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는 언제 끝나려나.”
와이퍼 사이로 젖은 구름을 바라본다. 아내의 흥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연신 눈을 깜빡인다. 괜찮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울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것 같다. 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어두운 기색은 없었다.
“언젠간 끝나겠죠.”
다시 흥얼거린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다. 웃고 또 웃는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나도 웃고 있었나 보다. 아내는 게임을 하다 말고 핸드폰을 빙빙 돌린다.
“오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나는 그냥 하고 짧게 답한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크다. 라디오 볼륨을 올리자 아내가 잉잉 거린다.
“빗소리가 좋단 말이에요.”
“미정이는 이런 축축한 게 좋아?”
“그럼요.”
두 번째 유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목소리다. 어쩌면 충격은 내가 컸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일 지도……. 하하, 유난히 아내의 목소리가 크다.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아직 혼란스럽다.
욕심일까.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요!”
아내는 볼륨을 올린다. 야자수 그림이 들어간 짧은 반바지를 고쳐 입고 다리를 당겨 앉는다. 이내 한 음 낮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내며 박자를 맞춘다.
욕심일 거야.
춘천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남은 듯하다. 습도 때문인지 몸이 개운치 않다. 이내 인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등으로 미간을 지운다
. 계획 없이 떠난다는 느낌은 처음 생각과는 다르다. 자유로움, 그런 느낌은 아직 없다. 힘든 일을 겪은 어린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질 않는다. 호수조차 구름에 갇힌 듯 답답해 보였다.
“작정한 듯 뿌려대는 군. 이러다 팔당호도 넘치는 것 아냐?”
운전대를 꽉 잡는다. 자세를 고쳐 안고 숨을 내려놓는다. 아내의 손이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든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오빠, 괜찮아요? 비는 금방 그칠 거예요. 이런 식으로 비가 내리면 세상이 다 떠내려 갈 것 같지만, 아직도 세상은 멀쩡하잖아요. 음……. 호수가 넘치고 이 차가 배가 됐으면 좋겠어요. 둥둥 떠서……. 어맛!”
차가 웅덩이를 밟고 휘청이다 곧 자세를 잡는다. 관자놀이 부근의 털이 쭈삣선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돌려도 시야가 어지럽다. 브레이크에 살짝 압력을 준다. 아닌 듯 목을 돌린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어요. 둥둥 떠서 가는 기분이라 괜찮긴 한데. 자기는 좀 힘들죠? 미안해요.”
계획은 내가 한 건데 아내가 오히려 난리다. 난 잠자코 먼 곳을 찾는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시동을 걸면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 같던 그곳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멍하니 하얀 벽지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자동 세차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정말 어디 가는 거예요. 아는데 모른 척 하는 거죠?”
“아니, 정말 몰라. 말했잖아. 그냥 눈감고 떠나는 그런 여행 말이야. 어차피 서울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 서울만 빠져 나와도 여행지지.”
“정말 서울 밖으로 나온 적 없다니 거짓말 같아요. 신혼 여행지 말고, 외국 나가 본 적도 없잖아요.”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는 내 배와 안전벨트 사이로 손을 넣는다. 야자수 반바지 아래로 나온 허연 다리가 하늘거린다.
“오빤 낭만적이네요.”
자취방의 벽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어려움 모르고 하얗게 자란 꽃처럼 쉽게 웃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거울을 보며 억지로 웃어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표정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조금 덥다. 바람 좀 올릴게요.”
겨우 직장을 갖게 되고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또다시 자취방에 틀어박혔다. 월급을 타면 기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취방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멍하니 무거운 숨을 내쉬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월급봉투를 그녀에게 건네는 상상을 했다. 심장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둑놈처럼 프러포즈를 했다.
“오빠, 저기 사람 맞죠?”
파란색 우비가 위태로워 보인다.
자전거를 피해 중앙선을 밟는다.
“뭐야, 이런 빗속에서…….”
핸들을 돌려 옆길로 빠진다. 숲이 다가오며 도로가 어두워진다. 갑작스런 돌풍에 가지들이 비명을 지른다. 아내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창밖을 살핀다.
“아니, 식당이라도 있으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듬성듬성 박혀 있던 식당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빽빽이 자란 나무들은 안개를 품은 채 몸을 흔든다. 아내는 생수 한 모금 마시고 내게 건넨다. 나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표정을 숨긴다.
와이퍼가 밀고 간 자리에 표지판 하나가 떠오른다.
어촌…… 마을?
녹이 슬어 희미해진 글자를 겨우 읽어낸다. 이름 참 이상하군.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어촌 마을이라니…….
“오빠, 나 배고파요.”
100미터쯤 더 나아가 차머리를 돌린다. 좁은 시멘트 길이 토사로 어지럽다. 나는 주저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무성한 나뭇가지 밑에서 상향등을 켠다. 동굴을 처음 본 아이처럼 아내는 입을 벌린다. 차는 출렁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나아간다.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창문을 긁는다. 그곳은 이미 낯선 밤이다.
“여기 와 봤어요? 도저히 뭐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표지판이 있으니까…….”
돌아갈까?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삼킨다. 이상한 기분이다. 길이 있는데도 없는 느낌. 곧 동굴의 끝에 다다를 것 같은 이상한…….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나, 아기 가질 수 있대요. 좀 쉬고 좀 그러면…….”
“그래. 그런데 여기 너무 어둡다. 벌써 밤이 된 것 같아. 배고프지? 어촌 마을이라니까 고기를 팔지 않을까?”
잠깐 드러난 하늘은 여전히 무겁다. 아내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말이 없다. 나는 정적의 근원을 찾고 있다. 결국 라디오 스위치를 돌린다.
“안 나와요. 지직거려요.”
10분 정도 지났을까, 숨이 무거워 길게 뱉어낸다. 아내는 이제 생수병을 꼭 껴안고 있다. 행운이 계속 되었다면 생수병 대신……. 아니, 이런 생각은 말자. 어쩌면 욕심인 것을. 혼자가 아닌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이내 둘러싼 나무들을 벗어난다. 먼 쪽으로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차를 세운다.
“저수진가?”
숲의 그늘이 녹아 호수로 번진 것 같다. 검은 물빛에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물고기들은 무서울 거예요. 저런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을 죽여서 숨길 때는 여기로 와야겠군.”
“오빠,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무서워요.”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아내의 하얀 손가락이 호숫가를 가리킨다.
“저 사람들, 뭐 하는 걸까요?”
선착장에 몇 명이 호수에 발을 담근 채 앉아 있다.
“마네킹인가?”
목발을 짚은 사람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다. 곧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든다.
“저 사람은 발이 없네요.”
나는 슬쩍 속도를 낸다.
“이 동네 사람들은 물놀이를 이상하게 하는군.”
“뭐하는 걸까요?”
“네가 모르면 나도 모르는 거지 뭐.”
사이드 미러로 그들을 본다. 모두가 일어서 우리를 바라본다. 나는 조금 더 속력을 내어 호수를 지나친다.
“뭐야 저 사람들은?”
아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추운 듯 하얀 허벅지를 문지른다. 아내의 손이 차갑다.
다시 동굴 같은 길을 지나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몰락한 탄광 마을인가? 시멘트로 발라 놓은 담벼락 위로 검은 고양이가 뛰어 오른다.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어린 아이의 얼굴을 본 듯하다.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하늘은 쏟아질 듯 검다. 관자놀이를 몰래 짓누른다. 식당 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다. 뒷목을 주물러도 뻐근함은 사라지질 않는다.
“울 자기 배고프겠네. 와, 여기 분위기 되게 이상해요. 만화 속에 있는 마을 같아.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아내가 에어컨 버튼을 만지작거린다.
“추워요.”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담벼락을 기어 올라온 이끼는 새까맣게 물들어 수백의 눈동자처럼 보인다. 식당이 있을 텐데.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려 골목을 더듬는다.
“오빠, 저기 식당 아니에요?”
이미 죽은 간판이 달린 곳이다. 닫았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 한 명이 이쑤시개 질을 하며 우리 쪽을 바라본다. 깊은 주름에 달린 눈동자가 마치, 고등어 눈깔 같다. 나는 시선을 피해 공터 쪽으로 차를 몬다. 승합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시동을 끈다. 곧바로 꼬르륵 소리가 올라온다.
“나보다 오빠가 더 배고팠구나?”
다시 반달눈이 된다.
약간 기울어진 간판은, 어쨌든 고치 식당이라고 쓰여 있다. 완전 망한 동네는 아니군. 아내는 우산을 접으며 내 손을 잡아끈다. 양념 냄새가 문 앞까지 흘러나와 있다.
문을 당기자 식당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본다. 못 올 곳에 왔나. 그릇 긁는 소리가 나더니 다들 고개를 파묻는다. 쩝쩝 소리가 가득하다. 히죽 거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외부에서 오셨수?”
눈이 매서운 아주머니다. 눈동자가 참으로 작다고 생각하는 사이, 아내는 등 뒤로 숨는다. 아주머니의 긴 생머리는 비에 젖은 듯 축 늘어져 있고 누런 앞치마에는 선혈 자국이 있다.
“여기 앉으셔.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내는 의자에 앉는 것조차 겁이 나는 모양이다. 엉성하게 매달린 백열등은 그들의 희미한 표정을 비춘다. 아내의 손을 잡아 시선을 끈다.
“오빠, 나가고 싶어요.”
나는 아내의 속삭임을 못들은 체 한다. 어차피 대안이 없다. 눈앞의 광경이 낯설긴 하지만 도망갈 만큼 무서운 건 아니니까. 그냥 굶주린 커다란 짐승들을 보는 것 같다. 쩝쩝, 꿀꺽. 그들 간의 대화는 없다. 머리에 수건을 묶은 청년은 얼굴의 땀을 고기 위에 떨어뜨린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맛있어서 먹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후루룩 소리가 더러운 작업복을 타고 흘러내린다. 등이 흠뻑 젖은 중년도, 머리카락이 국물에 빠졌는지도 모르고 연신 젓가락질을 해 대는 여자 아이도 있다.
“저 사람은 발이 없어요.”
아내가 내 어깨에 붙어 소곤거린다.
거죽 같은 점퍼를 걸친 두 남자는, 사이좋게 다리가 하나씩 없다. 두꺼운 뼈가 남자의 입에 물려 부서진다. 으드득, 으드득. 나는 시선을 옮긴다.
“주문은 안 받나?”
아내가 칭얼거린다.
장난질 같은 붓놀림으로 써놓은 글자는 커다란 얼룩 같다.
고치-이만 원
“여긴 메뉴가 하나밖에 없나 본데?”
“여보, 고치라고 들어 봤어요?”
아내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린다.
“아니, 고추는 들어봤어도 고치는 처음인데.”
조그만 웃음이 흘러나온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무리가 자리를 뜬다. 테이블 위에 깨끗하게 비워진 쟁반이 놓여 있다. 아마 혀로 설거지를 한 것일 테지. 그렇게 맛있나? 그들이 생선을 먹었다는 증거는 쟁반 옆에 떨어진 고기 국물뿐이다.
아쉬운 듯 수염을 혀끝으로 핥던 남자가 카운터 위에 돈을 놓고 나간다. 어쩐지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는 거리로 나가면서도 우산이 없다. 생선 같은 눈깔로 우리를 힐끔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 가지 메뉴라……. 인간은 그런 단순성에서 살아갈 수 없는데.”
식당 안의 퍼져 있는 생선 냄새를 들이 마시며 말한다.
“단순한 것은 어찌 보면 안정감을 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단순함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미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어떻게 단 하나의 메뉴로 장사를 하지? 주위에 식당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내는 대답이 없다. 여독 때문인지,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눌러 대고 있다. 나는 한 손으로 아내의 작은 어깨를 주무른다.
“장모님은 뭐라 셔? 병원 다녀온 것…….”
아내는 슬며시 눈을 뜬다.
“힘내래요. 울 엄마가 그렇지 뭐. 내가 말 안 했나요? 울 엄마도 늦둥이 외동딸이에요. 그래서 다 알아요. 뭐가 좋고 뭐가 힘들고……. 엄마는 아빠랑 결혼했을 때부터 계속 행복했대요. 그래서 내가 오빠랑 결혼한 것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뱃속에서 아기가 잘못된 건 좀 슬픈 일이지만 언젠간 집안이 시끌시끌할 거래요. 나도 그럴 것 같아요.”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미정이를 다산의 여왕으로 만들어야지.”
아내는 킥킥거리며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동시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친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나자 아내는 자세를 바로 잡는다. 갓 구워진 음식이 풍성한 냄새를 뿜어낸다. 아주머니는 익숙한 솜씨로 쟁반을 내려 놓는다.
“왜 고기 이름이 고치에요?”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들어올린다.
“그건 몰라요. 예전부터 고치라 불렀으니까 고치인 거지.”
뱉듯이 대답하고 이내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뭐야. 저 아줌마는?”
아내가 투덜대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찍는다. 고기 속살로 주위의 양념이 스며든다.
“꽤 큰데?”
그냥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속살도 두꺼웠다. 아내가 때어낸 조각을 내 입에 넣는다. 혀 위에서 녹아 버리는 느낌인데, 딱히 맛있다곤 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다.
“특이한데.”
그리고 기억이 희미하다. 미각이 다른 감각들을 지배해 버린 듯, 씹고 삼키는 일에만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젓가락이 고깃살을 잘라내었고 입으로, 혀로 옮겼다. 아내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스냅사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리고…….
“여보 뭐해요?”
이미 쟁반 위가 깨끗해져 있다. 마지막 혀가 만든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내가 그런 것일까, 아니면 미정이가? 복부를 감싸 돌던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아내는 상기된 얼굴로 아기처럼 웃고 있다.
“오빠, 좀 바보 같아요. 얼빠진 사람 같아.”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감각을 확인한다. 입 안에 모인 침을 모아 꿀꺽 삼킨다. 양념 맛이 후각으로 번진다. 몸이 나른하다. 맑은 술을 마신 듯 초점을 맞추기도 힘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내가 가는 뼈를 씹어 먹는 장면이 순간 떠오른다. 눈동자가 마치……. 그래, 생선 같았다. 그들처럼. 아내의 눈에 내가 그리 보였을 지도 모른다.
티슈로 입 주위를 훔친 뒤 아내가 입을 연다.
“내일 또 먹어요.”
그리고 방긋 웃는다. 어쨌든 아내의 맘에 든 것이 있어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숙박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지 뭐.”
카운터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전에 나간 남자처럼 2만 원을 그 위에 놓는다. 아내는 밖에서 우선을 들고 손바닥으로 빗방울을 느끼고 있다.
“벌써 어두워졌네. 여관부터 찾아야지. 음……. 이런 곳에 모텔 같은 게 있을 리는 없고. 민박집도 괜찮지?”
아내는 내 왼팔에 매달려 볼을 어깨에 비벼 댄다.
“어맛!”
나는 돌아 아내의 시선 쪽을 바라본다. 어둠과 비에 젖은 아이들이 한 쪽에 서 있다. 눈이 마주친 그들은 수줍은 듯 뒤돌아 뛰어간다.
“뭐야 저 녀석들은……. 난민촌도 아니고.”
“오빠, 빨리 가자.”
공터 반대편에, 역시 불 꺼진 여관 간판이 보인다. 대문은 열려 있다. 그 사이를 지나는데 뭔가 꺼림칙하다.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쭈글쭈글한 노인이 방문을 연다.
“거기 3만원 놓고, 저 끝 방 쓰세요. 젊은 양반.”
곧바로 문이 닫힌다. 아직 열려 있는 대문을 보면서 아내가 식당에서 처음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나가고 싶어요. 아내는 이미 신발을 벗고 마루를 밟고 있다. 아내의 눈빛이 피곤을 호소한다. 나는 대문을 닫고 아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오빠, 나 드라마 봐야 하는데.”
아내가 이불을 펴는 동안, 나는 구식 텔레비전과 씨름을 한다. 화면은 어지럽게 흔들리며 잡음만을 뱉어내고 있다. 무거운 눈두덩을 비비다 코드를 뽑아 버린다. 아내는 피식 웃고는 입을 쫑긋거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우리는 나란히 자리에 눕는다. 어둠 사이로 아내의 살내음이 흐른다. 강아지처럼 파고드는 그녀를 나는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아내는 품속에서 킥킥 웃는다.
“엄마가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말이에요. 여행가서 아기 만들어 오래요.”
허리를 당겨 몸을 밀착시키자 숨을 훅 하고 뱉어낸다.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 나른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숨소리가 낮게 깔린다. 나는 아내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두 번이나 힘든 일을 겪고도 참으로 밝은 여자다. 부드럽게 아내의 배를 어루만진다. 내 주제에……. 욕심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 날은 꿈도 꾸지 않았다.
눈을 뜨자, 아내는 이미 옆에 없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이 눈부시다.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살핀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미정아.”
대답이 없다.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자 텔레비전 위쪽에서 멜로디가 울린다.
화장실 갔나?
마당으로 나와 신발을 신는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눈곱을 뗀다. 물에 비친 구름을 바라보다 손을 담근다. 곧 다리가 저려온다. 쪼그려 세수하는 건 익숙하지가 않다.
“일어났나?”
노인의 목소리다.
“네, 잘 잤습니다. 혹시 제 아내는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노인은 어젯밤의 모습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왜, 부근에 없던가?”
“아직 찾아보진 않았습니다.”
마당에 그늘이 진다. 노인은 몰려든 구름에 시선을 멈춘다.
“오늘은 고기가 좀 올라 올 것 같군. 좋은 날이야. 간만에 좋은 날이야.”
노인이 뒷짐을 지고 돌아선다. 고무신이 바닥 긁는 소리를 낸다.
“젊은 처자는…… 호숫가에 갔을지도 모르지. 산책하기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