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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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이지도 못 했고 물거품이 되지도 않았다. 모두가 잠든 밤, 초야의 침실에서 본 얼굴은 왕자가 아니었다. 단검을 쥔 인어공주를 또렷한 눈으로 응시하던 왕자의 근위대장은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 나와 당황한 인어공주의 손에서 단검을 받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근위대장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어공주를 잡았다.

“내 마음도 너와 같아. 죽지 마. 제발.”

단검을 삼킨 바다는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네 자리로 돌아가. 침실 앞 벨벳 방석 위로.”

너울이 크게 일렁였다. 배가 좌우로 기울었다.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현실 속에 있는 사람은 벨벳 방석 위에 웅크린 인어공주와 닫힌 침실 문 앞에 선 근위대장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 온 왕자와 지금 막 남편 없는 침대에서 깨어난 새 왕자비 뿐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심호흡을 하세요. 아무 일 없었던 겁니다. 자리로 돌아가세요.”

근위대장이 침착하게 달래도 왕자는 진정되지 않았다.

“바, 바다가 빨갛게 변했어. 내, 내 손을 봐. 내 손도 붉잖아…”

“손은 괜찮으십니다. 잘못 보신 겁니다.”

왕자는 여전히 불안한 낯으로 눈을 희번득 거리더니 인어공주를 일으켜 세워 난폭하게 잡고 흔들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어쩔 수 없었어.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너도 그렇게 믿지? 그렇다고 해! 넌 날 사랑하잖아!”

인어공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왕자는 인어공주를 놓아줬다. 인어공주는 벨벳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실 문이 열렸다.

“첫날밤에 신부를 혼자 두고 이 아이와 뭘 하신 건가요, 나의 왕자님?”

아름답고 차가운 이웃나라의 공주가 턱으로 인어공주를 가리켰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지금 막 밖에 나오셨습니다. 침대에 온기가 남아있을 텐데요.”

근위대장의 단호한 말투에도 왕자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방금 한 말은 뭔가요? 넌 날 사랑하니까 믿으라고,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 한 그 말은? 대답하시죠, 왕자님.”

“그런 뜻 아니었어요.”

왕자는 바다를 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새벽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붉게 빛났다.

“저 애를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저 애가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계속 저 애만 보고, 우리 침실 앞에서 재우고, 첫날 밤에 자다 깨서 뛰쳐나가는 걸로 날 질투하게 하려는 건가요? 정략결혼에 사랑이 없는 건 흔한 일이지만 첫날밤부터 이러는 건 모욕이군요. 부모님께 말씀드리겠어요.”

“저 애는 왕자님께서 강아지처럼 귀여워하시는 아이고 말 못하는 불쌍한 바보입니다.”

“근위대장은 끼어들지 말아요. 주제 넘게.”

근위대장은 입을 다물었고 왕자가 나섰다.

“오해가 있군요.”

“난 오해한 거 없어요. 내가 상속받을 영지를 일부 포기해서라도 저 마녀를 죽여버릴 거예요. 당신이 귀여워하는 저 백치 아이.”

“나의 신부여, 그 전에 거짓 하나 폭로할까요? 바다에 빠진 날 구해준 건 수도원에서 신부수업 받던 이웃나라의 공주가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동화 같은 얘기였어요.”

“내 거짓말은 아니죠. 생일날 사치스럽게 뱃놀이하다가 바다가 심상치 않으니 돌아가자는 말을 무시해서 배를 침몰시킨 걸 은폐하려고 지어낸 얘기에 내가 아무 말 안 하면 누가 더 유리한데요. 그 때 누가 왕자님을 구해줬건 난 상관 없어요.”

“저 벙어리가 날 구했어요. 근위대장이 목격자고. 내가 생명의 은인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난 저런 애와 남편을 공유할 순 없어요. 나와 결혼했으면 저 앨 내보내야 해요.”

“고아를 어디로 보내요?”

“여기 오기 전에 살던 데가 있겠죠.”

“그걸 물어봐도 대답을 못 하니까 궁에 데리고 있었죠.”

근위대장이 ‘주제넘게’ 불쑥 끼어들었다.

“저와 함께 내보내주십시오. 어차피 즉위하시기 전에 물러나려 했습니다.”

고민거리가 해결된 왕자는 즉시 근위대장의 해임을 명했다.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근위대장의 귀에 왕자가 속삭였다.

“약속은 지켜라. 우린 친구였잖아.”

근위대장도 속삭였다.

“친구하고는 그런 약속 하시는 거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