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 109일., 110일., 111일., 112일., 113일., 1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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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일.

 

 

 

정신이 든다. 9시 32분. 순식간에 침대를 빠져 나와 대충 옷을 걸친다. 화분을 들고 달려 내려가 차에 올라탄다. 아침 해가 밝아 눈이 부시다. 인희 집으로 간다. 인희 집 앞에 차를 대충 세우고는 헐떡이며 계단을 오른다. 인희 방으로 바로 달린다. 그곳에 인희가 있다. 호랑이 잠옷을 입고 인희가 있다. 인희 왼 손에 하얀 플라스틱 병이 들려있다. 인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곳으로 갔다. 인희는 이제 깨지 않는 잠을 잔다.

 

 

 

인희 오른손에 들린 사진. 사진에서 인희와 내가 활짝 웃는다. 나는 뒤에서 인희를 안고 미소를 짓는다. 인희는 내 손을 잡고 내 어깨에 뒷머리를 기댄다. 함께 비치체어에 앉아 온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짓는다.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케이크에 긴 초 다섯 개가 탄다. 샴페인과 소주 병이 카메라 플래쉬에 반짝인다. 인희는 마지막에도 함께하던 시간을 추억하며 떠난다. 나는 목 놓아 운다.

 

 

 

인희와 나는 예전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둘 다 서른이 넘었다. 주변 사람들은 오로지 결혼 이야기만 해댔다. 나는 부모님과 연락을 잘 안하고 살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인희 부모님은 강경했다. 꼭 시집을 가야 한다고 선 자리를 자주 알아왔다. 인희는 곤란해했다. 부모님이 실망하는 것은 싫지만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인희는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나 어쩌면 좋니.

 

내일 부모님 고향에서 올라오신대.

 

나 어떻게든 선 자리에 끌고 가려나 봐.

 

정말 이제 어떡해?

 

 

 

나는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같이 울었다. 인희 집으로 건너가 인희를 끌어 안고 같이 울었다. 약한 짐승처럼. 인희 부모님은 결혼을 끈질기게 밀어 부쳤다. 참다 못한 인희는 내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했다. 부모님은 그 대신 욕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그리고 결혼을 더 서둘렀다. 인희는 부모님을 피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희 부모님은 인희가 수업하는 도중에 교실로 찾아가 끌고 나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여선생은 선 시장에서 아주 잘 팔리는 종목. 선 자리는 끝도 없이 들어왔다. 인희는 잘 포장된 선물처럼 끌려갔다. 대화는 주로 부모님이 했다. 인희는 중간에 도망을 가기도 했고 그냥 창 밖만 바라보고 한 마디도 안 하기도 했다. 인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선을 보고 나면 부모님을 따돌리고 옥탑으로 왔다. 그때마다 인희는 내 품에서 울기만 했다. 인희 부모님은 쉴 새 없이 압박했다. 결혼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선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 인희는 한참을 울고 말했다.

 

 

 

나가자.

 

아무도 모르게 외국으로 나가자. 응?

 

나 이렇게는 못 살아.

 

엄마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안되겠어.

 

도망가자.

 

도망가서 둘이서만 살자.

 

너 아니면 싫어.

 

 

 

나는 가끔 미연언니 웃음에서 인희를 봤다. 하지만 그때 인희는 미연언니의 표정으로 미연언니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겁쟁이였다.

 

 

 

109일.

 

 

 

정신이 든다. 7시 14분. 순식간에 침대를 빠져 나와 대충 옷을 걸친다. 아직은 아침이 쌀쌀하다. 화분을 들고 달려 내려가 차에 올라탄다. 아침 해가 밝아 눈이 부시다. 인희 집으로 간다. 인희 집 앞에 차를 대충 세우고는 헐떡이며 계단을 오른다. 인희 방으로 바로 달린다. 그곳에 인희가 있다. 호랑이 잠옷을 입고 인희가 있다. 인희 왼 손에 하얀 플라스틱 병이 들려있다. 인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곳으로 갔다. 인희는 이제 깨지 않는 잠을 잔다.

 

 

 

인희는 또 선을 보고 옥탑으로 찾아왔다. 나는 힘없이 인희를 끌어안았다. 인희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도망도 못 가는 겁쟁이를 여전히 아껴줬다. 인희는 거의 날마다 옥탑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한참을 울고 또 울다 부서질 듯이 부둥켜 안고 잠이 들었다.

 

인희는 긴 휴가를 냈다.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속초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로 손을 잡았다. 긴 시간을 말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겨울이 끝나간다고는 해도 바닷가는 서늘했다.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한 사람은 앞만 보고 걸었고 한 사람은 옆 사람의 옆 얼굴만 보고 걸었다. 인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봤다. 인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내 목을 끌어 안았다.

 

 

 

110일.

 

 

 

정신이 든다. 오전 6시 58분. 순식간에 침대를 빠져 나와 대충 옷을 걸친다. 화분을 들고 달려 내려가 차에 올라탄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순식간에 달려간다. 아침 해가 밝아 눈이 부시다. 인희 집으로 간다. 인희 집 앞에 차를 대충 세우고는 헐떡이며 계단을 오른다. 인희 방으로 바로 달린다. 그곳에 인희가 있다. 호랑이 잠옷을 입고 인희가 있다. 인희 왼 손에 하얀 플라스틱 병이 들려있다. 인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곳으로 갔다. 인희는 이제 깨지 않는 잠을 잔다.

 

 

 

인희는 휴가를 길게 얻었다. 나는 휴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인희는 옥탑에 건너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아침에는 인희가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일을 끝내면 연구소 앞에서 인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까지 같이 걸었다. 연구소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40분이 넘게 걸린다. 인희는 함께 걷고 싶어했다. 걸으면서 하루 종일 한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줬다.

 

 

 

아침에는 대청소를 했거든.

 

근데 막상 청소하려고 하니까 집이 생각보다 너무 깨끗하더라고.

 

평소에 청소 엄청 많이 하나 봐.

 

그래도 일단 시작한 일 끝까지 하려고 온 집안에 먼지도 다 털고 이불도 볕에 말렸어.

 

아 그리고 매트리스도 꺼내서 털었는데 먼지 엄청 나더라.

 

구석구석 다 쓸고 닦았어.

 

집에 가서 봐, 막 번쩍번쩍 한다고.

 

 

 

인희는 미래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즐겁고 신나고 아름다운 세상을 산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웃고 있는 인희 머리 뒤로 노을이 걸려 있었다. 붉었다.

 

 

 

111일.

 

 

 

정신이 든다. 4시 7분. 순식간에 침대를 빠져 나와 대충 옷을 걸친다. 화분을 들고 달려 내려가 차에 올라탄다. 어둑어둑한 하늘 한 켠이 점점 밝아진다. 인희 집으로 간다. 인희 집 앞에 차를 대충 세우고는 헐떡이며 계단을 오른다. 인희 방으로 바로 달린다. 그곳에 인희가 있다. 호랑이 잠옷을 입고 인희가 있다. 인희 왼 손에 하얀 플라스틱 병이 들려있다. 인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곳으로 갔다. 인희는 이제 깨지 않는 잠을 잔다.

 

 

 

인희의 휴가가 끝나갔다. 인희는 여전히 즐겁게 떠들고 즐겁게 손을 잡고 즐겁게 나를 배웅하고 즐겁게 마중 나왔다. 하지만 그 즐거운 모습이 어쩐지 슬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