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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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꾸는 꿈은 언제나 흑백이었다. 언제였던가, 강은 예술가들이 컬러 꿈을 많이 꾼다는 토막글을 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 예술의 재능이나 예술적 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술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허세, 변덕, 사치, 공상 같은, 그야말로 ‘개꿈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강은 자신이 현실적인 인간이기에 예술가들 같은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강의 생활은 예술가와도, 예술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27세에 한 중소기업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48세가 된 지금까지 같은 회사의 인재개발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사이 회사의 몸집은 커졌다. 일 년에 두세 번은 산더미 같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살펴보아야 했고, 같은 수의 증명사진들을 확인해야 했다.

강의 인생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이 있다면 이력서에 붙여 보내오는 증명사진들이었다. 비록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찍어내기는 했지만, 머리가 짧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긴 사람도 있었고, 까만 정장을 입은 사람이 있으면 갈색이나 회색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간혹 지나치게 컬러풀한 옷을 입거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사람의 사진도 있었는데, 강은 그런 사진이 붙은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는 확인도 하지 않고 탈락시켰다.

색을 몸에 지닌 사람들은 색이 들어간 꿈을 꾼다는 소위 예술가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남다름이란 강에게 매력이 아니라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남과 다르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자신을 뽐내는 것이다.

강은 평범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야말로 조직에 무사히 적응하여 무난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동의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은 만족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예술적인 활동은 일 년에 두세 번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한두 번은 아내와 단 둘이, 또 한 번은 아들도 함께였다.

아내와 함께 관람하는 영화는 두 남녀가 여행길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로맨스이기도, 묘령의 살인마가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죽이며 돌아다니는 스릴러이기도, 원한에 찬 귀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리는 심령물이기도 했다.

아내와 영화를 보는 날이면, 강도 나름대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가끔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도 있었지만, 그는 금세 유쾌한 마음으로 의혹을 털어냈다.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이고, 아내와 자신은 그런 지어낸 이야기에 혹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과 영화를 보는 날이면 강의 마음은 영 꺼림칙했다.

아들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마법을 쓰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 공룡이나 괴물, 요정이 등장하는 영화,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에서의 전쟁이며 모험을 그린 영화를 좋아했다.

강의 아들뿐만 아니라, 강의 아들과 비슷한 나이, 혹은 조금 더 많거나 적어 보이는 아이들은 제각각 부모나 보호자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강의 속은 영 불만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게임이니 만화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푹 빠져 사는데 영화까지 그러면 아이들 생각이 허무맹랑해지지 않겠나?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 손을 잡고 극장으로 데려와 그런 것을 보여주고 부모 노릇했다며 좋아하는 것이 유행이니 원.

어릴 때부터 그런 거나 보며 자라니까 요즘 어린 것들이 같지 않은 쇼맨십에 물들어서 어디서든 튀려고 안달복달하는 거야.

요즘 옛날보다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지 아나? 바로 그렇게 튀려는 놈들 때문이야. 사회적 룰을 지키면서 살면 피해자가 될 일도 없고 가해자가 될 일도 없는 게 세상이야. 억울하다고 징징거리는 놈들은 늘 모난 돌들이지.”

“하지만 과장님도 결국 아드님 데려가신 것 아닙니까.”

“애가 워낙에 보고 싶어 하니 별 수 있나. 마누라 혼자 데리고 가라고 하면 아버지 노릇 못한다고 성질을 부리니.”

“상상력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대잖아요. 어릴 때나 그런 걸 진짜라고 믿고 살죠. 우리도 어릴 때는 그런 거 많이 믿었잖아요?”

점심 식사 후, 회사 복도에 나란히 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말에 응대하는 이 대리에게 강은 속으로는 화를 냈다. 강이 보기에 허황된 것을 진짜라고 믿는 것은 비단 아이만이 아니라 이 대리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리가 폐가 탐방 동호회와 카트 레이싱 클럽에 가입해 있다는 것, 심령사진이며 괴담을 스크랩해 인터넷에 올리는 취미가 있다는 것은 회사에서도 제법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한 것을 물으면 이 대리는 “재미있잖아요.”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강은 그 말에 수긍하는 사람들도 영 탐탁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쓸데없는 일에 우르르 달려드는 것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재미있는 것, 허무맹랑한 것, 눈속임 같은 것에 불을 켜고 뛰어드는 것은 강에게 있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인물에 대한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강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다. 강은 속으로 이 대리가 언제고 그런 취미 때문에 봉변을 당하기를 바랐다.

“요즘 연쇄살인 사건 때문에 흉흉한 것 같아요. 아직 범인이 안 잡혔다던데.”

둘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박이 화제를 돌렸다. 언론에서는 연일 최근 일어나고 있는 무차별 연쇄살인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소위 ‘퍽치기’가 벌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살인 사건은, 여자는 물론 노인이나 술취한 남자까지도 범행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강의 생각은 달랐다. 연쇄살인범은 무차별 살인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여자나 노인이 밤거리를 다니는 것부터가 문제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술을 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남들이 터부로 여기는 행위를 굳이 멋이라고 여기며 행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일도 없다는 것이 강의 생각이었다.

죽음의 위협을 쏙쏙 피해가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는 그래서 유해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이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과 같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불쾌했다.

영화에 나오는 악역에 공감하여, 타인을 해하는 입장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허황된 것은 무엇이든 옳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강은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욱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강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강은 어리석지 않았다. 강은 허황된 믿음과 터부의 재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험은 강을 침범할 수 없었다. 강은 피해자가 되지도, 가해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 대부분의 올바른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강은 휴게실 의자에 놓여 있던 스포츠 신문을 들어 얼굴을 묻음으로써 살인마에 대한 지루한 대화에서 빠져나왔다. 펼쳐든 신문 아래쪽에는 금주의 로또 예상 번호가 있었다. 강은 여섯 개의 숫자를 입으로 조그맣게 외웠다. 갑자기 박 주임이 쑥 끼어들었다.

“뭐 보십니까? 로또 번호 고르세요?”

“로또는 무슨. 나는 그런 것 안 해.”

“저는 가끔 합니다. 일주일간 희망을 얻을 수 있잖아요.”

박 주임은 히히덕거렸다. 강은 헛기침을 하고 신문을 한 장 넘겼다.

즉, 강의 인생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다채로운 요소는 증명사진이었으며, 가장 허구적인 행위는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은밀한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복권을 사는 것이었다. 요행에 기대를 걸어보는 이 ‘비현실적인’ 취미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강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따라서 항상 남모르게 복권을 샀다.

강은 젊은 날부터 늘 주택복권만을 샀지만, 로또라는 스케일 큰 복권이 나온 뒤로는 늘 로또를 주마다 이삼천 원 어치씩 샀다. 몇 번인가 하위 등수에 당첨된 적도 있었다.

은행에서 팔만 몇 천 원인가를 받아 나온 날에는 세상의 채도가 달라 보여, 이것이 소위 예술적인 감흥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복권을 살 때만큼은 자신이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강은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돼지꿈이나 용꿈, 똥꿈, 대통령꿈 같은 ‘복권꿈’을 꾸어 보고 싶었다. 워낙 꿈을 잘 꾸지 않는 만큼, 어쩌다 그런 꿈을 한 번 꾸면 그 주의 복권 일등 당첨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끝나간다. 헛소리들은 그만하지. 살인마고 로또고 다 우리랑은 관계없는 일들 아닌가. 무난하게 살면 화도 피해가게 되어 있는 법이야. 다들 사무실로 들어가자고.”

강은 짐짓 신문을 내팽개치며 이 대리와 박 주임을 향해 말했다. 이 대리와 박 주임은 종이컵을 던지고 머쓱한 표정으로 강의 뒤를 따랐다.

*

그날 밤, 실로 몇 년 만에 강은 꿈을 꾸었다. 강이 그토록 생생한 꿈을 꾼 것은 처음이었다. 강의 꿈속에는 희끄무레한,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생기다 만 그림자처럼 흐릿했고, 목석처럼 서 있는 그것이 사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강은 꿈속에서 그를 당연히 사람이라고 여기며 가까이 다가가고자 걸어갔다.

바로 앞에 선 다음에야 강은 그 인물의 흐릿한 얼굴에 숫자만이 또렷하게 쓰여 있음을 알았다. 모두 여섯 개의 숫자였다.

1, 4, 9, 13, 27, 33

“이게 뭡니까?” 강이 물었다. 인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인물에게서, 아니, 인물이 서 있는 근처 어딘가에서 아주 느릿느릿하고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말소리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처 그 내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강은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아이고, 하나도 못 들었는데.’ 강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기분은 곧 가셨다. 잠에서 깨어나 의식이 명확해지자, 강은 이 꿈에서 중요한 것이 듣지 못한 목소리가 아니라, 숫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숫자 여섯 개가 나오는 꿈이라면 그 유명한 복권 당첨 꿈이 아닌가? 복권 꿈 중에서도, 당첨 숫자를 알려 준다는 가장 좋은 꿈임에 분명했다.

꿈에서 본 숫자는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강은 지난 하루를 되짚어 보았고, 점심시간에 로또 번호를 외었던 것을 떠올렸다.

꿈은 그저 공상이 아니라 무의식이 가르쳐주는 미래라더니, 그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강은 생각했다.

회사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었지만 강은 일부러 동네 명당 복권 판매소에 찾아가 복권을 샀다. 꿈에서 본 숫자 여섯 개를 체크했음은 물론이다.

‘1등 당첨 복권 판매소, 행운 팡팡! 행복 팡팡!’ 요란한 글씨체의 피오피가 붙어 있는 판매소의 노파는 행운이나 행복과는 가장 거리가 먼 얼굴로 강에게 복권 영수증을 건넸다. 당첨 발표는 토요일 저녁이었으므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강은 좀이 쑤실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아니길 다행이라고 여겼다.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먼저 생각하는 강으로서는, 그 꿈이 개꿈일 가능성을 오기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권꿈은 무슨, 역시 꿈은 그냥 다 개꿈이지! 그렇게 중얼대며 복권 영수증을 꾸깃꾸깃 구겨 버리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기를 백 번은 되풀이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녁 8시가 넘었다. 아내는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설거지를 마쳐야겠다며 부랴부랴 부엌으로 들어갔고, 아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강의 행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강은 채널을 돌리는 척하며, 막 시작한 복권 추첨 프로그램에 주목했다. 남녀 한 쌍이 나와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것도 잠시, 곧 숫자를 적은 공들이 기계에서 굴러 나오기 시작했다.

기계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숫자를 적은 공을 들어 보였다. 부풀어 올랐던 강의 마음속 풍선이 쭈그러드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오늘의 첫 번째 당첨 숫자는 12입니다.”

꿈에서 본 여섯 숫자 중에 12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아쉽지만 3등만 되어도 그것이 어디인가?

“두 번째 숫자는 5! 세 번째 숫자는 23입니다.”

벌써 세 개나 빗나갔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우습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종일 만일에 대비해 상상해 온 비참한 자신의 모습은, 닥쳐온 현실에 비하면 훨씬 고상한 것이었다.

강은 자신이 눈물까지 흘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토록 미신이며 판타지, 허무맹랑함을 비웃어 왔는데, 고작 꿈 찌꺼기 하나에 놀아나 하루 내내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고 생각하니, 누구에게 알려진 것도 아님에도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의 당첨 수에서 강이 꿈에서 본 여섯 숫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강은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일요일까지만 해도 우울하여 조금 풀이 죽어 있었지만,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해서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만일 진짜 의미가 있는 꿈이었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교훈을 남기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숫자 꿈은 이미 강의 뇌리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출근길에 강은 다시 그 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있는 강의 눈에, 한 여자의 독특한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냥 얼핏 봐서는 갈색의 얇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생머리를 길게 기른, 특이할 것 없는 차림새의 여자였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우울감이 풍겼다.

월요일 출근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우울감도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이마가 시선을 끌었다. 이마 위에 숫자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4’

강은 꿈에 나왔던 여섯 숫자 중 4가 섞여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강 이외에는 아무도 그 여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남달리 튀는 것이 요즘 것들 사이에 유행이라지만 저건 또 무슨 짓인지. 강은 혀를 쯧쯧 차고, 여자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반대쪽으로 슬쩍 돌렸다.

플랫폼에 도착해 강은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역 입구에서 들고 온 신문을 펼쳤다. 여자는 하필이면 강의 바로 옆 입구 지점에 섰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여, 강은 신문을 펼친 채로 이마에 4를 쓴 여자를 힐끔거렸다.

그때, 때르르르르 목젖을 울리는 듯한 신호음과 함께, 전철이 곧 도착할 것임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멀리서 전철의 헤드라이트가 어른거렸다.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헤드라이트가 내뿜는 빛이 눈을 찌르며 전철이 모습을 드러내자, 찰나의 순간에 여자가 선로로 뛰어들었다.

고막을 찢는 굉음이 땅 속 역을 꽉 채웠다. 전철은 급정거를 시도했지만, 여자의 목숨을 지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여자가 떨어진 장소를 순식간에 전철이 덮쳤다.

강은 채 신문을 덮지도 못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역사에 가득 찼다. 지하철이 멈춰 섰고, 역무원들이 달려왔다. 강은 확인하고 싶었다. 동시에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강 옆에 서 있던 한 노부인이 탄식했다.

“어머어머, 죽었나 보네. 죽었나 봐.”

강은 노부인의 말에 이끌려, 여자를 보고자 발돋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모를, 피비린내를 닮은 악취가 온통 강의 내부를 잠식했다.

강은 도망치듯 역사를 나왔다. 와이셔츠 등판이 식은땀으로 척척해질 지경이었다. 강은 역사 앞에 놓인 벤치에, 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잠시 앉아 있었다.

결국은 택시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늦게 회사에 도착했는데, 입사한 지 반 년이 된 신입사원 김이 새파란 낯빛으로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직원들 대부분이 김의 주변을 둘러싸고 심각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쾌했던 강은 그 모습이 무척 기분에 거슬렸다. 그는 책상에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업무 시간에 뭐하는 건가?”

“오셨어요, 과장님.”

“희연 씨 출근길에 누가 자살했대요.”

강은 그만 누그러졌다. 죽은 여자는 딱 김의 또래로 보였다. 그런 것을 보아버렸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희연 씨도 5호선인가? 나도 그 탓에 지각했는데.”

“과장님도 계셨어요?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여자 얼굴도 봤나? 이상하지 않았어?”

“저는 좀 멀리 있었어요.”

“이마에 아무것도 없었어? 숫자 같은 거 말이야.”

“숫자요? 저는 얼굴을 못 봐서요.”

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의, 천진하고 불안한 표정의 김을 보고 있자 아까와는 다른 피곤함이 몰려왔다. 무릎의 힘이 풀리는 것 같아 강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이러려고 그 꿈을 꿨나, 빌어먹을. 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액땜한 것으로 치고, 더 이상 그 꿈에 아무것도 관련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강은 출퇴근길, 식당, 지하철처럼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종종 이마에 숫자를 쓴 사람들을 발견했다. 4뿐만 아니었다. 그 숫자는 1이기도, 13이기도, 27이기도 했다.

가장 많이 보이는 숫자는 1이나 13이었고, 27이 그 다음이었다. 4는 그 여자 이후 보지 못했다. 33을 이마에 쓴 사람을 본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아내와 함께 한 저녁 산책로에서였다.

김과의 대화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는 숫자에 대한 말을 하지 않던 강도 아내에게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떠보듯이 물었다.

“저 사람 하고 다니는 것이 참 웃기지 않아?”

“뭐가? 티셔츠 색이 촌스럽긴 하네.”

“얼굴도 이상하잖아.”

“멀쩡한데 뭘. 그나저나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강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아내의 눈에는 이마의 33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숫자들은 모두 강이 꿈에서 보았던 숫자들이었다.

강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각각 다른 숫자들의 의미가 궁금했다. 또한, 이마에 숫자가 쓰인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4를 이마에 쓰고 있다가 자살한 여자를 생각해 보면, 그 숫자가 결코 좋은 의미일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뒤였다. 강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집에 없었다. 강의 아들은 엄마가 없는 틈을 타 평소보다 집중해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엄마 어디 갔니?”

“민호네 집에요.”

“왜?”

“몰라요.”

손을 바삐 움직이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아들에게 강은 부아가 치밀어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너는 어째 볼 때마다 게임만 하고 있냐. 아버지가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게임만 하니 헛생각, 잡생각만 머리에 들어앉아서 올바른 인간이 못 되는 거야.”

“아 갑자기 왜요. 게임하는 것도 공부예요. 현실에서랑 똑같이 많이 배운단 말이에요.”

“그렇게 총을 쏴대며 사람을 죽이는 게 현실이란 말이냐?”

“게임이니까 그렇죠! 아, 아빠 때문에 죽었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죽이려고 했는데 우리 길드가 계속 지네.”

강은 투덜거리는 아들 뒤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모니터를 넘어다보았다. 총을 들고 덤벼드는 아들의 적, 그리고 그들에게 덤벼드는 아들. 이런 게임에 빠져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고 사람을 죽이려 드는 놈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강은 서로 이마에 숫자를 써 넣으려고 덤벼드는 인간 군상을 상상했다. 그런 것을 상상하는 자기 자신이 싫어, 강은 기분을 망치고 말았다.

자신에게만 숫자가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강은 몰래 정신과에도 다녀왔다. 하지만 의사는 일시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졌을 뿐이며 뇌 활동의 영향 때문에 그런 환각이 보일 수가 있다는 말과 함께 약을 처방해 주었을 뿐이다.

약은 강을 시도 때도 없이 졸게 만들었다. 강은 그런 흐리멍덩한 기분이 질색이었다. 무엇보다도 약을 먹는 중에도 사람들의 이마에서 숫자가 보이는 증세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기에 강은 약을 먹는 것도 곧 그만 두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당신 퇴근했네.”

“민호네 집 갔었다며?”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두르는 종종걸음으로 강의 곁에 와 앉았다.

“당신, 우리 예전에 봤던 여자 기억해? 당신이 하고 다니는 거 너무 웃기다고, 얼굴 이상하다고 했던 보라색 티셔츠 입은 여자 말이야. 같이 산책하다가. 내가 그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그랬잖아.”

이마에 33이 쓰여 있던 그 여자를 강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닌 척했다.

“모르겠어. 내가 언제 그런 걸 일일이 기억했나.”

“하여튼, 그 여자가 민호 고모였더라고. 민호네 집 오가면서 어째 얼굴을 한 번 봤었던 것 같아.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글쎄, 근데 그 여자가 죽었다네.”

“죽어? 왜?”

“그게 말이야.”

아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강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살해당했대. 집에 강도가 들어서.”

강의 등에서 또다시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피하고 싶은 상상이 자꾸만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강은 부러 머리를 흔들었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4는 자살이다. 33은 살해당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숫자는?’

그 숫자는 바로 죽음을 알리는 숫자다. 강은 이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이마에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했을 때, 평범한 자연사를 예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의 이마에만 숫자가 나타나는 것이리라. 한 번 시작하자, 생각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이 숫자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귀신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굿이라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마에 숫자가 나타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쫓아가며 당신은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조언이라도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다음 날부터 강은 사람들의 이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강은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의 이마에 커다란 1이 쓰인 것을 보았다. 바쁜 출근길이었지만, 강은 도저히 그 아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강은 남자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아이는 강의 동네에서 지하철 열 정거장이 넘는 곳에 있는 중학교에 도착했고, 강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마에 1을 달고 다니는 것이 그 남자아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문을 들어선 남자아이에게 어깨동무를 거는 다른 아이, 그리고 그 아이들이 합류한 또 다른 그룹의 아이들의 이마에도 1은 모두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