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일., 75일., 7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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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일.

 

 

 

동네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비명을 질러가며 웃어댄다. 나는 불과 술의 마녀. 불타는 세상을 안주 삼아 술에 취한다.

 

아침부터 불을 지르고 불을 보며 웃는다. 성냥팔이 소녀는 멍청한 년이다. 고작 성냥 따위에 불을 붙이니 얼어 죽지. 네 몸이 따뜻해지려면 세상을 태워야 한다.

 

나는 언제나 불을 지르며 웃는다. 타오르는 건물을 보면 몸이 따뜻해진다. 저 건물 안에 있던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꿈이, 누군가의 사랑이 불타오른다. 몽롱한 정신을 가늠하면 눈이 풀린다. 숨을 몰아 쉬면서 의미 없는 신음을 흘린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간다. 혼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 언제나 둘이 있어야 느낄 수 있던 감각. 멍해진 정신으로 미소를 짓는다. 나는 확실히 미친 것 같다. 나는 미연언니와 함께였던 시절로 돌아간다.

 

 

 

미연언니는 과격했다. 그 과격한 성정이 미연언니 성정인지 아니면 세상을 떠돌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운 성정이 뒤섞여 나타난 특징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미연언니는 과격한 스킨십을 좋아했다. 과할 정도로 좋아했다.

 

외박을 하고 온 날에는 언제나 퀴퀴한 남자냄새가 났다. 그런 날에는 내 곁에도 못 오게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끊임없이 나를 볶아댔다. 나는 키가 큰 편이지만 미연언니는 더 컸다. 나는 꼼짝 못하고 붙잡혀 헐떡이는 수 밖에 없었다. 싫지만은 않았다.

 

고작 1년. 살면서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머리 속에서 터져나갔다. 미연언니는 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물론 남자생각이 안 나는 날만. 나는 언제나 술에 춤에 미연언니에 취해있었다. 현실은 멀게만 느꼈다. 미연언니는 항상 굶주려 있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슈퍼 포식자. 아무리 만족해도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끌려 다녔다. 그렇게 미연언니는 나를 길들였다.

 

그리고 나는 싫다고 하면서 행복해했다.

 

 

 

나는 그 미연언니를 다시 느끼고 있다. 불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보며 미연언니를 느낀다. 터져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미연언니를 느낀다. 쉼 없이 경보가 울리는 차를 보며 미연언니를 느낀다. 미연언니는 파괴자이며 고문관이며 정복자였다.

 

 

 

75일.

 

 

 

종종 가스통이 있는 집이 있다. 그런 집에 불이 붙으면 화려하게 집이 날아가 버린다. 일층부터 건물이 박살 난다. 터져나간 창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벽돌이 날아다닌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기댈 곳을 잃은 벽이 비틀거리다 서로 머리를 맞댄다. 그렇게 순식간에 건물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는 지저분하게 쌓인 콘크리트 덩어리와 불타는 가구들만 남는다.

 

폭발은 방화와 다른 쾌감을 준다. 방화가 끈적끈적한 애정이라면 폭발은 화려하고 격렬한 섹스다.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폭발한 건물 파편에 맞아 눈이 멀기도 하고 차에 불이 옮겨 붙어 차 안에서 타 죽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죽어도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내방 침대에 누워있다. 오로지 고통만 기억에 남는다.

 

허무하다. 텅 빈 가슴 한 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나. 점점 무감각해진다. 술을 마셔도 채울 수 없다. 나를 죽여도 채울 수 없다. 세상을 죽여도 채울 수 없다. 자위를 해도 채울 수 없다. 무얼 하든 부족하다.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

 

 

 

79일.

 

 

 

이제 뭘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박혀있는 공허를 지울 수 없다. 불을 질러도 술을 마셔도 아무런 희망 없는 나날이 지나간다.

 

이런 삶이 사람의 삶일까. 아무 의욕이 없다. 기운이 없어 불도 못 지르겠다. 차라리 오늘부터 생활을 만들어 볼까. 평범한 사람처럼. 멀쩡한 사람처럼. 어차피 이 세상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마녀가 되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이제 나는 뭘 해야할까.

 

무력하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하얀 천장에 묻은 얼룩을 하나하나 핥듯이 그 굴곡을 무늬를 눈에 새긴다. 이곳에 누워 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쉰다. 무력한 마음에 녹아 내릴 것 같다. 숨이 막힌다.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정리한다. 깔끔하게 가르마를 따라 넘겨 정리하고 둥근 빗에 윗머리를 말아 드라이로 볼륨을 넣는다. 고데기로 둥글둥글 말아 웨이브를 준다. 기초화장을 하고 색조화장도 한다. 눈썹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다. 그림을 다 그려 넣고 나니 인상이 조금 딱딱해 보인다.

 

화장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 입는다. 오늘은 인희가 사준 옷들로 꾸민다. 흰색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검정색 무릎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는다. 블라우스는 치마 안으로 넣어 단정하게 입고 양 손 소매 단추를 채운다.

 

이제 뭘 하지. 배가 고프니 일단 장을 보러 가자. 그리고 밥을 먹어야겠지. 밥을 먹으면 뭘 하지. 취미를 만들어볼까. 음악을 듣거나 비치체어에 누워 추억을 더듬거나 책을 읽거나 어쩌면 가끔은 침대에 틀어박혀 성감대를 더듬거나. 거울에 비친 날 보며 그 옆에 서있던 사람을 그린다. 그 작고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그 사람이 지금 날 본다면 뭐라고 할까.

 

 

 

언제나 인희는 내 패션 감각에 불만이 많았다. 같은 옷을 입어도 더 예쁘고 멋지게 입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공대생 스타일을 고집했다. 도대체 어떻게 입어야 더 예쁘고 멋진지 도무지 파악하지 못했다.

 

 

 

이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까만 스타킹을 신고 짙은 파란색 플랫슈즈를 신는다. 거울에 비친 나를 살핀다. 머리나 얼굴은 직장여성인데 옷은 대학생. 아니, 면접 가는 대학 졸업반. 신발이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귀찮다. 오늘은 이쯤에서 만족하자.

 

우아하게 화분을 들고 차를 찾아간다. 마치 여왕이 신사에게 손등을 내밀 듯 조신하게 조수석 창문을 박살낸다. 제한속도 따위 전혀 지키지 않고 폭주하여 마트에 도착한다. 카트를 끌고 본격적으로 장을 본다. 오늘 점심에는 스파게티를 해야겠다. 면을 고르고 버섯을 고르고 베이컨을 집어 든다. 우유와 생크림을 찾아낸다. 브로콜리를 한 덩이 싣는다. 간 마늘 한 통을 찾는다. 양파를 찾아 헤맨다. 필요한 재료를 다 챙겨 돌아가다 문득 주류코너에 발길이 머문다.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하다 힘겹게 지나친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못내 아쉽다.

 

물을 끓이면서 양파를 다듬는다. 다듬은 양파를 작게 썰어둔다. 베이컨과 버섯도 적당히 썰어둔다. 스파게티 면을 삶는다. 커다란 프라이팬을 꺼내 베이컨을 볶는다. 기름이 적당히 나오면 마늘과 양파를 넣어 볶는다. 우유와 생크림을 적당히 섞어 넣는다. 소스가 끓는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삶고 있는 면을 한 가닥 던져 벽에 붙인다. 잘 익은 것 같다. 면을 건져 프라이팬에 옮겨 잠깐 볶는다. 면 삶은 물에 브로콜리를 살짝 대친다. 프라이팬에 볶은 스파게티를 그릇에 옮기고 브로콜리를 장식한다. 맛을 본다. 조금 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

 

상을 차린다. 피클도 없이 스파게티만 먹는다. 한 가닥 한 가닥. 평화롭다. 어제는 가스통에 불을 붙이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터져서 정신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