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길

  • 장르: SF | 태그: #SF #웬델른
  • 평점×35 | 분량: 132매
  • 소개: 이주 행성으로 떠나는 마지막 우주선에 본의 아니게 막차 타게 된 수의사. 궤도 진입 후 착륙만을 앞두고 있는 우주선이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수의사는 예정보다 일찍 냉동 수면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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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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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전체 시스템은 정상이었고, 탑승 직후 초저온 수면에 들어간 승무원들은 8개월에 걸친 항해 내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주 행성으로 향한 12번째이자 마지막 이주선인 ‘매듭’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사고도 겪지 않은 행운의 배 2척 가운데 하나였다. 승무원 한 명을 급히 더 태우느라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그런 건 절차상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매듭의 중앙 관리 시스템은 이주 행성 ‘모운(暮雲)’에 착륙하기 1주일 전, 선장과 항해사를 초저온 수면에서 깨웠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그들은 매듭을 모운의 궤도에 막 안착시키려던 참이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항해사가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2

“커피 좀 줄래? 블랙으로.”

“속에서 안 받을 텐데.”

“그냥 좀 줘…”

항해사 최인식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조종실 입구에 면한 탕비실로 향했다. 조종실에는 선장 임라정과 방금 커피를 청한 소지영만 남았다. 작업복을 갖춰 입은 라정, 인식과 달리 지영은 잠옷 차림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잠옷 위에 두툼한 모포를 둘둘 말았지만 오한을 막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미안해. 힘들지?” 라정이 말했다.

지영은 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지끈지끈 누르면서 물었다.

“뭣 때문에 이렇게 일찍 깨웠어요?”

“이거 한번만 봐 줘.”

라정은 모운이 내려다 보이는 메인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 속 영상은 5배로 확대되어 있었다. 지영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면서 영상을 노려보았다. 확대된 부분은 궤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주공간이었는데, 스크린 왼편에 작고 좌우로 갸름한 물체가 떠 있었다.

“저게 뭐예요?”

“잠깐만.”

라정이 영상을 30배로 확대하자 피사체의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났다. 생명체임을 표시하는 보라색 사각형이 피사체를 둘러싼 채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 지영이 눈꺼풀에서 무게가 사라진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게 왜 이런 데 있어…?”

“깨울 만 했지?”

지영이 벌떡 일어나서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갖다 댔다. 그 바람에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스크린에 나타난 물체, 아니, 생명체를 열띠게 바라보았다.

라정이 말했다.

“실은 그냥 무시하고 착륙할까 했는데, 그래도 수의사의 의견을 듣는 게 맞다 싶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영이 스크린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게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거라면 선내에 들여놓는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왜 여기 있는 거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100퍼센트 괜찮다는 보장은 없어?”

“이럴 땐 규정에서 뭐라고 해요?”

라정은 메인 스크린 오른편 구석에 규정 일부분을 띄웠다. 질릴 정도로 빽빽하게 채워진 문서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생명체를 조사하는 게 우리 임무에 포함되진 않아. 그렇지만 보고되지 않은 종의 개체 또는 무리와 조우할 경우, 선장의 재량에 따라 대처할 수 있어. 우주공간이든 아니든. 이렇게 장황한 글 속에 어째선지 새로운 종을 ‘어디’에서 조우하는가에 대한 내용은 없네.”

“새로운 종… 근데 이건…”

중얼거리던 지영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왼쪽 눈썹을 살살 긁었다. 라정이 지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중력에 이끌리고 있는데 앞으로 45분이면 대기권에 닿을 거야. 그렇지만 예정 대로라면 우리는 그때쯤 모운으로 내려가야 해. 널 탓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정이 밀렸으니까.”

지영이 라정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알아요. 하지만 대기권을 통과해도 괜찮은 건 우리 뿐이잖아요.”

인식이 뜨거운 커피를 담은 튜브를 들고 조종실로 돌아왔다. 라정이 인식에게 물었다.

“항해사 의견은 어때?”

인식은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스피커로 조종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야 선장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죠. 기왕 늦어 버린 거, 몇십 분 더 늦는다고 어떻게 되겠어요? 게다가 수의학이 제 분야도 아니고.”

라정이 미소지었다.

“그럼 이야기는 됐네. 무슨 일이 생기면 사전에 수의사한테 자문 받았다고 잡아떼면 되잖아?”

“정말!”

지영은 인식이 건네준 커피 튜브를 받아들면서 어이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라정은 뻔뻔스럽게 미소 지으며 지영에게 물었다.

“필요한 게 뭐야?”

지영이 스크린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길이 약 1.2m에 너비 약 25cm… 8호 채집용 캡슐이면 얼추 맞겠어요. 나머지는… 알 수 없지만요.”

라정이 인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거기서부터는 다들 알아서 할 수 있잖아? 접촉 경로 세트해.”

라정의 명령에 인식이 왼쪽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들어올려 보였다.

“고마워요.”

지영은 감사를 표한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봐. 착륙하기도 전에 보람 있게 생겼잖아?”

라정이 웃으면서 조종 패널 쪽으로 좌석을 돌렸다.

3

원래 지영은 매듭의 승무원이 아니었다. 정식 승무원은 라정과 인식 두 사람이었고, 선내의 나머지 공간은 장비와 보급품으로만 가득 채울 예정이었다. 두 승무원은 모운에 도착하여 선내에 기본 탑재된 작업용 로봇들이 짐을 부려 놓으면 곧바로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앞서 이주민들이 모운에 데리고 간 몇 마리의 동물들이 번식하여 수가 불어나면서, 이주민들 사이에 수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요망이 강해졌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