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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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아침에 일어나면 한숨이 나온다. 또 하루다. 지긋지긋하다. 같은 방에서 깨어나기 싫어 숙소를 여기저기 옮겨봐도 소용없다. 호텔에서 자도 모텔에서 자도 깨고 나면 내 옥탑. 밤을 새보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정신을 잃고 내방에서 깨어난다. 지금까지 찾아낸 불변의 법칙 단 한가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시계 태엽을 감듯이 돌아온다. 증명할 방법은 없다. 주변 사물 모두 되돌아가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대부분 7시가 넘어 일어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에 알람시계를 맞춰봤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 비디오 카메라를 구해다가 촬영을 해도 역시 카메라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려나. 외로운 마음에 며칠째 DVD방에서 영화를 본다. 세상 참 좋다. 고전부터 최신까지 온갖 영화가 다 모여있다니. 물론 여전히 호러, 스릴러 위주로 보고는 있지만.

 

하루 일과는 대강 비슷하다. 일어나면 빵을 먹고 대충 씻고 차를 훔쳐 마트에 간다. 요즘에는 옷 입기도 귀찮아서 골라 입지도 않고 그냥 손에 잡히는 옷을 입는다. 속옷에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가기도 한다.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뜬금없이 긴 코트를 입기도 한다. 참 편하게 산다.

 

점심을 차려먹고 책을 읽거나 DVD를 보러 간다. 사실 책은 잘 안 읽는다. 보드카를 끌어 안고 뒹굴다 정신이 깨어나면 내방에서 천장이 날 맞이한다. 다행이다. 술이 완전히 취해 다음날 아침 처음 보는 침대에서 일어날 일은 없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먹고 술을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여전히 내 몸은 아름답다. 숙취도 없다. 피부도 나빠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몸은 늙지 않는 듯. 이제 며칠이나 여기 살았는지 가물가물하다. 술에 취해 잠들다 보니 날짜감각이 흐려진다. 어쩌면 기억이 흐려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은데 좀 멍하다. 아빠랑은 다르게.

 

 

 

너는 머리가 좋으니 공부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렴.

 

이제는 여자도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세상이야.

 

너는 내 딸이다.

 

당연히 잘 해야 해.

 

 

 

아빠도 머리가 좋았는지 친가 친척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을 나왔다. 아빠의 최종 학력은 경영학 석사. 화학을 전공한 아빠는 할아버지 성화를 못 이겨 연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경영을 배웠다. 아빠는 내가 집안에서 최초로 박사가 되길 원했다.

 

어린 시절 집은 그럭저럭 잘 살았다. 아빠는 잘 나가는 회사 전무였다. 전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다니는 연구소에 무슨 전무라는 작자가 놀러 올 때마다 온 직원이 난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아빠도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끔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아빠 회사에 갔다. 커다란 종이 봉투에 속옷이나 양말이나 새하얀 셔츠를 챙겨갔다. 아빠는 언제나 바빴고 집에 없는 날도 많았다. 아빠 회사에서 만나는 오빠 언니들은 나한테 사탕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고 주스도 사줬다. 다들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아빠가 나타나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인사를 했다. 따님이 참 귀여워요. 전무님 좋으시겠어요. 내가 귀여우니까 좋다는 말일까 전무니까 좋다는 말일까. 아빠는 맨날 일만하고 나랑은 안 놀아줬다. 하지만 아빠 회사에 가면 오빠 언니들이 잘 놀아줘서 나는 엄마한테 아빠 회사 가자고 때를 썼다. 엄마는 곤란해 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듯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한테 연락도 안하고 엄마랑 아빠 회사에 찾아갔다. 엄청 오랜만에 갔던 것 같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을까. 사탕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고 주스도 사주던 오빠 언니들이 그날은 아무것도 안 사줬다. 나랑 놀아주지도 않았고 잘 웃지도 않았다. 아빠는 회사에 없었다. 엄마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엄마한테 아빠 어디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묵묵히 내 손을 끌고 집으로 갔다. 엄마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더 물어보면 혼날 것 같았다.

 

조용히 내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빠. 동그란 얼굴에 네모난 안경을 쓰고 언제나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아빠. 머리카락이 남들보다 모자라고 눈이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만하면 잘생겼지.

 

해가 떨어지고 엄마랑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방 밖이 시끄러워서 잠이 깼다. 무슨 일인지 엄마랑 아빠가 싸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주로 엄마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 이름이 자꾸 나왔다. 내가 뭘 어쨌다고.

 

 

 

역시 멍하니 앉아 있으니 옛 생각만 난다. 찬물에 머리에 끼얹는다. 정신이 번쩍 들……지는 않고 멍했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깨는 기분이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밖에 나가기도 싫고 매일 똑같이 생긴 구름을 보는 것도 지겹다. 대충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문을 열고 환기를 한다. 가끔 인희랑 옥상에 펴놓고 누워있곤 하던 비치체어를 꺼낸다. 파라솔을 꺼내 펴고 귀를 이어폰으로 틀어막고 편하게 누워 휴가를 즐기기로 한다. 그래 언제 또 이렇게 여유를 부려보겠나. 바람이 솔솔 부니 시원하다. 선탠이라도 할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하얗게 질릴 테니 그만 둔다.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한다. 그저 귀에서 보컬이 장난스럽게 곡조를 탈 뿐이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1] 가사가 너무 태평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난 정말 별일 없이 살고 있다. 이 별일 없지 않은 세상에서.

 

첫 날 느꼈던 공포는 이제 거의 없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체념하고 살지는 않는 것 같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내 태평한 속을 도통 모르겠다. 나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게으르고 바쁜 삶이 싫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부지런하고 바쁜 삶 이외에 다른 삶은 모른다. 그래서 엄마는 날 볼 때마다 비난한다. 그리고 아빠도 엄마랑 똑같다.

 

 

 

어린 시절 엄마랑 아빠는 바빠서 싸웠던 게 아닐까. 아빠가 회사를 그만 뒀을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안 했을 때 둘은 서로 너무 바빠서 싸웠을까 아니면 싸우느라 바빴을까.

 

아빠는 회사를 나가 따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빠가 안면을 터둔 거래처를 빼돌려 새 사업을 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큰 거래처를 몇 개나 빼앗겼다. 회사 입장에서는 아주 분통이 터질 일이었겠다.

 

엄마가 알았을 때는 이미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그래서 회사에 찾아갔을 때 오빠 언니들이 사탕도 과자도 주스도 사주지 않았다. 놀아주지도 웃어주지도 않았다. 난 배신자의 딸이니까. 여섯 살이던 나는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아빠가 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사장이 더 높고 훌륭한 사람 아닌가. 어째서 엄마는 더 힘들다고 할까. 아빠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잖아.

 

처음에는 그래도 좋았다. 아빠는 웃으면서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아빠한테 두꺼운 봉투를 받으면 웃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아빠가 주는 봉투가 점점 얇아졌다. 그 무렵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가 되던 해 엄마는 더 바빠졌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엄마는 집에서 반찬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아빠를 기다렸다. 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엄마는 아빠랑 같이 출근을 했다. 나는 아빠 차를 타고 학교로 갔다. 친구들은 차를 타고 오는 나를 부러워했다. 담임선생님은 뚱뚱하고 무서웠다.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나만 마지막에 남아 기다렸다. 선생님은 다들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있을 시간인데 나만 남아서 퇴근을 못한다고 투덜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선생님이다.

 

아빠 차가 학교에 들어왔다. 엄마랑 아빠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나를 태워 집에 갔다. 차 안에서 엄마랑 아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말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라 텔레파시만 주고 받았을까.

 

언제나 평화롭던 집. 세 식구는 별로 싸우지도 않았다. 세 식구는 안 싸웠지만 두 식구는 싸웠다. 어리던 나는 그 침묵이 싸움인지 몰랐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이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때가 있었다. 서로 말도 안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침묵. 나는 학교에서 침묵의 싸움을 배웠다. 남자애들은 편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들면 욕을 던지고 의자를 던지고 주먹을 던지고 합의금을 던지면 끝이었다. 심지어 그 많은 것들을 집어 던지고는 다음날 축구공만 집어 던지면 다시 친구가 됐다. 여자애들은 복잡했다. 하고 싶은 말은 죽어도 안 했다. 두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이 싸우지 않고 굳이 필요도 없는 파벌을 만들었다. 얼토당토 않은 핑계를 만들어 서로 날을 세우고 노려봤다. 그 뿐이다. 날을 세웠으면 찔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