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Ep. 1 고속버스

  • 장르: 호러
  • 분량: 85매
  • 소개: <옴니버스 장편, 고속도로 순서> 1. 고속버스 2. 투명한 고름병 3. 구멍 4. 아파트 5. 불행을 부르는 광대 6. 죽음에 대하여 7. 인체의 신비 더보기

고속도로 Ep. 1 고속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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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멍하니 소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과 운전사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았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언니 듣고 있어? 고개를 소라에게 돌렸다. 소라는 쉴 땐 쉬어야 한다는 소리를 삼십분 째 하고 있었다. 거창하게 저번 학기 내분비 수업 때 나온 호르몬 얘기까지 곁들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쉰다는 게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냥 기숙사에 앉아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창문을 열고 숨을 천천히 쉬고, 조급함을 지우고, 좋아하는 영화 하나 틀어놓고, 이어폰으로 세상의 소리를 막고, 그 날이 떠오르지 못하게 볼륨을 높이고. 그래도 몸이 풀리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뒷목은 언제나 마른 목재 같았다. 이마는 자꾸 꺼져갔고, 눈꺼풀은 떨어졌고, 가슴 한 쪽이 조여져 새벽에 깨나기 일쑤였다. 룸메이트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 이불 속에서 뜬 눈으로 새벽을 보냈다. 전날 암기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으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만 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스물다섯. 연애도 관심 없었다. 해초가 온 몸을 감고 있는 듯 찌뿌둥한 느낌만 사라졌으면 했다. 한번은 그 느낌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곤욕을 치렀다. 병원 회의실에서 조별 케이스 발표시간이었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고 암기해서 실수할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둠 덩이를 뚫고 프로젝터 불빛이 찌르듯 날아왔다. 귀도 먹었으면 좋았으련만, 호통 치는 교수님의 목소리는 정확히 고막에 꽂혔다. 동기들의 냉소에 피부가 따끔했다. 억울함에 눈물이 나왔다. 준비 안 해온 게 아니고 목이 막혀서 그런 거라고 전할 수가 없었다. 대답도 안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학생의 모습, 교수에겐 반항의 표현으로 보였을 것이다. 반세기 이상을 시골 의대에 갇혀 지내다 보면 열 명 중에 한 명 꼴로 정신 장애를 경험한다. 유진도 그 중의 일부일 것이라 교수는 폭언을 했다. 그 정신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냐고. 다른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을 작은 체구의 학생에게 쏟아 부았다. 유진은 날계란을 수십 대 맞은 듯 비참했다. 회의실에 불이 켜지고 하얀 가운들, 교수의 성난 얼굴, 눈빛이 선명해졌다. 낙제를 시킬 거라는 말을 던지고 교수는 나가버렸다. 동기들은 위로하지 않았다. 유진의 문제로 자신들도 성적에 불이익이 있을 거란 생각에 원망 가득한 눈동자만 남았다. 다시 아래 학년으로 내려갈 순 없어. 유진은 정장바지에 숨은 얇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다가 교수가 나갔던 문을 지났다. 등록금은 부담이었고 빚이었다. 일 년 더 의대를 다닌다는 것은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교수실 문 앞에서 안절부절 하는 사이, 소라가 다가왔다. 대신 노크를 했고 유진의 목소리가 되어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유진은 다행히 낙제를 면할 수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소라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언니, 나한테 반했어? 키가 적당히 크고 날씬하고 피부는 하얗고 말랑말랑했다. 광대가 약해 밋밋한 인상이라는 것 빼고는 약점이 없는 후배였다. 선이 명확한 목소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가방은 또 왜 이렇게 뚱뚱해? 언니, 또 집에 가서 공부하려고? 놓고 가. 내가 기숙사에 갖다 놓을게. 유진은 괜찮다고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공부를 하려고 가방에 책을 채워 넣은 건 아니었다. 그냥 습관이었다. 등에 무거운 것을 들고 있지 않으면 뭔가 허전했다. 자꾸 무거운 원서를 넣고 다니자 소라가 핀잔을 줬다.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자, 죄책감 때문이겠지, 소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죄책감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한거지? 유진은 또다시 밤을 지새워 이 문제를 고민했다. 편하게 지내면 안 된다는 무의식의 외침이 들렸다. 생각해보면 그 날, 그 사건 이후였다. 뒷목을 휘어감을 찌뿌둥한 느낌. 스스로 벌을 내리고 있는 건가. 하지만 유진은 소라는 물론 누구와도 그날의 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동기들의 냉소어린 눈빛이나 강의실의 해묵은 먼지 정도에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을 뿐, 사람들은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 같았다. 뇌파를 조종하는 외계인이 나타나 기억을 삭제한 것일까. 뉴스에서 한 줄 정도로 보도가 되었을 뿐, 그게 전부였다. 세상으로 향해야 할 쓰나미가 유진에게로 모여든 모양이었다. 꿈을 꿀 때가 아니더라도 백일몽과 함께 의식의 표면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유진은 강의실 입구를 바라보며 복도에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철문 안에서 스피커를 지난 교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문을 지나며 뭉거지고 복도를 지나며 울림이 되어버린 소리는 기괴하게 변조되었다. 양쪽으로 늘어선 캐비닛들이 미세하게 떨리다 멈추고, 강의실 철문은 철컥하며 소리를 냈다. 유진의 동공이 철문을 가득 담았다. 철컥. 철컥.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진은 책을 방패처럼 껴안고 천천히 다가갔다. 교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소리도 없었으므로 유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한차례 이명이 일었고 떠오른 불쾌감에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철문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사람 얼굴 같았다. 강의실 전체가 토악질을 하기 직전이었다. 유진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책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언니. 유진은 소라를 보았다. 또, 무슨 생각하고 있어? 터미널 다 왔어. 내려.

 

 

 

물 먹은 구름이 터미널의 옥상에 달라붙는 중이었다. 야채를 늘어놓은 할머니들은 곰팡이마냥 벽에 붙어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비가 쏟아지면 건물의 처마 밑, 더 어두운 구석으로 물러날 터였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옆에 붙은 오락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런 날엔 시원하게 떠나는 게 맞아. 언닌 좋겠다. 소라는 옳은 말만 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이런 날까지 시골 캠퍼스에 처박히는 건 너무 우울하니까. 산으로 가로 막힌 도시에 여름의 텁텁한 공기까지 더해지면 습식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엄마랑 라면 끓여 먹고 드라마나 같이 봐야지. 숨이 조금 열려왔다. 소라야, 같이 가. 둘은 녹슨 자전거가 줄지어 서 있는 거치대를 지나 가슴에 팻말을 달고 설교하는 노인의 시선을 피해 터미널 입구로 들어갔다.

 

 

 

시간표를 보고 서 있는 유진을 대기실 의자에 앉혔다. 잠깐 앉아 있어봐. 내가 표랑 커피 좀 사올게. 괜찮아, 소라야. 아니, 언니는 앉아서 좀 쉬고 있어. 언니가 맨날 그런 식이니까, 애들이 뒤에서 욕하잖아. 내 말 좀 들어. 하는 수 없었다. 소라의 뒷모습을 보다 가방을 벗어 옆 자리에 놓았다. 벽 너머 고속버스의 그르렁 소리가 들리더니 매캐한 매연냄새가 났다. 관자놀이 한쪽에 무지근한 두통이 일었다. 성가시지만 견딜만한 정도였다. 엄지를 접어 꾹꾹 누르며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날씨 때문인가 싶었다. 여름으로 넘어오면서 유례없이 많은 날에 비가 내렸다. 도시는 시커멓게 젖어들었고 두통의 빈도도 늘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다 소나기를 뒤집어썼는데, 빗물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이 도시와 비는 어울리지 않는다. 비가 오면 산등성이는 먹물 뒤집어 쓴 듯 검어져 사납고 거대한 멧돼지의 등처럼 보였다. 재미없게 박혀 있는 나무들은 날이 선 짐승의 털이었다. 나무뿌리가 삼키지 못한 빗물이 배수가 안 되는 의과대학 담벼락 옆길로 흘렀다. 토사물 같은 작은 강은 고속도로 쪽으로 흘러갔다. 고가의 밑에 물을 삼키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 여기. 소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방을 치워 앉을 자리를 만들고 버스표와 차가운 커피를 건네받았다. 역시 나밖에 없지? 소라는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며 긴 목을 뽑아 세웠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얗고 매끈한 목이 드러났다. 고마워, 대답하며 커피 한 모금 빨고 표를 보았다. 다시 매표소 위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표의 시간을 보았다. 다음 차가 아니네. 잘못 사온 건가? 빠른 시간의 버스보다 십오 분 뒤에 출발하는 차였다. 소라는 싱긋 웃었다. 언니랑 커피 마시면서 수다나 떨자고. 터미널까지 같이 와줬는데 나만 쑥, 학교로 돌아가는 건 좀 그렇잖아. 표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그래. 커피는 내가 사줬어야 하는데. 대기실은 한산했으므로 대화하기 나쁘지 않았다. 젖은 풀냄새가 났고, 고속버스가 들어오는 소리와 브레이크 소리가 이어 들렸다. 어렵게 연애하다 헤어진 친구 얘기하다, 신장내과 남자 선생님 얘기로 넘어갔다. 언니, 그분 약간 자폐느낌 있지 않아? 나, 그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어. 곧 신장내과에서 사망한 환자 얘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환자의 병명을 얘기하다 결국 가방 속의 원서를 꺼내 펼쳤다. 언니, 여기까지 와서 책 펼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소라는 책을 뺏어 반대편 자리에 놓았다. 이건 압수, 내가 기숙사에 갖다 놓을게. 유진이 뭐라 말하려는데 소라가 매표소 옆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버스기사 같은데, 다른 기사분들 보다 젊네. 그치? 말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유진은 멀뚱히 쳐다보다 한숨을 푹 뱉어냈다. 사귀던 남자친구와 뭔가 선이 닮아 있었다. 삼수를 해서 들어온 남자친구는 유별나긴 했지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도시 끝자락, 시골에 가까운 의과대학에선 공부 말고는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남자친구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유진은 힘든 시간을 꿈꾸듯 보낼 수 있었다. 죽기 전까지는. 또, 뭐 생각해? 소라의 손가락이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냥, 아무것도. 언니, 내가 그러지 말랬지. 커피를 다 마신 참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 안가고, 그냥 너랑 공부해도 되는데. 소라의 시선이 살갗에 닿았다. 하얀 손가락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올려 정리했다. 언니, 그 날이잖아. 몇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버스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구름이 더 두꺼워졌는지 밖은 더 어둑해졌다.

 

 

 

유진은 손바닥을 보이며 정류장 입구를 지났다. 매연 냄새가 습기를 타고 흘렀다. 거대한 몸체의 버스는 입을 연 채 유진을 기다렸다. 쿠궁, 천둥소리에 건물 처마 밖으로 드러난 하늘을 보았다. 성난 구름은 체액을 뿌려댈 준비를 하는 듯 몸을 꼬았다. 차에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겠지. 한쪽 관자놀이를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라는 없었다. 벌써 간 건가? 아니면 화장실? 원서가 시선을 붙잡았다. 아직 대기실 의자 위에 있었다. 뒤에 다른 사람에 줄을 섰으므로, 유진은 어쩔 수 없이 앞줄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타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큰 짐을 넣는 버스 아래 짐칸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기사는 운전석 옆에 서 표를 확인했다. 소라와 함께 봤던 젊은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예전 남자친구보다 훨씬 말끔하게 생겼다. 버스기사 보단 대학로에서 사인 받았던 연극배우의 체형에 가까웠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목소리도 괜찮았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표를 내보이고는 자리를 찾아 깊숙이 들어갔다. 세 네 명 정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 혼자 온 사람들인 듯 옆 자리를 비운 채 앉았다. 유진은 뒤에서 두 번째, 버스의 왼편 좌석이 좋았다. 평소에 타면 커튼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위치였다. 세상에 없는 듯, 누군가의 관심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자리였다. 왼편 유리창에 살짝 기대어 창가의 시원한 진동을 느끼는 것도 좋았다. 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시커먼 하늘은 버스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 으르렁 댔다. 출발합니다. 버스 방송스피커에서 버스기사의 목소리가 나왔다. 앞문이 닫히고 뒤쪽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났다. 몸을 의자에 푹 묻은 채 고개를 옆으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에 핸드폰을 든채 떠오르지 않는 뭔가를 잡으려 눈꺼풀 안의 눈동자를 굴렸다. 기름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소등하겠습니다. 버스 안은 톨게이트를 지나며 어둑해졌다. 보조등 덕에 겨우 버스 안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마저 꺼지면 새까만 동굴이 될 터였다. 버스의 원심력에 몸이 바깥쪽으로 기울었다 돌아왔다.

 

 

 

버스가 본선으로 올라가자 구름은 작정한 듯 비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자 빗방울은 유리창에 달려들어 터져나갔다. 노란 빛이 번쩍하더니 또다시 짐승의 소리가 났다. 사고는 안 나겠지. 버스기사 얼굴에 경솔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아서 안전 운전하겠지. 잊었던 게 뭐지? 눈을 꼭 감고 팔짱을 끼고 몸을 동글게 말아 수면 자세를 취했다. 아까 학교에서 소라 만나서 택시타고 나와서, 까지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크르릉.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다시 시커먼 복도에 유진은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철문 반대편, 강의실 안에는 유진을 제외한 백명의 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를 못 듣게 된다면 분명 유급이었다. 유진은 안절부절하며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했다. 아득함이, 순간 좌절감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들어 횡격막이 쪼그라들고 눈물이 솟았다. 안쪽에 있는 동기들은 다들 유진을 머리에 떠올리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터였다. 유진 학생, 들어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듯 했다. 다시 귀를 기울여도 강의하는 교수의 희미한 목소리 외에는 없었다. 들어가도 될까? 안될까? 지금 들은 것이 환청이라면? 입술이 바짝 말라 침을 발랐다. 문을 열면 백명의 눈동자가 유진을 향할 터였다. 자네, 나가라고 하지 않았나? 교수의 호통이 이어지고 울지 않으면 마무리지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유진 학생 들어와. 정말 희미하게 들린 소리였다. 날 부른 것일까? 유진은 고막이 감지한 소리가 사실이기를 빌며 한 걸음씩 철문으로 다가갔다. 철문을 너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미간을 좁히고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쿵, 망치로 때린 듯 철문이 울리고 유진은 놀라 뒤로 넘어졌다. 잠긴 철문을 위태롭게 삐걱댔다. 무언가 튀어 나오려 하는 것 같았다.

 

 

 

크르릉, 천둥 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버스 안이었다. 빗소리와 엔진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웅웅거림이 아직 몽롱한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뭐지? 라디오를 틀었나? 커튼 사이, 터지는 빗방울을 확인하고 좌석 위로 고개를 들어보았다. 맨 앞좌석 부근, 시커먼 덩어리가 아른거렸다. 너무 예쁜 손주들이었어요. 눈을 비비자 말소리도 선명해졌다. 둘이 나가서 하나만 돌아왔는데 제가 어떻게 살 수가 있겠어요. 논두렁에 떨어져 있는 것을 다음 날 새벽에야 발견했어요. 목이 뒤로 돌아간 채로. 그 어린 아이가 밤새 얼마나 추웠을까. 할머니 목소리였다. 왜, 저런 얘기를 하는 거지? 유진은 슬쩍 몸을 세워 앞을 살폈다. 할머니를 제지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운전사는 왜 말리지 않을까. 실루엣으로 보이는 손에 마이크가 들려 있었고, 버스 스피커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왔다. 버스기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면, 꿈을 꾸는 건가? 한숨 소리가 스피커로 나왔다.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때 아이들한테 심부름만 시키지 않았어도. 유진은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했다. 언니, 잘 가고 있어? 도착하면 문자해. 소라에게 알았어라고 답문 하고 다시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쨌든, 여러분과 함께 해서 너무 기쁩니다.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사방은 천둥과 비와 엔진 소리로 가득했지만 진공처럼 고요했다. 할머니의 실루엣은 곧 사라졌다. 몽롱함과 두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의 생각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올리려 했다. 중요한 건데 잊고 있던 뭔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졸업하기 전까지는 뇌신경이 버텨줘야 할 텐데. 영양제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아아, 안녕하세요.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잠을 쫓아내는 소리였다. 저는 쩌어 뒤에 보건지소에서 참 오래 일했는데, 말이에요. 동네 노인들 챙겨주고, 간섭하는 사람없고. 너무 팔자좋게 잘 지냈어요. 버스 앞쪽에서 서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한 손으론 버스 좌석을 잡고 다른 손에는 마이크였다. 쉰 정도 되었을까. 사투리가 섞여 나왔다. 남편도 공무원인데 별 탈 없었고, 딸도 대학 잘 다니고 있고요. 문제는 그 공중보건의 선생님 때문에 생겼죠. 이상한 환자들이야 가끔 오지만 그 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 왔어요. 등치 큰 정신이상자 같은 사람 말이에요. 저는 방문간호 때문에 외출했는데, 돌아와 보니 그 선생님이 글쎄. 목매달고 죽어버린 거에요. 부임하신지 얼마 안된 의사 선생님이라 정붙일 시간도 없이 가버린 거죠. 그런데 왜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운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일도 못하겠더라고요. 그때 방문간호 가지 말고 선생님 옆에 있어줘야 했는데. 그 후엔 일도 손에 잘 안 잡히고, 뭐 다른 건 제대로 하겠어요? 겨우겨우 죽만 넘기면서 살았지요. 어쨌든 이렇게 기회가 되서, 여러분들과 죽게 되서 너무 기뻐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앉았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두번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유진은 뒷목이 불편해지고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소라에게 전화를 하려다 문자를 보냈다. 정말? 무슨 퍼포먼스 같은 건가? 소라 추측이 맞았으면 했다. 소라야, 나 좀 무서워.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이 그랬다. 슬쩍 웃으면서 던진 말이라 진지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들었다. 같이 여러분들과 죽게 되어 기쁘다고. 맥락없는 말이었다. 그냥 겁주려고 하는 얘긴가? 뒤통수가 근지러워, 몸을 꼬아 뒤를 보았다. 맨 뒷좌석에는 아무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