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를 향해서

  • 장르: SF | 태그: #SF #아포칼립스 #재난
  • 분량: 152매
  • 소개: 오랜 재해 끝에 망가져 버린 지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지구 생물들의 DNA 정보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 방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연구원 이진영은 불의의 사고로 홀로 남은 생존자가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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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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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15:28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먼지구름이 며칠간은 더 머무를 것처럼 보여 당분간은 시야가 회복되지 않을 듯하다. 별수 없이 잠시 숨을 고르고 지대를 살펴보는 중이다.

율라(YULLA)는 평소에도 친절한 인공지능이 아니었지만,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더 끔찍한 건? 인공지능은 쉬지도 지치지도 않는다는 거다.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빈정대고, 비꼬고.

인간에게 상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인공지능의 기본 원칙에 따르면 이 녀석은 물리적으로 나를 해칠 수 없을 텐데도, 율라의 말은 매번 나에게 실질적인 상처를 남긴다. 신체적 상처 못지않게 뼈가 아픈 정신적 상처 말이다.

살아오며 별일을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지만, 비아냥을 체득한 인공지능 하나가 내 자존감에 이토록 영향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이러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방만하게 집어넣은 비꼬기 기능으로 이루어질 터였다. 차가운 기계들이 내뱉는 날카롭고 냉정한 촌철살인에 심약하고 감정적인 인간들은 바로 나자빠지고 죽어 나갈 게 뻔했으니까. 인공지능들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들이 그 방법을 시도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초유의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원하면 율라를 꺼둘 수 있다는 것이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내륙의 자세한 지리를 모르는 데다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대략적인 지형 파악과 환경 분석을 위해서라도 율라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율라가 내장된 단말의 보조배터리는 태양열을 이용한 재생산 회로를 가지고 있었다. 안심할만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율라가 폭언을 퍼붓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이 암담했을 따름이다.

그나마 업무에 관해서라면 율라는 협조적이다. 인공지능인 만큼 공사 구분은 칼같이 하는 건지. 방주 연구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조차 율라는 연구소 소속의 인공지능이고 나는 마지막 남은 선임 연구원이므로, 율라는 나를 비난하면서도 내가 정보를 요청하면 순순히 답해준다. 주변에 위험 요소가 있으면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미리 경고도 해주고. 병 주고 약 주고다.

비록 실시간 업데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어 율라에게 백업된 지도는 꽤 예전의 것이지만, 직접 안내를 받아보니 반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 정보로 추정된다. 발이 묶인 김에 당분간은 주변을 뒤지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는 중이다. 슬슬 챙겨온 식량이 바닥을 보이는 중이니까. 며칠만 더 걸으면 버려진 구도심이 있다고 율라가 알려주었다. 탐색할만한 가치가 있길 바라며, 나는 몇 번이고 율라가 보여준 구도심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던 시기에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기에도 유효한 말이다.

5일 차 23:17

근처에서 높게 울려 퍼진 비명에 잠이 깼다. 밤은 공격성이 높은 짐승들의 시간이었고, 나는 위험을 피하고자 나무 위에 앉아 몸을 묶고 잠을 청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지를 볼썽사납게 허우적대며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여전히 연구소의 잔해 위에 앉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다시금 울음 같은 비명이 터졌다. 역시 저 밑에 누군가가 살아있었나 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온 것이다. 지체해선 안 된다. 밑에 있는 생존자가 단 한 사람이어도 좋았다. 꺼내주어야 했다. 나는 그럴 의무가 있었다.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정신이 되돌아오며 나의 전두엽을 힘껏 걷어찼다. 화들짝 놀라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다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렸다. 으어억, 크어억. 으어억. 잘 들어보니 사람 소리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신중하게 아래를 슬쩍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으어억’ 울더니 달아났다. 남기고 간 울음소리가 섬뜩한 메아리의 잔상을 남겼다. 으어억, 크어억.

힘이 쭉 빠져 손을 내리다가 하마터면 위쪽에 매달아둔 배낭을 떨어뜨릴 뻔했다. 배낭 안에는 방주에 실릴 예정이었던, 데이터 카탈로그 형식으로 보존 처리된 유전자 샘플의 일부가 들어있었다. 피로와 채 가시지 않은 흥분이 잔여물처럼 남긴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가슴 한구석이 몹시도 뻐근했다. 한 끗 차이로 우제목(偶蹄目) 포유류의 카탈로그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손에 땀이 찼다. 울음소리 하나로 자기 친척들의 유전 정보를 몰살하는 고라니라니, 멸종의 원인으로는 좋은 역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전원이 들어온 율라가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빈정거렸다. 답하지 않고 전원을 내렸지만, 내심 율라의 말을 인정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관둘 수도 없고. 갈 길은 한참 남았고 거기까지 걷기 위해선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잠들어야 한다. 무너진 길 위에서 수면 부족으로 비실대다 쓰러지고 싶진 않으니까.

6일 차 8:30

“우리는 저 너머의 무한을 쫓는다.” 얼마나 그럴싸한 말인지. 이 문장에 꼭꼭 담긴 낭만과 바깥세상에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지구가 보이는 멸종의 징후들로 인한 불안감이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방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 방주. 세상을 덮은 홍수 속에 세상의 생명을 싣고 떠다닌 방주 말이다.

이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방주는 DNA 추출이 가능한 생명체들의 유전 정보를 최대한 많이 실어다 우주 밖 식민지로 이주시키는, 세계적인 공동 프로젝트였다. 잡음이야 많았지만, 간신히 모이는 데에 성공한 것은 저 너머에 우리의 족적을 남기고 나아가서 더 많은 곳에서 번성하고자 하는 신기루 같은 꿈 덕분이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21세기 초쯤 발견된 행성 K2-18b는 점진적인 연구 끝에 지구와 유사한 대기 성분을 지닌 초기 원시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방주 프로젝트가 염두에 두었던 총 12개의 지구형 행성 중에서 최종 낙점이 된 것도 그곳이었다. 도착지가 지구에서 110광년이 떨어져 있다는 건 당시에는,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이 인류 문명의 눈부신 황금기가 선사하는 영광으로 가려져 있던 시점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사람들이 따라가기도 어렵게 달음박질쳐 뛰어가는 기술의 진보는,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말이다.

이 프로젝트에 몰렸던 전 지구적 관심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방주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게 이야기의 희극적인 면일 것이다. 비극 아니냐고? 너머의 무한에 눈이 멀어 저 밖만을 꿈꾸느라 자신들이 발 디디고 선 땅을 고갈시킨 존재들이, 결국 그로 인해 도래한 재앙으로 끝나는 중인데 그게 퍽이나 희극이 아니면 무엇일까. 재밌는 일이다.

농담이다. 별로 재밌지 않다. 바깥을 꿈꾸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모든 걸 쏟을 시간에 대멸종을 막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었다면 프로젝트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온갖 재난으로 문명이 먼저 무너질 일은 없었겠지. 잠깐이나마 즐길 수 있었던 인류의 황금기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따져보자면 턱없이 짧았다. 기후 이변이 먼저였고 그에 따른 천재지변은 그다음이었으며 폭동과 사회의 괴멸, 생물들의 빠른 멸종과 돌연변이의 출현이 연이어 줄을 이었다. 순식간이었다.

문명과 사회가 차례로 궤멸하는 와중에도 방주 프로젝트의 연구원들은 어떻게든 일을 수습해보려 애썼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들은 이미 재앙이 일어나기 수 년여 전, 인류가 마지막 황금기를 누리던 시기에 소수의 정예 인원을 뽑아 냉동 수면에 들게 한 뒤 K2-18b로 향하는 우주선에 선발로 태워 보낸 상태였다.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정착지를 준비하고, 나중에 도착할 유전자 카탈로그의 복원을 맡은 인원들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멈춘다면 그들은 머나먼 K2-18b에서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샘플들을 기다리다 외로이 죽어갈 게 자명했다. 지구에 남아있는 대다수 생명체도 다음 빙하기를 넘기지 못하고 절멸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주 식민지에 대한 선망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이제 지구 출신 생명들의 계보와 기록를 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남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가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느냐의 문제.

많은 수의 연구원이 자발적으로 남아 분야와 관계없이 힘을 합치고 애를 썼다. 나중엔 애초 프로젝트 인원이 아니었던 사람들이나 학부 과정에 있는 학생들까지 소개에 소개를 타고 모여 힘을 합쳤다. 우리가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에 뛰어든 이들, 사명감이나 책임감을 가진 이들, 그리고 나처럼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와 휘말린 이들이 섞여 있었다. 모두의 목적은 같았다. 프로젝트의 완주.

방주와 관련된 수많은 분야 중 우리 연구동이 맡은 건 DNA 수집 및 보존 분야였다. 수집한 유전자 샘플들을 분류, 정리, 복원하여 방주에 태울 유전자 카탈로그와 데이터 지도를 제작하는. 원래는 아시아에서도 일부 지역에 한정된 작은 지부였으나, 재해 직후 와해된 다른 지부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타지역의 데이터를 들고 합류한 덕에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호주 등지의 유전자 샘플도 조금씩 추가되었다. 우리는 다 같이 악전고투한 끝에 샘플 카탈로그를 일부나마 완성할 수 있었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한 성과였다.

자체 완주를 선언한 뒤 아껴두었던 식량 창고를 털어 뒤풀이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 국적과 정체성과 연령을 초월한 기쁨의 장이었다. 이제 남은 건 발사뿐이었으나, 문제는 우리가 있던 연구동과 방주 발사 시설 간의 거리였다. 방주는 처음부터 여러 대를 쏘아 올리도록 기획되어 있었으므로 아시아에도 몇 개 도시에 걸쳐 방주 발사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쪽에 남은 발사 시설 중 가장 가까운 시설은 내륙으로 제법 올라가야만 있었고, 발사를 담당한 팀이 우주선을 바로 이륙시킬 수 있게 준비해놨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들이 포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다른 곳에서 합류한 연구원들이 다른 대륙의 발사 시설 몇 곳은 완파되었다는 풍문을 전해주곤 했으니까. 장거리 통신은 꽤 오래전에 끊겼다. 우리가 지닌 단말의 신호는 우리 지역의 발사 시설까지는 닿지 않았으므로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모두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당장은 마시기로 했으며, 몰려오는 평온과 중대한 일을 끝내고 나면 몰려오는 해방감이며 허탈함 속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 모두가 자고 있던 연구동이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무너지던 순간, 나는 내 단말에 내장된 율라와 함께 밖에 나와 있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