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장르: 판타지, SF | 태그: #안드로이드 #여행 #미래도시
  • 평점×33 | 분량: 99매
  • 소개: 길고도 긴 삶의 끝에 선 인간과 짧고도 짧은 삶의 끝에 놓인 안드로이드의 여행기. 죽음을 말하는 칼리다와 삶을 말하는 오델은 여행의 끝에서 무엇을 찾게 될까. “결국 너의 시간도 ... 더보기

흔적

미리보기

<1>

투명한 거대 돔으로 감싸여 있는 고대 도시, 피오레. 칼리다는 자신의 발 아래 펼쳐진 그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이를 머금고 빛나는 피오레의 모습은 오래 전 그녀가 보았던 이전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경이 칼리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중세의 멋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과 토양의 기운을 담은 적갈색의 지붕이 도시 전체에 온기를 채우고 도시의 중앙에 자리 잡은 대성당은 압도적인 웅장함으로 시대를 아우르는 품위를 도시에 더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강과 그 위로 도시를 이어주는 고풍스러운 다리들 역시 이곳에 우아한 생기를 불어 넣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면면을 한눈에 담고 여행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칼리다가 더 빠르고 편하게 이곳에 도달할 수 있는 지하 튜브열차 대신 돔의 높은 곳에 플랫폼을 두고 있는 지상고속기차를 타고 온 이유였다.

지구는 백여년 전 극심한 기후 재해를 맞으며 대부분이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인류는 역사를 품은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을 잃었지만, 절망만이 가득했던 디스토피아에 인공도시를 건설하며 새로운 문명을 다시 일궈 나갔다. 어느 정도 생계가 가능한 인프라가 구축되자 사람들은 과거의 향기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고대도시 복원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옛 유적지 터에 외부의 오염된 공기를 차단할 투명 돔을 씌우고 내부에는 인공의 하늘과 태양빛을 설치했다. 그리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옛 유적들을 완벽에 가깝게 복원해냈다.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도시가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마저 철저하게 구현했다. 그렇게 전세계 다섯 개의 고대 도시를 되살렸다. 이 도시들은 지구 환경이 파괴되기 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도시들로 선조들의 빛나는 유산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현대라 부르던 그 시대의 멋이 잘 어우러지던 곳들이었다. 그야 말로 인류의 모든 시대를 품어온 타임캡슐이나 다름 없었다. 도시 복원이 완료되자 데이터로만 봐오던 곳을 직접 느껴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열망이 쏟아졌지만 아무나 고대도시로 향할 수는 없었다. 고대도시는 보존을 위해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고 여행자들의 짧은 방문만 가능했는데 비싼 여행 비용 탓에 전세계 상위 1%의 부자들 조차 쉽게 여행할 수 없는 꿈의 도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칼리다가 거금을 들여 방문한 피오레는 다섯개의 도시 중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 칼리다의 마음 속 그리움으로 남았던 도시이기도 했다.

피오레의 아름다운 전경에 취해 발을 떼지 못하고 있던 칼리다의 어깨를 누군가 조심스레 두드렸다. 시선을 돌려 쳐다 본 곳에는 20대 초반 남자의 외형을 한 안드로이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칼리다 양. 저는 당신의 여행을 도울 가이드 오델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오델이 자신을 ‘가이드’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안드로이드라고 알아채기 힘들었을 정도로 그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신 모델이라 인간과의 유사성이 뛰어나기도 했고 오델이 풍기는 특유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그를 특별하게 만들기도 했다. 칼리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오델의 모습에 가슴 속 깊은 곳에 오랜시간 숨어있던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감정에 무딜대로 무뎌져버린지 오래였던 그녀는 이 낯선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물끄러미 오델을 바라만 보았다.

“아, 혼자 여행하길 희망해 가이드 취소 요청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고대 도시 여행 시 가이드 동행은 정부 강제사항이예요. 불편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리다가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을 오델은 가이드에 대한 거부 의사 표시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해명을 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표정이나 제스처 마저 몹시도 인간스러웠다.

“알고 있어요. 괜찮으니까 그만 숙소로 가죠.”

그에 비해 칼리다의 대답은 세상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돔의 내부로 내려가는 투명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칼리다와 오델의 모습이 유리에 반사되어 비쳤다. 칼리다는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 위로 겹쳐진 자신의 모습이 따스한 빛깔로 반짝이는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30대 초반의 외모를 갖고 있었음에도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사체처럼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에 비해 오델은 특유의 싱그러움으로 반짝이며 도시와 잘 어우러졌다. 그 대비되는 모습에 어쩌면 생명은 칼리다가 아닌 오델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칼리다는 생각했다.

<2>

밤하늘 아래에서 아름다운 고대 건축물들이 저마다 우아한 조명을 입고 깜깜해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곡선의 미가 돋보이는 웅장한 대성당의 돔지붕과 투박하지만 장엄함이 깃든 궁전의 시계탑은 이 도시의 밤을 밝혀주는 가장 큰 두 개의 별과 같았다. 이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칼리다의 숙소였다. 이전 여행 때 작은 테라스에서 보았던 그 야경을 잊을 수 없어 어렵사리 똑같은 위치의 숙소를 찾아내어 예약한 보람이 있었다. 내부 구조나 인테리어는 많이 바뀌었지만 테라스에서 바라보던 경치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내일 죽는다해도 여한이 없어지게 만드는 마법같은 경치. 칼리다는 이걸 온전히 즐기고 싶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오델을 돌려 보내고 테라스로 나와 와인 한 병을 땄다. 어딘가에서 피아노와 현악기들로 연주되고 있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밤거리를 타고 들려왔다. 칼리다가 이전 여행과 똑같은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 도시관리청에 미리 요청해두었던 사항이었다. 와인의 맛도, 연주의 스타일도, 그리고 밤공기 향기도 모두 예전의 것들과 조금은 달랐지만, 그래도 환상적이었던 그 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칼리다는 피오레로 오기 직전 타나토스라는 시술을 받았다. 타나토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이기도 했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자연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뜻하기도 했다. 그 뜻을 반영한 타나토스 시술은 30년 전에 독일에서 발명된 시술로 간단하게는 예약형 안락사 시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시술은 짧게는 하루부터 길게는 한달까지 시술 후 자신이 추가로 더 살아갈 기간을 미리 정하고 해당 기일이 오면 고통이 없는 자연사를 맞이하게 해주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한부의 삶을 체험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누구도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영생의 시대를 살아가며 인생의 지루함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단비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락사율이 폭등하고 집단 자살 등의 엽기적인 사건까지 발생해 사용이 중단됐던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몇 단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죽음을 꼭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만 안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칼리다도 이 심사를 통과해 타나토스 시술을 받았다. 칼리다에겐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었지만 그녀의 나이만으로도 통과할 명분은 충분했다. 339세. 이것이 그녀의 나이였다.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칼리다처럼 인류가 아름다운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던 시기에 태어나 지구의 사막화와 새로운 문명의 탄생까지 모두 경험한 인간은 이제 지구에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 고되고 무료한 삶에 지쳐 생명 연장 시술을 멈추고 자연사의 길을 택했다. 그렇기에 타나토스 시술 심사관들은 모두 칼리다의 나이에 놀라며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아니 왜 연장 시술을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칼리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 연장 시술을 멈춘지 오래 되었습니다. 기록에 나와 있듯이요.”

칼리다의 말에 따라 기록을 살펴 본 심사관들은 하나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건 학계에 보고 되어야 하는 케이스라고.

칼리다가 시술을 멈춘 것은 이미 백년도 훨씬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새롭게 얻은 젊음으로 다시 한번 인생의 주기를 거치고 났을 무렵 자신과 함께한 이들이 하나 둘 씩 시술을 멈추고 삶의 작별을 고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때가 왔음을 느꼈다. 자연을 거스른 길고 길었던 생명의 시간을 제 위치로 돌려 놓아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칼리다는 일 년에 한 번씩 받던 시술을 그만 두었다. 시술을 멈춘 지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세번 째 해가 지났다. 그리고 또 여러 해가 지났다. 보통의 경우 한 해만 시술을 받지 않아도 의학의 힘으로 지탱해오던 젊은 육신은 급속도로 노화되기 마련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칼리다의 몸은 방부처리라도 된 듯 아무런 변화없이 젊음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시술로 늙지 않는 삶을 겪기 전의 칼리다 였다면 아마 이런 특별한 증상을 축복으로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변하지 않는 젊음을 누릴만큼 누렸고 그런 여정을 함께 해온 이들이 하나 둘 씩 자신의 품을 떠나가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이 기현상은 저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곁을 떠난 뒤 칼리다는 열망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영원한 삶 속에 갇혀 버렸다.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해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녀는 무료의 지옥에 갇혀 한 세기가 넘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왔다. 그런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칼리다가 쉽사리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의 마지막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 짧은 인생에서 너를 만난 건 기적이었어. 삶이 너를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네 삶을 즐기고 너만의 기적을 세상에 남기고 갔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남기고 가는 것처럼.”

하지만 칼리다는 그녀만의 기적을 만나지 못했고 지칠대로 지친 그녀에게 타나토스가 남긴 시간은 고작 일주일 뿐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