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 안에 있어

  • 장르: SF, 호러 | 태그: #우주관광 #스페이스크루즈선 #표류 #고기 #밀실 #사이코패스 #전뇌 #승객 #선원 #인공지능
  • 평점×34 | 분량: 160매 | 성향:
  • 소개: 항로를 잃고 우주를 표류하게 된 초호화 스페이스 크루즈선 미톨로지아. 연료와 음식이 고갈돼 간다. 승객들과 선원들간에 갈등이 깊어지자 선원들은 봉기를 꿈꾼다. 하지만 인공지능 선장... 더보기

넌 내 안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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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은 접시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른 저녁 식사로 주어진 것은 작은 두부 여섯 조각이 들어간 양상추샐러드와 주연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빵 한 조각이 다였다. 아무리 세 시간 뒤에 공연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공연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심할 것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 심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어서, 옆에 앉은 다른 무용수들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접시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두부가 고기로 바뀌고 빵과 샐러드의 양이 늘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때, 그들의 불평을 미리 잠재우려는 듯 디렉터인 피에르가 예의 쌀쌀맞으면서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무용수들을 다그쳤다.

 

“늘 말했듯이 비만은 우리의 적입니다. 몸이 무거우면 동작이 늘어지게 돼 있어요. 아름답지 않은 장면이죠. 우리 고객들은 그냥 상류도 아니고 세계 최상류층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만 보며 살아온 분들이죠. 그런데 이 피에르가 올린 무대에서 뱃살이 출렁인다? 엉덩이가 무거워 점프할 타이밍을 놓친다? 이러면 내 명성에 금이 가요. 나는 최고 중의 최고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을 뽑았습니다. 오늘은 이 미톨로지아에서 개최되는 백 번째 공연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 이백 번의 공연이 남았고 그럼 여러분은 고향으로 돌아가 보란 듯이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되겠지요. 그날이 오면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말을 마친 피에르는 군살 하나 없이 가늘고 탄탄한 몸매를 뽐내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우아한 동작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제기랄, 그렇게 완벽한 댄서가 필요하면 로봇을 뽑든가.”

 

남자 무용수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도 피에르만큼이나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로, 무대에서 보여주는 무용 실력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사실 주연을 비롯한 모두가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이 초호화 스페이스 크루즈선인 미톨로지아에 탑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상류도 아니고 세계 최상류층이라잖아. 로봇 따위가 하는 싸구려 공연을 보고 싶겠어?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 난 인간들인데.”

 

“바보야, 그건 너 같은 하층민 생각이고. 그 사람들은 애초에 뭘 과시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어.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당연한 사람들이니까. 졸부들이나 지 잘 난 거 과시하려 그러지.”

 

“맞아. 오죽하면 우주선 이름이 미톨로지아냐고.”

 

“다들 정신 차려. 이렇게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어딨어?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우릴 찾아주시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율리야의 말에 다들 욕설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백 번째 반복되는 대화들이다. 앞으로 이백 번만 더 같은 대화를 나누면 그들은 고향인 지구로 돌아간다. 주연은 오늘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료들의 말에 맞장구쳤다. 첫 리허설 때 주연은‘천상’에 입성한 순간 눈에 들어온 온갖 사치스럽고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 주연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었다. 카펫에 침을 흘릴지 모르니 입 좀 다물고 있으라는 농담과 함께. 그는 주연이 항해 내내 받는 월급을 다 갖다 바쳐봤자 그 카펫의 세탁비도 안 될 거라고도 했다. 그때 주연은 천상의 어느 낙원에 들어선 듯한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굉장히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자각해야만 했다.

 

성에 차지 않는 식사를 천천히 마친 무용수들은 차례차례 식당을 빠져나가 이를 닦고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공연 시작 두 시간 전, 무용수들은 복도를 통해 ‘사다리’로 향했다. 선원들이 머무는 ‘개미굴’에서 승객 전용 공간인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이었다. 복도는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정도로 좁아서 그들은 기차놀이하듯 일렬로 걸어야 했다. 역시 좁디좁은 계단을 일렬로 오르던 무용수들은 ‘천상’으로 나가는 출입문 옆의 인식기에 저마다 손목을 갖다 대며 선상카드 칩을 인식시켰다.

 

그날의 공연은 훌륭하고 성공적이었다, 라는 건 무용수들과 일부 관객들만의 생각이었다. 어떤 관객들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지만 개중에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 급기야 꾸벅거리며 조는 관객도 있었다. 아마도 낮 동안 칵테일 바에서 무한정 제공하는 갖가지 주류를 섭렵한 탓이겠지만 디렉터인 피에르의 생각은 달랐다. 오늘도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무용수들을 모아 놓고는 공연 중에 있었던 실수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꼬투리를 잡을 터였다.

 

역시나 백 번째 반복되는 설교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뒤 ‘개미굴’로 내려왔다. 모두들 기진맥진한 표정이었고, 배에서는 천둥이 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따뜻한 우유 반 잔을 감지덕지하며 마신 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밤늦도록 개미굴을 어슬렁대다 피에르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자기관리 못 하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으니까. 그럴 거면 당장 하선하라, 피에르가 늘 하는 말이었다.

 

공용 욕실에서 샤워하고 이를 닦은 뒤 동료들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온 주연은 이불 속에 누워 노크소리를 기다렸다. 마침내, 똑똑똑, 문이 작게 울린 뒤 살며시 열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온 사람은 안톤이었다. 독일계인 어머니와 중국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에 가까운 외모였지만 요리 실력만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확신하는 남자로,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은 소시지와 치즈와 감자의 무한 변용이라 전혀 그립지 않다는 농담을 자주 하곤 했다. 그의 커다란 손에는 방금 오븐에서 꺼낸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어 스테이크가 들려져 있었다.

 

“배 많이 고팠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속 뒤집혀 죽을 뻔.”

 

“얼른 먹어. 모자라면 더 구워올게.”

 

“재고조사하다 걸리는 거 아냐?”

 

“알잖아. 걱정 마.”

 

“그게 문제야. 도둑질보다 해킹이 더 불법 아닌가?”

 

“그럼 도로 갖다놓지 뭐.”

 

안톤이 웃으며 돌아서자 주연은 낚아채듯 접시를 받아 책상에 놓은 뒤 허겁지겁 스테이크를 썰어먹었다. 이 거대한 크루즈선 어딘가에서 양식되는 연어는 승객들에게나 제공되는 고급 식재료였다. 선원들은, 특히 피에르의 극단적인 식이요법에 시달리는 무용수들은 싸구려 정어리 통조림만 얻어먹어도 감사해야 했다.

 

안톤의 연어 스테이크는 퍽퍽하지도 비리지도 않고 미려한 풍미로 가득했다. 추가 양념은 필요 없었으나 주연은 늘 그렇듯 피에르에 대한 흉을 양념처럼 가미했다. 안톤이 주연의 푸념을 조용히 들어주다 말했다.

 

“그래도 나쁜 사람 아니잖아. 완벽주의자라 그런 거지.”

 

“나도 알아. 그 잔소리가 우릴 위해서라는 게 진심인 것도 알고. 그래도 너무 지긋지긋해. 전부 다.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 답답증 걸려 죽을 것 같아.”

 

주연은 선실을 돌아봤다. 다 돌아보는데 몇 초 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방이었다. 창문조차 하나 없는 삭막한 직육면체. 그 안을 차지한 것은 한 사람이 누워 겨우 뒤척일 정도의 침대, 침대 아래의 3단 서랍, 침대 앞 공간을 차지하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의자는 하나뿐이라 주연이 책상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안톤은 침대에 걸터앉아야 했다. 그나마 혼자 쓸 수 있는 방이라는 점에 주연은 안도했다. 예전에 캐주얼 등급인 어느 스페이스 크루즈 선에 탑승했을 때에는 4인실을 썼었기 때문이다.

 

“답답하면 나 이제 자러 간다?”

 

안톤의 농담에 주연이 눈을 흘기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기만 해 봐. 하선하면 아는 체도 안 할 테니까.”

 

“하선하기 전엔 왜 아는 체를 해 주시고?”

 

“이렇게 멋진 요리사 찾기가 힘드니까.”

 

“그럼 영원히 못 내리게 해야겠네.”

 

주연은 문득 체기를 느꼈다. 언제까지 이렇게 우주를 떠돌며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히 보수는 지구에서보다 배는 높다. 피에르처럼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디렉터도 만나기 힘들다. 하지만 늘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떠 있긴 하지. 우주를 날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불안한 거야. 우주선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선장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걸. 사람으로 치면 IQ가 얼마라더라.”

 

“선장을 믿어?”

 

“그럼. 인공지능은 실수하지 않아. 철저히 계산적이라고. 연료 수급도 그렇고 부품 보수며 소행성 궤도 계산이며 못 하는 게 없잖아.”

 

“그래, 그래. 심지어 농사에 재고 관리까지. 그렇게 완벽한 선장님이 왜 너 같은 요리사를 고용하셨대?”

 

“요리는 손맛이고 인공지능은 손이 없으니까?”

 

주연은 맞장구치며 깔깔대다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우리가 맨날 같은 데에서 근무할 거란 보장이 없잖아.”

 

“걱정 마. 우리 실력이면 어느 한 명이 옮겨도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있을 거야.”

 

“네 실력이면 요리를 말하는 거야, 해킹을 말하는 거야?”

 

주연이 장난스럽게 묻자 안톤도 개구지게 대꾸했다.

 

“당연히 둘 다지. 그리고 그거 알아? 난 침대가 넓어지는 마법도 부릴 수 있다고.”

 

두 사람이 뒤엉키고, 잠시 뒤 온도 제어 장치가 작동되며 에어컨이 켜졌다. 직육면체의 쪽방을 채우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했다. 안톤은 주연의 매끄러운 어깨를 지그시 깨물며 속삭였다.

 

“너한텐 내가 있잖아.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말 믿어도 돼?”

 

아무하고나 정을 주고받을 수 없는 세상이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판국에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그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상. 상대에게 배신이나 사기라도 당하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는 세상이다.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은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안톤도 주연도 언제 고객들의 취향이 로봇 생산물로 옮겨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사소한 실수나 고객의 변심으로 안톤과 주연과 그들의 동료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고주연, 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를 거야.”

 

“얼마나 좋아하는데?”

 

“싹싹 핥고 맛보면서 잘근잘근 씹다가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풋, 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요리사 아니랄까 봐.

 

“그 말 들으니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 피에르가 알면 경을 칠 테지만.”

 

“모르게 먹으면 되지.”

 

안톤은 그림자처럼 방을 빠져나가 그날 오후에 승객들에게 간식으로 제공되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조금 가져왔다. 선원들이 먹을 목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만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남은 음식은 모조리 폐기하게 돼 있었지만 안톤은 주연을 위해 간식거리를 조금씩 남겨두곤 했다. 주연은 안톤과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나눠먹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꼭두새벽, 안톤은 자신의 어깨에 휘감긴 주연의 팔을 살며시 떼어내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주연은 르네상스 시대의 어느 화가가 그린 여인처럼 고운 자태로 잠들어 있었다. 안톤은 그 모습을 보며 이 미톨로지아의 진정한 여신은 ‘천상’의 콧대 높고 까탈 많은 귀부인들, 어찌 보면 인간쓰레기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들이 아니라 눈앞의 주연이라 생각했다.

 

안톤의 기상이 이른 까닭은 바로 그 정떨어지는 귀부인들의 아침 식사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크루즈선의 선장이자 인공지능인 불카누스가 식재료를 기르고 수확하고 씻고 다듬고 조리하는 로봇들을 부리고 있었지만 요리의 질감과 맛을 최종적으로 검수하는 것은 언제나 안톤의 몫이었다. 승객들은 로봇이 요리한 음식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레토르트와 동급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먼저 견본으로 준비된 각종 빵과 잼, 오믈렛, 과일샐러드 등을 한 입씩 맛 본 안톤은 불카누스에게 여러 가지 수정 사항을 전달했다. 전달은 안톤의 머릿속에서 바로 이뤄졌다. 몇 해 전 뇌수술을 받으며 여러 차례 삽입한 인공 뇌조직들을 통해서였다. 그 수술 덕분에 안톤은 사랑할 줄 아는 남자가 되었고, 고객들의 불만에도 곧바로 칼을 갈지 않을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그 전의 안톤은 눈앞의 이익과 쾌락만 좇는 충동적인 사이코패스였다.

 

불카누스가 재차 요리한 음식들은 모두 합격이었다. 안톤은 정갈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웨이터들에게 요리를 들고 나가 서빙할 것을 명했다. 또한 안톤은 승객들이 아침 식사를 즐기는 레스토랑을 천천히 거닐며 고객들과 인사하고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승객들은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다는 표정으로 선상신문을 읽으며 오늘은 어떤 공연과 활동을 즐길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핀란드 출신의 비르타넨 부부는 오믈렛이 미끌거린다는 둥, 빵 껍질이 너무 바삭거린다는 둥 극히 사소해서 다른 승객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불평불만을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어딜 가든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졸부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안톤은 늘 그렇듯 따뜻하게 웃는 낯으로 오믈렛을 새로 내어오고 빵 껍질을 벗겨주며 부부의 비위를 맞췄다.

 

비르타넨 부부는 외계 행성 투자가 한창이던 시절 어느 저렴한 소행성대를 구입했다가 그곳에서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희귀 방사성 원소인 비르타늄이 발견되는 바람에 억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선 행운아들이었다. 그 비르타늄이 아니었다면 인류의 항성 간 여행은 몇 십 년 더 늦어졌을지도 몰랐다. 현재 미톨로지아가 지구에서 58광년 떨어진 지구형 행성인 아르베즈로 날아가게 하는 원동력도 비르타늄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 에너지 덕분이었다.

 

만약 비르타넨 부부의 심기가 뒤틀리면 그들이 로열 갤럭시 크루즈 사에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비르타늄을 판매하겠노라 약속한 양해각서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선장인 불카누스를 비롯한 미톨로지아 선원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도 비르타넨 부부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원들의 고용주인 로열 갤럭시 크루즈 사는 초거대기업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눈치 없고 무능한 선원 하나쯤은 법적으로 영원히 매장해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르타넨 부부를 비롯한 승객들이 레스토랑을 비우자 장막 뒤에 숨어있던 로봇들이 그제야 나타나 식탁을 치우고 청소를 마쳤다. 안톤은 방으로 돌아가 한숨 돌리며 눈을 감았다. 시미즈 박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다는 알림이 대뇌 시각 영역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시미즈 박사는 전뇌(電腦) 연구의 선두에 서 있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권위자라 불리는 뇌과학자로, 몇 년 전 안톤의 뇌에 인공 편도체를 비롯한 여러 부위를 이식하는 프로젝트를 이끈 사람이었다. 인류 사회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급격한 증가로 각종 범죄가 늘어나고 있었다. 보모 로봇의 이용 때문이다, 세상이 삭막해져서 그렇다, 각종 분석이 난무한 가운데 시미즈 박사는 반사회적인격장애를 가진 이들의 뇌 일부를 인공뇌조직으로 대체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안톤이 그 실험대상자 중의 하나였다.

 

시미즈 박사의 메시지는 여느 때처럼 안톤의 전뇌가 잘 작동되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위험에 처한 여자 친구를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 길을 잃고 우는 아이를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트집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고객을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 등등 안톤이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여러 감정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안톤은 성실히 대답을 작성해 보냈다. 거짓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질문을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떠올리는 연상과 그로 인해 자동적으로 파생되는 정서가 실시간으로 측정돼 시미즈 박사에게 전송되고 있을 테니까. 안톤의 대뇌에 이식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모듈인 ‘디렉탠트’가 그 역할을 충실히 잘 이행하고 있을 것이다. 원래 안톤의 형편으로는 감히 엄두를 못 낼 기술이었으나 시미즈 박사 팀이 프로젝트에 필요하다 생각해서 이식한 것이었다.

 

안톤은 점심 식사 준비가 시작되는 10시까지 낮잠을 즐기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 불카누스의 공지가 울려 퍼졌다. 전뇌를 이식한 이들에게는 머릿속의 디렉탠트를 통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선내 구석구석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였다.

 

– 승객 여러분, 우리는 잠시 뒤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 태양계 환경 안전 관리 규약에 따라 아광속 추진이 가능한 영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한 분도 남김없이 지정된 좌석에 착석해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가속이 끝날 때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말아 주십시오.

 

아, 그게 오늘이었던가. 안톤은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침대 옆에 달랑거리는 안전벨트를 끌어 모아 착용했다. 다시 눈을 감자 불카누스의 공지가 흘러나왔다.

 

– 모든 승객 여러분과 전 직원의 안전벨트 착용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아광속 추진을 위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10, 9, 8……

 

캬, 목소리 좋고……. 안톤은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며 감탄했다. 천상의 목소리라 칭송받는 세계적인 성악가 미켈레 모레티의 음성이었다. 아마도 미켈레 모레티가 기본적인 음절을 녹음한 것을 불카누스가 이리저리 조합해서 말하는 걸 거다. 불카누스가 노래도 할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아, 그건 그냥 서버에 저장된 노래를 틀면 되겠구나. 안톤은 디렉탠트로 미톨로지아 서버에 접속해 미켈레 모레티의 최근 앨범을 재생시켰다. 곧바로 대뇌 청각 영역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감격도 잠시, 노래가 뚝 끊기더니 극심한 진동과 함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평소의 아광속 추진과 다른 생소한 감각이었다. 또한 전등이 나감과 동시에 몸이 침대를 떠나며 부유감이 느껴졌다. 벨트가 아니었다면 허공으로 떠올랐을 터였다. 아무래도 중력 발생 장치가 꺼진 모양이었다.

 

‘왜 이러지? 이상한데?’

 

안톤의 질문에 답하듯, 선장 불카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객 여러분,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비상사태입니다. 현재 우리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우주에 들어섰습니다.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비상전력으로 최소한의 기능만 구동 중이므로 전자 기기가 작동되지 않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안톤은 주연부터 떠올렸다.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안전벨트는 풀러지지 않았다. 불카누스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안톤은 디렉탠트로 주연에게 연락하려다 주연이 디렉탠트를 이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 안톤? 괜찮아?

 

– 응. 낮잠을 못 자게 된 것만 빼면. 너는?

 

– 나도 뭐 아점을 못 먹게 된 것만 빼면 괜찮아. 근데 위치를 알 수 없는 우주라는 게 뭘까?

 

– 그러게. 지구랑 통신이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알기로는 태양계 주변의 별들을 관측하면서 우주선의 위치를 계산하거든.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면, 광속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니까…… 아마도 통신 장치가 고장 난 걸 거야. 아님 전파망원경이? 뭐든 상관없지. 우리 선장은 불카누스니까, 그러니까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잖아. 못 만드는 게 없지. 못 고치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금방 고칠 수 있을 거야.

 

안톤은 10분이 넘게 떠들다 주연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본인이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안톤, 괜찮아? 좀 흥분한 것 같은데.

 

– 흥분? 이런 상황에 흥분이라니. 전혀.

 

– 걱정 마, 안톤. 선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 걱정은 무슨. 그래, 선장이 왜 선장이겠어. 이런 일 하라고 만든 게 선장이잖아. 만일 선장이 사람이었으면, 아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거 알아? 옛날에 한국에서 선박 사고가 있었는데, 아, 너도 한국 사람이니까 들어봤겠구나……

 

안톤은 다시금 말이 많아지는 자신을 의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떨릴까. 뱃속은 왜 이리도 쓰리고, 겨드랑이에서는 왜 이렇게 식은땀이 날까. 아아, 그래, 그래. 불안, 공포. 난 지금 불안하고 무서운 거야.

 

수술 전엔 느껴보지 못 했던 감정들이었다. 그때 안톤이 느낀 것이라고는 재밌는 일이 있으면 기분 좋고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면 불쾌한 몇 종류의 단순한 감정이 다였다. 수술 후 안톤은 자신이 다채로운 감정들을 놓쳐왔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며 앞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의 세계를 즐겁게 탐구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맘에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 아슬아슬함, 긴장감. 일찍이 겪어보지 못 한 고역이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쓰던 안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 안톤? 자는 거야?

 

순간적으로 짜증이 몰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천하태평으로 잠이나 잘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걸까. 그러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기만 믿으라고 아무 걱정 말라고 주연을 위로한 게 불과 어젯밤이었다. 안톤은 진심이었다. 주연을 지켜주고 싶었다. 헌데 오히려 주연이 안톤을 위로하고 있었다.

 

– 그랜트 씨가 그러는데 밖에 별이 많대. 그러니까 우리가 은하를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라는 거야.

 

그랜트라는 이름에 안톤은 다시금 짜증이 치솟았다. 그랜트는 패션업계의 거물로, 언제나 이상야릇한 눈초리로 주연을 바라보는 승객 중 한 명이었다. 말로는 주연을 런웨이에 올리고 싶다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안톤은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랜트는 피에르의 무용 팀이 무대에 올린 공연을 본 날부터 주연을 방으로 불러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패션쇼에 관한 대화는 시나브로 개인 신상을 캐묻는 지분거림으로 변해갔고, 실수를 가장한 스킨쉽은 점점 도를 넘어 랩 댄스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미톨로지아는 도망갈 곳이 없다. 그 자체가 거대하고도 완벽한 밀실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의 ‘하선’은 곧 죽음을 뜻한다. 성간을 여행하는 우주선이기에 탈출선조차 갖춰놓지 않았다. 탈출해봤자 그 작은 우주선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페이스 크루즈선 제작사들은 탈출 자체가 필요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크루즈선을 제작한다. 지금껏 크루즈선 자체의 결함으로 일어난 사고가 0건인 이유다.

 

탈출이 불가능하기에 미톨로지아 내부에서 누군가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연은 그랜트를 징그러워하면서도 그의 요구를 거절하면 무슨 분란이 일어날지 몰라 마지못해 불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에르에게 들키고 말았다. 피에르는 노발대발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왔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피에르와 그랜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랜트는 더 이상 주연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객석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으로 주연을 바라보는 건 여전해서 안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 그랜트 그 인간이랑 아직도 연락하는 줄 몰랐네.

 

안톤은 스스로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가시를 발견했다.

 

– 연락이란 모름지기 주고받는 거지. 그랜트 씨 혼자 메시지를 보내오는 걸 어떡해. 정전돼서 서버 접속도 안 되고 네가 하도 조용하길래 할 일 없어서 스팸 메시지 함 정리하다 본 거야. 오해하지 마.

 

주연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안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찰나, 불카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승객 여러분과 전 직원에게 알립니다. 현재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주변의 모든 행성과의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양계에서 최소 100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인은 파악 중이나, 최근 들어 태양계 주변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웜홀 중 하나를 통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능한 빨리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 중이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공지가 끝나자 전등에 불이 켜지고 몸은 침대로 떨어졌다. 노래도 듣고 안전벨트도 풀 수 있었다. 발전기가 다시 가동된다는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안톤은 미톨로지아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안에 떨고 있을 순 없었다. 곧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 와중에도 웃는 얼굴로 불안을 감춘 채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안톤은 치가 떨렸다. 비르타넨 부부와 그랜트가 위장장애를 일으켜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톤의 바람과 달리 비르타넨 부부와 그랜트 모두 레스토랑에 나와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모든 승객들의 얼굴에 불안과 수심이 가득했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안톤을 비롯한 레스토랑 직원들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불카누스는 이럴 때 직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커피가 왜 이렇게 차갑지? 전력이 부족한가?”

 

“캐비어 냄새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까 정전됐을 때 상했나 봐.”

 

“스테이크가 딱딱하군. 비상사태라고 비상식량을 주는 거요?”

 

“선장이 뭐래요?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죠? 아니, 난 직접 선장을 봐야겠어요!”

 

잃어버린 엄마를 다시 찾은 아이처럼, 직원들에게 오만가지 잡다한 요구사항을 들이부으며 투정을 부리는 승객들을 보며 안톤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들의 공포를 이해할 만 했다. 자산가, 기업가, 정치가, 어떻게든 그들을 유혹해 옆자리를 꿰찬 연인과 배우자들. 그들의 권력과 부는 지구에서의 삶에 기반하고 있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이 상하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안톤의 상념과 관계없이 비르타넨 부부의 불평은 더욱 심해져 이젠 고성까지 지르고 있었다. 평소 큰 불만 없이 식사를 즐기던 승객들까지 욕설을 뱉으며 뭔가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달래느라 직원들이 쩔쩔매며 애를 먹었다. 평소 점잖아 보이던 이들도 위급상황에서는 본성을 드러내고 만다. 위선자들. 인간쓰레기들. 너희가 언제까지 사람 위에 선 신일 줄 아느냐. 우리가 언제까지 너희들의 구두코에 대고 굽실거리는 일개미일 줄 아느냐. 안톤은 얼굴에서 사라지는 미소를 붙잡기 위해 몇 배는 더 애를 써야 했다.

 

그 시각, 주연은 동료무용수들과 피에르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먹는 크기의 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샌드위치였다.

 

오늘 공연을 취소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무용수들의 말에 피에르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일수록 승객들에게 즐길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장의 전언입니다. 불안에 떠는 승객들이 선장 나오라고 난리를 치고 있어요. 하지만 선장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고 싶어 하고요. 승객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할 공연은…….”

 

무용수들은 피에르의 공연 계획을 다 듣고 아연실색했다.

 

“진짜 역겹네요. 거의 포르노 아닌가요?”

 

“어쩔 수가 없어요. 3S 정책 알죠? 그걸 써 먹는 거예요. 선장의 명령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하기 싫은 사람은 빠져도 돼요.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피에르가 고개를 숙였다. 일찍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뼈에 사무치는 훈계로 남녀 가릴 것 없이 눈물을 쏙 빼게 만들고는 눈 하나 깜짝 않는 피에르였다. 게다가 어둡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니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기까지 한 것 같았다.

 

피에르의 진심이 통해서일까. 아무도 공연에서 빠지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날 저녁 전라에 가까운 복장으로 무대에 올라 선정적이고 야릇한 동작들을 선보여야 했다. 공연을 다 마치고 나니 무용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따뜻한 우유를 나눠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뒤풀이하던 시간은 흐지부지 뭉개지고 그들은 작별인사조차 없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침대를 파고든 주연은 안톤을 기다리는 것도 깜빡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그만큼 피곤한 하루였다. 오밤중이 돼서야 찾아온 안톤은 빈손이었다. 주연은 그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안해, 주연.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식량을 아끼라는 명령이야. 나도 그게 걱정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오늘 연기하느라 고생 많았지?”

 

“연기할 필요는 없어. 선장이 알아서 하니까. 난 몸만 빌려주면 되는 거라서.”

 

“느낌 진짜 이상하겠다.”

 

“이상하긴 해. 몸이 제멋대로 막 움직이니까. 말도 막 나오고.”

 

승객들은 선장이 인공지능인지 모른다.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며 본인들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니까. 그래서 선장인 불카누스가 승객들을 직접 대면해야 할 때에는 안톤이 몸을 빌려주고 있었다. 불카누스가 안톤의 뇌에 이식된 전뇌 조직들을 이용해 몸을 조종하는 것이다. 물론, 안톤의 얼굴과 목소리를 아는 승객들을 속이기 위해 그는 음성 변환이 가능하도록 특수 제작된 가면을 써야 했다.

 

“지금 그런 어떤 상황인 거야?”

 

“선장은 괜찮은 척 하는데 난 다 봤어. 우린 진짜 어딘지 모르는 데 와 있나 봐. 웜홀 통과하면서 추진기 하나가 망가져버렸어. 그것 땜에 발전기도 한 개 나가버리고. 선장이 그 웜홀 찾으려고 백방을 뒤지는데, 없어. 사라졌나 봐.”

 

“그럼 우리가 돌아갈 확률은…….”

 

“0에 가까워.”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지의 우주를 표류하는 우주선의 운명이란 불 보듯 뻔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도.

 

“선장은 그걸 언제 발표할 거래?”

 

“돌아갈 가능성이 0이 되는 날.”

 

“젠장.”

 

언제까지 다 벗은 몸으로 승객들 앞에 서서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 ‘귀하디귀한 승객님들’이 귀환에 대한 헛된 희망조차 품지 않도록 눈요깃거리를 던져주어야 한단 말인가.

 

“주연, 오늘 많이 힘들었지?”

 

“하아……. 오늘은 그럭저럭 해냈지만 조만간 그랜트 그 인간이 날 또 부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오늘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그냥……. 이번엔 피에르도 못 막겠지. 불카누스는 오히려 그렇게 하라 부추길 거고. 빌어먹을 인공지능 자식, 그랜트고 불카누스고 다 부숴버리고 싶네.”

 

주연은 비로소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섬뜩해졌다. 그랜트의 지분거림이야 어떻게든 피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가능성이 0이 되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결국 우주선은 동력이 모자라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럼 승객과 선원들은 어떻게 죽게 될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전력이 모자라면 산소발생기도 멈출 거고 정수 장치는 물론 온도 조절 장치도 멈출 것이다. 산소 부족, 물 부족, 극저온 모두 인간을 죽게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인 것은…….

 

“안톤, 지금 우리가 가진 식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처음에 여행 기간인 300일치에 여유분으로 50일치를 갖고 왔지. 그 중에 100일치는 없어진 상태고. 그러니까 250일치가 남았어. 만약 조금씩 덜 먹는다면 300일까지도 버틸 수 있겠지.”

 

“하! 저 귀하신 분들이 잘도 따라주겠네.”

 

“그러니까. 선장도 당분간은 원래대로 내 주라는 입장이고.”

 

“전기랑 음식 중에 뭐가 먼저 고갈될까?”

 

“선장의 계산에 따르면 음식이 더 빨리 고갈될 거야. 어차피 추진기랑 발전기를 덜 쓰게 됐으니까 연료가 많이 남게 됐거든.”

 

다음날부터 무용 팀을 제외한 전 직원은 평소보다 적은 음식을 제공받기 시작했다. 피에르의 무용 팀은 원래 적게 먹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양을 계속 먹게 된 것이다. 레스토랑, 카지노, 부티크숍 직원들, 마술사들, 배우들, 스포츠 강사들, 의료진들, 미용사들,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등 갑자기 다이어트를 하게 된 직원들은 선장의 명령이 탐탁지 않았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령불복종이란 해고를 뜻했고 이만한 직장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까.

 

그 와중에 포르노에 가까운 댄스 공연은 매일같이 이어졌고, 소위 ‘대박’을 쳤다. 평소 댄스 공연에 관심 없던 승객들까지 와서 보느라 공연장이 북새통을 이뤘다. 그렇게 불카누스의 계략은 성공했지만 주연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일주일 째 미지의 우주를 표류하던 날 밤, 공연이 끝나자 특별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한국의 전직 국회의원인 최진상의 요청이었다. 그는 무용수 몇 명을 지목해 자신의 객실로 와 달라고 했다. 모두 여자 무용수들이었다. 요청을 전달하는 피에르는 염산이라도 마신 듯한 표정이었다.

 

그랜트의 객실처럼 최진상의 객실도 무척이나 커서 방이 몇 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객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주연의 방보다 열 배는 커 보이는 응접실에서 주연의 방만큼이나 커다란 소파에 최진상은 물론, 그랜트와 또 다른 남자 승객들이 나이트가운만 입은 채 앉아 있었다. 국적과 직업에 공통점이 전혀 없음에도 저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구심점이 뭘까, 주연은 속으로 개탄했다.

 

이미 벌겋게 술이 취한 승객들은 무용수들에게 스트립 댄스를 출 것을 명했다.

 

“저흰 스트리퍼가 아니에요.”

 

주연이 말하자 승객들이 웃었다.

 

“무대에서 하던 건 뭔데?”

 

“얼마면 되겠어? 계좌 번호 불러 봐.”

 

주연이 재차 입을 열자 무용수들의 리더 격인 율리야가 눈짓하며 나섰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까 보여드린 공연만 조금 보여드리고 가겠어요. 처음부터 다 보여드리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러자 승객들이 손뼉을 치며 껄껄댔다.

 

“좋아, 좋아.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댄스가 시작되자 승객들이 손에 술병을 들고 나와서는 흐느적대며 같이 춤을 춰댔다. 무용수들은 승객들이 마시는 술병을 빼앗아 그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가며 댄스를 마쳤다.

 

‘개미굴’로 돌아가는 길에 주연은 율리야에게 따졌다.

 

“왜 돈을 안 받겠다고 한 거야? 저 진상들을 떠는데 그거라도 받아야지.”

 

“주연, 저 새끼들이 그걸 빌미로 뭘 더 요구할 것 같아?”

 

“젠장.”

 

‘특별 공연’은 매일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춤을 추는 내내 주연에게 밀착해 집적대던 그랜트가 느닷없이 주연의 팔을 잡아끌며 빈방으로 향했다. 주연이 발버둥을 치고 동료들이 도와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동료 무용수들도 다른 승객들에게 붙잡히며 희롱만 당했기 때문이다. 주연은 질질 끌려가다 다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는 그랜트의 머리를 가격하고 말았다. 뒤통수에 피가 흥건한 채로 그랜트가 쓰러지고 나서야 주연은 제 손에 쥐어진 것이 길이가 두 뺨이 넘는 청동 조각상인 것을 깨달았다. 그 일로 주연은 양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크루즈선에서 범죄가 발생할 경우 용의자나 범인을 감금하는 데에 쓰이는 지하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다음날 정오, 안톤은 병실에 누운 그랜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랜트가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은 모습은 전혀 연민을 자아내지 않았다. 안톤은 그랜트에게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남기며 포크와 나이프로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가뜩이나 승객들과 선원들 양쪽에서 쏟아지는 불평불만에 골치가 아프던 안톤이었다. 승객들은 사고 전과 다를 바 없는 식사를 하면서도 늘 뭔가를 투덜댔다. 비르타넨 부부는 한 술 더 떠서 서빙되는 요리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헤집는 모습이었다. 전부 꼬투리 잡을 게 없는지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먹어댔다. 그것만이 탈출구 없는 불안을 잠재울 묘약인 것처럼.

 

한편, 선원들은 선원들대로 불만이 많았다. 승객들에게 제공되는 신선한 고급 요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제공되던 우주식과 간편식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표류를 대비해서 아껴둬야 된다는 선장의 명령에 따라 예전만큼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레스토랑 직원들의 불만이 컸다. 직접 서빙을 하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산해진미를 한 입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