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바람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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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은 호랭이를 쫓아 빠르게 호수 중앙으로 헤엄쳤다. 젖은 정장 상하의가 몸에 감겨 다소 불편했지만, 시선을 앞쪽의 형광 오렌지색 점프수트를 입은 호랭이에 고정한 채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앞쪽으로 보이는 까만 점이 가인이겠지.

 

거리가 점차 좁혀지던 순간 가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호랭이가 뒤를 돌아 기린을 보더니 그 역시 검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기린도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암영전선에서 백록담에 들이부은 혼타르의 정수는 모두 지룡에게 흡수되었지만, 물은 여전히 먹물처럼 검었다. 기린의 시야에 호랭이는커녕 헤엄을 치는 자기 손조차 보일락말락 했다. 그저 방향을 짐작해서 더 깊이 호수 중앙의 바닥을 향해 열심히 팔다리를 놀렸다.

 

내려갈수록 시야는 어두워졌다. 기린은 암합성 방에 들어갔을 때처럼 덜컥 겁이 났다. 푸륵, 하며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수면을 향해 달아났다.

 

숨이 차올랐다. 아, 이런 바보! 호흡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세인 주제에 사자들을 쫓아 이렇게 깊이까지 내려 오다니. 이러다 죽겠다. 다시 올라가자. 수면이 어느 방향이지? 기린은 가슴을 쥐어 짜 남은 공기를 내뱉었다. 공기 방울이 올라간 방향으로 가면 될 터였다. 하지만 손끝이 저릿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이미 늦었나.

 

누군가 기린의 손을 잡았다. 물귀신이신가요? 고통스럽지 않게 부탁해요. 그는 기린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앞에 교차하고는 기린을 업은 자세로 헤엄을 쳤다. 빛이 한 톨도 없는 암흑 속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온 몸의 감촉을 통해 그가 호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완전한 어둠 속에 진입했다.

 

방향과 거리마저 사라졌다.

 

기린은 호랭이의 목을 꼭 껴안았다.

 

호랭이는 부지런히 물살을 갈랐다.

 

어느 순간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검었던 물도 점점 맑아졌다. 호랭이의 은회색 머리가 보였다. 어쩐지 조금 더 밝아져서 흰색이 된 것 같았다. 마침내 둘은 수면 위로 솟구쳤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기린은 내리쬐는 태양에 눈쌀을 찌푸리며 물을 뱉어내고 숨을 몰아 쉬었다.

 

어…?

 

태양…?

 

기린은 깜짝 놀라 하늘을 보았다. 해가 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위층이다! 지구다! 이승이다! 이런 식으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호랭아, 여기 지구야! 탐라가 아니라, 제주도야!”

 

기린은 주변을 둘러 보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런데 호랭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기린아, 나… 좀… 이상해.”

 

“어디… 으악? 왜 이래?”

 

호랭이는 온몸에 하얀 털이 돋아나고 검은 줄무늬가 생겼다. 머리 위에는 동그란 귀가 두 개 솟아났다. 손가락이 뭉툭해지더니 두툼한 털뭉치가 되었다. 무언가 기린의 등을 두드려 돌아보니 북슬북슬한 꼬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기린을 업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신수 백호였다.

 

“호랭아, 너 백호로 변했어!”

 

“어흥, 뭐가 뭔지 모르겠네.”

 

호랭이는 자신의 몸이 낯선 듯 고개를 갸웃하며 앞발을 살폈다.

 

“우왕! 짱 귀엽잖아!”

 

기린은 호랭이의 둥근 귀를 만지작거리고 납작 엎드려서 목 아래쪽을 긁었다가 어깨에서 앞다리로 털을 쓰다듬었다. 꼬리를 잡아당겨서 목에 감았다가 코 밑에 대고 수염 흉내를 냈다가 아주 난리가 났다.

 

“엔간히 하고 잘 잡아라. 떨어질라.”

 

“아유, 너나 가만히 좀 있어 봐. 날으는 호랑이를 탔는데 어떻게 엔간히 하니?”

 

“에헤이, 정말… 내려간다.”

 

“자, 잠깐만! 시내쪽으로 가면 어떡해! 인적이 없는 곳으로 내려 가야지.”

 

땅으로 향하던 호랭이가 두둥실 멈추었다.

 

“왜? 너 세인들한테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큰일 날 소리! 너 백호 모습으로 시내 갔다가 당장 사냥 당할걸.”

 

“예뻐서 헌팅 당한다는 뜻인가?”

 

호랭이는 미소 지으며 앞발에 침을 발라 수염을 가다듬었다.

 

“아니, 문자 그대로 총 맞는다고!”

 

“왜? 난 아무런 잘못한 게 없는데?”

 

기린은 말문이 막혔다.

 

“음… 그게… 사람들은 낯선 걸 무서워 해.”

 

“그렇다고 다짜고짜 공격해? 나 어쩐지 네가 살던 세상이 별로 맘에 안 들기 시작한다.”

 

“이런 곳이라 미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둘은 올레길이 내려다 보이는 오름에 내려 섰다. 호랭이는 인간형으로 돌아가려 변신을 시도했는데, 그냥 고양이 크기로 몸집만 줄어들었다. 기린은 귀엽다며 폴짝폴짝 뛰었지만, 말 하는 고양이도 사람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끌 것이어서 그대로 함께 다닐 순 없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비원에서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호랭이가 빛이 밝은 이승에 진입하자 사자의 몸으로는 위험할 것을 느끼고 일종의 면역체계처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 중에 백호로 변신한 것이었다. 이제는 사자의 영력에 신수로서의 신력이 더해져 밝은 빛에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백호일 때는 옷을 안 입고 있었는데, 인간형 되니까 점프수트를 입었네?”

 

“얘 좀 봐라. 너 너무 밝히는 거 아니니 증말? 그렇게 내 벗은 몸이 보고 싶어? 날으는 호랑이, 말하는 고양이는 안 돼도 벌거벗은 여자는 함께 다닐 수 있나 보지?”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내 말은 헐크 바지처럼 억지스런 설정이다 이거지.”

 

“헐크가 뭔데?”

 

“헐크 몰라? 두 얼굴의 사나이로 알고 있나?”

 

“아하, 슈렉?”

 

“아냐… 이름이 와전됐어….”

 

“맨날 화만 내는 남자 이름 따위, 그냥 넘어가. 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