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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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는 숨을 뱉으며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긴 생머리가 바람에 날려 하늘거렸다. 은미는 언니의 새하얀 팔목을 바라보다 자신의 까무잡잡한 손등을 원망스레 쓸어내렸다.

“언니, 그 집 되게 크다며?”

“응, 한 번 들어가 봤어. 아버님은 못 뵀는데, 굉장히 엄하시대.”

“무섭겠다. 그런데 언니, 회장님을 아버님이라 자연스럽게 부르네?”

은해는 부끄러운 표정을 감추려 가슴을 핸들에 붙인 채 창밖을 살폈다. 담장은 육중한 몸뚱이를 바닥에 묻은 채 골목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정오를 바라보는 가을 햇살이 빗각으로 날아와 담장의 허리를 잘랐다.

“언니, 왜 그렇게 쫄고 그래?”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되네.”

“왜 형주 오빠는 자기도 없는데, 집으로 초대한대? 아무리 오빠네 아버지가 언니를 보고 싶어 한다 해도 그렇지…….”

은미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무릎을 끌어당겼다.

“오빠가 외국 출장인데 어떻게 해? 그리고 아버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데, 안 갈 수 없잖아.”

“좀 늦추지 그랬어? 언니 바쁘다 그러고.”

“돌아오자마자, 결혼 준비로 바쁠 거야. 늦추긴 뭘 늦추니?”

“어이구, 언니! 결혼하니까 좋지? 그래서 바쁜 나까지 데리고 온 거야? 나 잡지사에 가봐야 한단 말이야.”

“금방 얘기하고 나올 거야. 그리고 너도 같이 간다고 얘기했으니까, 어색할 거 없어.”

“누가 어색하대? 왜 죄 없는 나를 끌어 들이냐고.”

은해는 오른쪽 골목으로 차를 돌렸다.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담장의 높이가 아득해졌다. 오래된 성벽처럼 굵직한 덩굴이 담장을 기어 내려왔다.

“좀, 같이 가주면 안 돼?”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회장님만 계신 거야? 그 큰집에?”

“어? 응…….”

“무섭겠다. 형주 오빠는 외아들 맞지? 그럼 언니는 삼명그룹의 유일한 며느리가 되는 거네. 좋겠다.”

“별로……. 부담 가.”

은해는 몰랐다. 형주의 훤칠한 키와 파운데이션을 바른 듯한 피부에서 귀티가 풍겼지만, 이렇게 대단한 집안사람일 줄은 몰랐다. 1년을 사귀고 형주가 프러포즈한 날, 형주는 품 안의 은해에게 자신은 삼명그룹 사람이라고 속삭였다.

은해는 단지, 뉴스에 자주 나오는 회사가 형주의 입에서 나온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냥 오빠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형주의 하얀 어깨에 매달려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히야……. 언니가 이제 여기 사는 거야?”

“아마.”

“좋겠다. 그런데 좀 무섭기도 하겠다. 집 되게 클 것 아니야.”

새까만 외제차가 은해의 밴을 지나치며 햇살을 반사했다. 은미는 눈을 찡그리면서도 우와, 하며 입을 벌렸다.

“그런데, 언니. 내가 같이 가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회장님이랑 단 둘이 얘기하는 게 좋잖아. 뭐, 일하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몇 두고 있을 테지만……. 이거 정말, 집 대단히 큰 거 아냐? 사진 찍어서 잡지에 실어야겠다. 아, 언니 사진도 넣어야지. 삼명그룹 며느리,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 괜찮지?”

은미는 은해의 어깨를 툭 쳤다.

“됐어. 사고나 치지 마.”

벽돌 촘촘한 담장이 은해의 동공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담장에 붙여 차를 세우고 달아오른 볼을 식히려 한쪽 손바닥을 뺨에 댔다.

“여기야? 정말?”

은미는 앞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담장의 높이를 가늠했다. 5층 높이 정도 될까? 탄성이 절로 튀어 나왔다.

“언니, 이렇게 큰 집에서 회장님이랑 단 둘이 얘기하는 거야? 와, 대단하다.”

은해는 시동을 끄고 숨을 한 번 내쉰 뒤, 말했다.

“어머님도 계신데…….”

“뭐? 어머님 돌아가셨다 그랬잖아.”

*

관상목으로 둘러싸인 벽돌 길을 지그시 밟으며 은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미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깎은 돌로 둘러싸인 연못은 쑥색 덩굴이 넘어 들어가 발을 담갔다. 비틀 듯이 올라간 나무줄기에선 금방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 뒤로 솟아 오른 아름드리나무는, 정원을 벗어나려는 듯 담장 위로 줄기를 뻗었다. 은미는 고개를 들어 나무 높이를 가늠하다 은해를 따라 총총 달려 현관문 앞에 섰다.

육중해 보이는 현관 문 앞에 노인이 둘을 반겼다.

“아가씨 오셨네요. 옆에 계신 미인은 동생인가요?”

“네, 얘는 은미라고 해요. 은미야, 인사해. 집사님이셔.”

허허, 노인은 눈가의 실주름을 깊게 그리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은미는 꾸벅 인사하고 운동화를 벗었다. 은해가 벗은 구두 옆에 가지런히 놓은 후, 약간 떨어져 둘의 뒤를 걸었다.

노인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말했다.

“응접실에서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생님? 회장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가?’

은미는 은해를 따라잡아 눈짓을 보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치, 한마디 뱉고는 암갈색의 복도 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높은 천장에 간헐적으로 매달린 금빛 샹들리에가 은미의 눈동자 속에 아른거렸다.

복도 벽에 붙박이 장식장 앞에 은해는 걸음을 멈췄다. 노인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은해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게 사모님입니다. 그리고 이게 회장님의 아버님, 어머님. 삼명그룹은 회장님의 아버님이 일으켰죠. 저는 그때, 운전기사 겸 비서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집사로 일하고 있고요. 그리고…….”

은해는 형주의 어머니 사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인공적인 미소가 짙은 립스틱 사이에 걸려 있었다. 커다란 진주귀걸이와 목걸이, 위로 말아 올린 80년대 머리스타일에서 귀부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사모님은, 암으로 돌아가셨죠. 이제 거의 십 년도 더 되어갑니다.”

“언니, 아까 한 말…….”

은해는 동생의 말허리를 잘랐다.

“선생님이 기다리신다고 하셨죠?”

노인은 슬쩍 웃고 앞장서 걸었다. 은미는 콧등을 긁적이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보다 예쁘네, 입술을 삐죽이 내민 채 둘의 뒤를 따라 살금살금 걸었다.

“여기가 응접실입니다.”

영화에서 봄직한 기다란 테이블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테이블 끝에 피둥피둥 살찐 남자가 기름진 미소로 은해를 반겼다. 노인은 의자를 당겨 은해를 앉게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은해 씨라고 했죠? 형주가 사진 보여줬습니다. 실물이 훨씬 예쁘네요.”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은미는 문을 나가는 노인을 힐끔 본 뒤, 의자를 빼 앉았다. 남자의 시선을 살피며 인사한 후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쳤다.

“동생 맞죠? 잡지사에서 일한다고 했나요?”

“네.”

은해는 은미의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살짝 포겠다.

“이 분은 형주 오빠 집안의 주치의 선생님이셔. 회장님의 후배시래.”

아, 은미는 고개를 반쯤 입을 벌린 채 끄덕였다. 은해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도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멋지세요.”

남자는 한쪽 볼에 송송 새어나온 땀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보톡스랑 이것저것 좀 했습니다, 허허. 동기 중에 피부과 하는 놈이 있는데, 끌고 가더니 놓아주더라고요. 나중에 은해 씨랑, 은미 씨도 같이 가죠. 이제 내가 두 분도 삼명그룹 사람인데, 제가 책임져야죠.”

은미는 토끼눈을 뜨고 활짝 웃으며,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말이죠? 신난다. 요즘 가뜩이나 눈주름 때문에 고민했는데.”

“선생님,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형주 오빠가 그냥, 집에 가보라고 해서 준비도 잘 못했네요.”

남자의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

“숨 좀 돌리세요. 뭐, 급할 것도 없는데요. 회장님은 아랫방에서 링거 맞고 계십니다.”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에요. 그냥 영양제 맞으시는 거예요. 은해 씨 처음 봐서 회장님도 떨렸는지, 안정제도 한 알 달랍디다.”

허허, 남자는 먼 쪽 팔걸이로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은해와 은미의 웃음이 뒤따랐다. 그 사이 아주머니 한 명이 들어와 오렌지 주스를 놓았다. 일하는 사람이겠지, 은미는 아주머니의 깊게 파인 팔자주름을 보며 생각했다.

남자는 목주름에 고인 땀을 손수건을 닦아낸 뒤 주스를 들이켰다.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의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은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형주 오빠가 말을 자세히 안 해 줘서요. 집에 가서 어머님 뵙고 오라는데 무슨 말일까요?”

주스를 내려놓은 남자는 수읍 하고 입술가의 잔해를 빨아마셨다.

“아, 사모님 말씀이시군요. 여기 지하에 위패를 모셔놓았거든요. 거기에 인사하고 오라는 뜻이에요. 조금 있다가 같이 내려갔다 올 겁니다.”

주스 바닥을 보던 시선이 은미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어이쿠,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은해 씨 같이 회장님 뵈러 가죠. 그리고 은미 씨는…….”

“저는 괜찮아요.”

“집 구경 좀 하고 계세요. 곳곳에 재밌는 것들이 많을 겁니다. 집사님!”

남자는 노인을 부르며 손뼉을 한 번 쳤다. 문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말 끝나기 무섭게 남자 옆으로 다가와 섰다.

“은미 씨 데리고 집 구경 좀 시켜주세요. 그리고…….”

남자는 시계를 다시 쳐다보았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니까, 아로마 방 있죠? 거기서 몸 좀 쉬게 해 주세요. 기자 생활이 쉬운 게 아닐 텐데.”

남자가 은미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은미는 언니의 눈치를 살피다 노인의 옆에 섰다.

“은해 씬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는 은미와 집사가 시선에서 사라진 다음, 힘겹게 일어섰다. 그는 응접실 구석 벽에 손을 올렸다.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리며 새로운 복도가 나타났다.

“이리 와요.”

은해는 조심스럽게 복도에 발을 올렸다. 사슴 흉상들이 양쪽 벽에서 눈깔을 번뜩였다.

“여기는…….”

“내실입니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곳이죠. 가족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에요.”

“지금, 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남자는 멈칫 하며 허리를 굽혔다. 무릎에 손을 얹어 몸무게를 지탱한 채 손수건으로 목주름의 땀을 닦아냈다. 희미한 쌕쌕거림이 숨결에 묻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아, 그리고…….”

남자는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말했다.

“회장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

은미는 노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수많은 액자가 복도를 장식하고 있었다. 바닥을 닦던 아주머니가 일어서더니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각별히 신경 좀 써주세요.”

아주머니는 네, 작게 말한 뒤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노인은 아주머니를 지나쳐 걷다 비너스의 얼굴 조각이 달린 문을 당겼다.

은미는 방으로 들어가며 우와, 우와 하고 참새처럼 놀랐다. 커다란 창으로 스며들어온 햇살이 호화스러운 욕실에 닿았다. 바닥에 박힌 커다란 욕조에는 빨간 꽃잎이 한가로이 떠다녔다.

벽을 둘러싼 엔틱 가구들은 자랑스럽게 몸뚱이를 반짝였다. 음악처럼 흘러드는 장미향에 취해 은미는 잠시 딴 세상에 온 듯 몽롱함을 느꼈다.

“편하게 즐기시고, 끝나시면 인터폰으로 말하시면 됩니다.”

“네? 저는 그냥…….”

“회장님이 부탁하신 거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노인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방을 나갔다.

그냥 언니를 따라 온 것인데, 이래도 되나……. 그것도 언니 사돈집인데…….

금빛 테가 둘린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회장님의 호읜데 받아들여야지. 내가 언제 이런 곳에서 목욕을 해보겠어?”

자랑할 요량으로 카메라에 방을 담을 뒤, 욕탕을 살짝 두른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이 안 계시다니요?”

“음……. 회장님은 지금 안성 공장 부지를 둘러보러 가셨습니다. 아시죠? 그쪽에 새로 공장 짓는 거.”

“네, 형주 오빠한테 얼핏 들었어요.”

남자는 가슴 사이 고랑에 묻었던 손을 내렸다.

“이제야 진정이 되는군요. 걸으며 얘기합시다.”

“그럼, 저는 누굴 만나러 가는 거죠?”

“그것보다 먼저, 삼명그룹에 대해서는 잘 아세요?”

“그냥 신문에 나온 것 조금요. 잘은 몰라요.”

“삼명그룹은 여러 분야에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아버지 때부터 물류 부분을 중점적으로 했지만, 그것 말고도 바이오산업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죠.

그래서 삼명 바이오라는 연구소를 대덕 단지에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대단한 연구 성과를 이뤄냈죠. 그것을 발표할 즈음에 회장님의 아버지가 뇌출혈을 일으킨 거고요. 그 후 기술은 사장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기술이란 것이…….”

남자는 복도 중간에 멈춰 숨겨진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조그만 방이 나타났고 한 쪽 벽에 엘리베이터 입구가 보였다.

“어떤 액체에 대한 겁니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것 있죠? 공기 대신 액체를 사용하는 거 있잖아요? 「어비스」라는 영화에도 나오는데.”

“본 적 있어요.”

“그럼 이해가 쉽겠군요. 삼명 바이오는 그런 액체에 대해 연구했어요. 그러다 개발한 액체에서 세포의 사망이 무한대로 지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세포에는 자신의 죽음을 만들어내는 디엔에이가 있는데, 그 부분을 액체가 변화시키는 거죠.”

남자는 버튼을 툭 눌렀다. 윙, 소리와 함께 바닥의 울림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였어요. 메커니즘도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거든요. 연구 목적은 그냥 액체 산소에 관한 것이었는데, 뜻밖에 일이 벌어진 거니까요.

큰 회장님은 성과에 열광하셨죠.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실에 들락거리셨습니다. 그 자신이 연구원이 된 것처럼요. 그게 무리였던 거예요. 결국 쓰러지셨고요. 자,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 벽은 녹슬어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은해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며 핸드폰을 슬쩍 살폈다. 안테나 표시가 뜨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하강했다.

“그 분의 부인도 그 즈음에 돌아가셨고요. 어쨌든, 액체를 사용할 때가 온 거죠.”

‘액체를 사용한다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정체불명의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땡, 갈라지는 문 사이로 음산하면서도 폐쇄적인 느낌의 복도가 나타났다.

“우선 내리세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쪽에 의료기구들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수영장 옆을 지나는 것처럼 공기가 습했다.

은해는 엘리베이터의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액체를……. 큰 회장님이 사용하셨습니다. 큰 회장님 유언이었죠. 뭐, 유언이라 하기도 뭣하지만요.”

남자는 입을 벌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유언에……. 아니, 그건 방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하라 그런지 발바닥이 차가웠다. 은해는 한쪽 발바닥을 다른 쪽 발등에 올렸다.

“어서 오세요. 다 왔습니다.”

남자는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밀도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는 어둠에 몸을 밀착시키며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빛을 뱉어냈다.

은해는 반 발자국 물러섰다.

“이게…….”

은해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는 흐뭇한 듯 가슴을 폈다.

“말하자면, 거대한 수족관이죠.”

3층 높이 정도는 될 법한 커다란 방이었다. 한쪽 면을 차지한 유리벽은 압도적인 크기였다. 그 너머 반투명한 액체가 생명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물빛은 심해처럼 검었다.

“삼명 바이오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발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기술을 따라갈 곳이 없죠.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들어오세요.”

은해는 한 걸음 들어선 후, 숨을 토해냈다. 나가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순간 유리벽 중간 부분에 검은 얼룩이 눈이 들어왔다.

“안에는……. 혹시…….”

“큰 회장님이 있습니다.”

남자는 또 하나의 스위치를 올렸다. 수족관 바닥이 빛을 뱉어내자 유리벽에 붙은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라 같은 나체의 노인이 튀어나온 동공에 은해를 담고 있었다.

“큰 회장님이십니다.”

남자는 수족관 안쪽의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은해도 덩달아 인사했다. 큰 회장은 얼굴을 갸우뚱 하더니, 물 안쪽으로 녹는 듯 사라졌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안에는, 큰 회장님 사모님과 회장님 부인도 계십니다.”

“오빠의 어머니요?”

“그렇습니다. 암 말기 선고를 받은 다음 날, 액체 속으로 들어갔죠. 다행히,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도련님의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은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죠. 뭐, 죽기 직전에 액체로 넣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진 못했습니다. 머릴 다쳤거든요. 지금은 물속에서 여섯 살 그대로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들어가면, 다리에 매달릴 테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들어……. 가다뇨?”

“큰 회장님 유언입니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액체로 들어와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요. 생전에 유머감각이 풍부한 분이셨죠. 그래서…….”

순간 남자는 가슴살을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 괜찮습니다. 잠을 잘 못 잤더니, 근육이 결려서 그렇습니다.”

“불편하신 것 같은데요.”

은해가 부축하려 하자 남자는 괜찮다며 허리를 폈다.

“사모님도, 그러니까 형주의 어머님도, 결혼 전에 액체로 들어갔습니다. 십 분 정도 만남의 시간을 갖고 나왔죠. 결국 죽기 전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지만요.”

은해는 허벅지를 문질렀다.

“그러면……. 안쪽에는.”

불빛에 닿은 액체는 녹색으로 빛났지만, 깊은 쪽은 안개에 가린 듯 검고 뿌옜다.

“네 명이 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몇 십 년 더 사실 것 같습니다. 저분들의 생활은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우선 대화가 불가능하죠. 물속에서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서로 몸을 더듬는 것으로 대화를 대신합니다. 은해 씨도 안으로 들어가면 말을 못하게 되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마주보고 서 있기만 하면 할 일 다 한 겁니다. 그러면 며느리의 자격이 주어지는 거지요.”

“저분들은……. 평소엔 뭘 하시나요?”

“우선 빛을 싫어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죠. 회장님이 안쪽에 키보드를 설치하셨는데, 별로 사용은 안 하십니다.

그냥 누워서 시간을 보내거나, 기어 다니거나 걸어 다니거나 하는 거죠. 액체에 의해서 뇌의 일부가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아직 모릅니다.”

은해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몇 분 들어가 있다고 해서 별 영향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들어가라 권하지도 못하죠.”

남자는 손가락으로 방 옆에 달린 작은 문을 가리켰다.

“저곳이 탈의실입니다.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탈의실에 샤워실도 있으니까, 들어갔다 오시면 몸도 씻을 수 있고요.”

은해가 머뭇거리자,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해 씨 걱정 마세요. 제가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큰 회장님과 사모님들, 다 좋은 분이십니다. 좋은 만남이 될 거에요. 도련님, 어머님도, 얼마나 며느리가 보고 싶으시겠습니까?”

“별……. 문제는 없겠죠?”

어느새 은해는 정성들여 칠한 립스틱을 삼키고 있었다.

“당연히 없습니다. 사모님을 뵙고 나오면 도련님도 기뻐할 겁니다.”

은해는 머뭇거리다 탈의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아 참, 별 것 아닌데……. 액체 안에 이십 분 이상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폐 세포에 변형이 일어나서 대기의 산소를 흡수하지 못하게 되죠. 제가 시간을 살피고 나오게 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걱정 마시라니까요. 이십 분은 꽤 긴 시간이에요.”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