘라서 가져다줄까.”
홧김에 실로스 라네는 이렇게 내뱉어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머리도 코뿔소 머리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 뻔했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적은 인력으로 힘들이지 않고 저 무거운 석상을 옮길 수 있단 말이지?
날짜가 다가올수록 실로스 라네는 초조해졌고, 초조한 마음에 잠자리에서도 서지 않는 물건은 실로스의 마누라를 날카롭게 만들었고, 결국 이집트의 석수장이 부부는 파혼의 위기에까지 이르렀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때문에 둘은 평생 갈라서지 않고 오랫동안 잘 살 수 있었답니다.
약속된 날짜 하루 전에 뮤즈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거예요. 머릿속에서 말을 건네오는 뮤즈는 처음엔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일 뿐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실로스 라네의 언어로 실로스 라네의 고민을 들어주었지요. 그리고 식후 디저트를 고를 때의 고민거리만도 못하다는 듯 해결책을 알려 주었답니다.
뮤즈의 속삭임은 단단한 통나무 다섯 개만 준비하라고 알려 줘 실로스 라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위에 석상을 올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비탈길을 굴러갈 것이라고 확신하듯 뮤즈는 말했지요.
그렇게 하여 ‘바퀴수레’의 원리가 실로스 라네로부터 탄생되었고, 그 기술은 유프라테스 강이 원류에서 젖줄을 타고 뻗어나가듯 이집트 전체로 퍼져나갔어요. 결국 멀고 먼 지역까지 무거운 돌을 나를 수 있는 ‘바퀴’의 원리는 이집트의 건축술을 경이적인 속도로 발전시켰고,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같은 불가사의한 유물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하게 남겼죠.
실로스 라네의 머리에 영감을 속삭여 준 어떤 존재를 알 리 없는 역사가들은 어찌하여 이집트 인들이 그토록 정교한 건축술을 가질 수 있었는지 해답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은하계로 묻지마 관광을 왔던 외계인들이 오지랖이 넓어 알려 주고 갔다는 이야기만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어요.
속삭이는 돌은 뉴턴의 머릿속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속삭여 주었고, 베토벤에게 ‘운명 교향곡’의 멜로디를 속삭여 주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1945년에 사라질 운명이었던 대한민국은 ‘한글’의 존재 덕분에 민족정신의 뿌리를 이어나가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 또한 세종대왕의 머리에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을 알려 준 뮤즈의 속삭임 덕분이었죠.
그렇게 속삭이는 돌은 영원한 생명을 구가할 듯이 보였어요. 프라이팬으로 계란 프라이를 뒤집듯 2048년의 세계 판도를 휙휙 뒤집으면서. 때로는 소련이 미국을 넉다운시켜 전 세계가 공산주의의 물결로 넘치기도 했고, 때로는 징기스칸이 죽지 않고 세계를 통일해 CNN 뉴스 아나운서들의 헤어스타일이 모두 변발 일색일 때도 있었지요. 음, 이건 좀 섬뜩하죠?
그러던 어느 2048년. 속삭이는 돌은 이전에 만났던 모든 주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리하고 교활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케빈 아이스하트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