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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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 아래에 도착해선 광치기 해변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쉬었다. 해안절벽 위 가게에서 감귤과 보리빵 따위를 팔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리 한잔을 시켰다. 등 굽은 할멈이 느릿한 몸짓으로 냉장고에서 쉰다리를 꺼내 따라 주었다. 4년 전 왔을 때도 여기서 쉰다리를 마셨는데 할멈이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주 전통발효음료인 쉰다리의 새콤함을 음미하며 일출봉을 감상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일출봉에 감탄하는데, 올레꾼임을 알아본 할멈이 어느 코스로 가느냐고 물었다. 곶자왈로 간다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혼자 웃었다.

“내년부턴 문이 닫힌다던데, 가 봐야지.”

할멈은 올레꾼들 때문에 곶자왈이 많이 상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길을 벗어나고 돌들을 캐가면서 숲이 엉망이 됐고 더는 독초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단다.

호기심으로 듣는 척을 해주자 할멈은 손님에게 올레꾼 험담을 했다 생각했는지, 이내 곶자왈 자랑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제주도민들도 올레길을 자주 걷는데 그중 곶자왈을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완산 곶자왈(바로 내가 들어가려는 구간이다) 안에 있다는 늪지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굽이굽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중심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면, 바닥을 덮은 덩굴 사이로 늪이 물웅덩이 마냥 숨어있어. 그치만 얕보다간 큰일이 나지.” 할멈은 당신 아들이 노루가 빠져 죽는 걸 목격했다고 했다. “조심성 없게 덩굴 돌무더기 속에 숨은 늪을 모르고 빠진 놈이었어. 팔다리 등까지 잠긴 놈이 목만 주욱 빼고선 허우적대고 있더라고. 커다란 눈알만 끔벅거리며 바동바동 빠져들어 갔지. 어찌 도와줄 수도 없더라고. 늪이 어른 덩치만 한 녀석을 천천히, 끈질기게 잡아당기더라니깐? 반 시간 동안이나 말이야.”

할멈은 아들의 경험을 당신이 직접 본 것마냥 늘어놓았다. 곶자왈 지면이 화산암괴로 이루어진 걸 아는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 안의 원시성을 알기에 노루가 눈만 끔벅이며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은 상상할 수 있었다. 녀석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온몸으로 숲의 공포를 맛보아야 했으리라.

할멈은 또 곶자왈 문을 닫는 건 나라가 하는 일 중 그나마 잘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왕 문을 닫는 거 15년은 족히 닫아야 한단다. 그렇게 오랫동안 폐쇄되는 숲을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노인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두 사람을 다시 본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