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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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날씨가 쾌청하다. 오늘도. 어제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역시 마트에서 술을 마시던 장면에서 사라진다. 잘 안 울고 살았는데 혼자가 되니 울고 싶을 때 어찌 그리도 자연스럽게 울 수 있는지 신기하다. 내가 마시는 술의 반은 눈물로 반의 반은 콧물로 반의 반의 반은 침으로 흐른다. 그리고 지금 내방 침대에서 깨어난다. 오늘도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구나. 먹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컴퓨터를 켜고 날짜를 확인한다. 날짜는 오늘도 변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는 아직도 화요일 웹툰은 올라오지 않는다. 화요일은 이제 영영 오지 않는 모양이다. 아 화요일에 신나는 만화 많은데.

 

 

 

14일

 

 

 

오늘도 역시 계란 하나 치즈 한 장 식빵 두 조각. 우유는 채워 둬봐야 소용없겠지. 이런 하루가 열흘이 넘어가니 조금 여유가 생긴다. 세상에 아무도 없다. 시간은 돌아간다. 기억은 쌓인다. 그럼 역시 나는 늙어가는 것일까. 젊은 몸에 늙은 정신을 얹고 살아갈까. 숙취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정신만 유지되고 몸은 돌아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 이대로 살면 죽지도 못하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도 못보고 새로 나오는 책도 못 읽고 체리필터 다음 앨범은 구경도 못해보겠구나. 매일같이 고기나 구워먹고 보드카 들이키며 옛 생각에 통곡하다 잠드는 삶을 살겠구나.

 

흠 다소 아쉬운 것 같지만 나름 나쁘지만은 않아. 문득 다리를 바라본다. 나는 옷을 입으면 잠을 설친다. 물론 술이 취하면 그대로 떨어지긴 하지만 제정신으로는 옷을 입고 못 잔다. 그 버릇 때문에 곤란해지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람도. 입에 빵을 물고 거울을 본다. 현석이 사준 전신거울. 현석이 준 다른 물건은 다 버렸는데 이상하게 이 거울은 십 년이 다 되도록 버리기 싫다. 거울에 비친 내 허리를 본다. 살이 영 안 붙는 체질이라 언제나 바짝 말라 붙은 내 허리.

 

 

 

대학시절 1학년 때에는 장학금을 받아서 학비를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기에 2학년이 되면서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현석을 만났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어깨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눈에 제임스 딘의 미소를 지닌 남자 현석. 요즘 나오는 배우로 치자면 제이 코트니 같은 어깨에 데인 드한 같은 눈에 가이 피어스의 미소라고 하면 엇비슷하려나. 어쨌든 나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압도되어 그가 주문한 ‘아메리카노’ 그 쉬운 단어조차 못 알아들었다. 그는 사장이랑 친한지 편한 말을 주고 받았다.

 

 

 

이 친구 새로 온 알바?

 

 

 

응 어제 일 시작했어.

 

 

 

호오 어린 친구가 장하네.

 

이 옆에 학교 학생인가?

 

반가워요.

 

나 여기 사장이랑 친해서 자주 오는데 앞으로 또 보겠네.

 

 

 

그리고 두 달, 나는 기숙사 살림을 정리하고 현석의 원룸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마트에 간다. 고작 열흘 조금 지났을 뿐인데 딱히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매일이 반복되면 무얼 하든지 의미가 없다. 글을 쓰면 다음날 지워지겠지. 일기조차 쓸 수 없다. 날짜를 세는 것도 의미 없다. 까먹지나 않으면 다행. 운동을 한다 해도 다음날 효과가 없겠지. 정신활동밖에 득이 없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생명의 근원 생각의 근원 부끄러움의 근원 내 추락의 근원 술을 마신다. 쓸데 없다. 정신이 건강 하려면 과거는 잊는 것이 좋지만 아무 할 일이 없다 보니 옛 생각도 많이 한다. 정말 쓸데없다.

 

내가 갇힌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곳에 얼마나 있어야 할까. 한 달? 두 달? 아니면 일 년? 누구처럼 십오 년은 아니겠지. 그래도 그 누구는 시계이자 달력이고 학교고 집이고 교회고 친구이자 애인인 TV라도 있었다. 나는 옥중일기이자 악행의 자서전도 쓸 수 없다. 나는 오대수보다도 불행하다.[1]

 

오늘은 고기 말고 요리를 해야겠다. 마트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다. 버너도 가스도 냄비도 가위도 칼도 도마도 테이블도 의자도. 나는 오대수보다 행복하다. 요리는 언제나 재미있고 좋다. 적어도 인희와 끝나기 전까지는. 첫 요리가 떠오른다. 그 기묘한 요리.

 

카트를 꺼낸다. 동전은 많으니까 넉넉하게 꺼내자. 필요한 물건을 다 싣는다. 테이블, 의자, 버너, 가스, 가위, 칼, 도마, 숟가락, 젓가락, 김치, 돼지고기, 두부, 인스턴트 밥, 팽이버섯, 당면, 생수, 소금, 파, 마늘, 후추, 믹서, 냄비 두 개, 밥그릇, 국그릇, 접시 몇 개, 전원 케이블, 라디오, 파라솔. 그리고 보드카. 실어놓고 나니 웃음이 나온다. 기껏 마트 털어서 한다는 음식이 김치찌개라니. 짐을 끌고 마트 앞 주차장으로 나온다. 전원 케이블을 길게 연결하고 라디오를 켠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2]

 

아쉽게도 이제 계절은 다 가지 못한다. 고기를 볶는다. 썰어둔 김치를 볶는다. 물을 대충 맞추고 끊인다. 아 양파를 안 가져왔네. 대충 먹자. 파를 썰어 넣는다. 마늘을 갈아 넣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하자. 불려둔 당면을 추가한다. 두부와 팽이버섯을 예쁘게 얹는다. 역시 요리는 뭘 해도 예쁘게. 뚜껑을 덮고 잠깐 끓이면 끝나겠지. 신선식품코너에서 밑반찬을 몇 가지 집어온다. 끓는 물에 인스턴트 밥을 삶는다. 다음에는 쌀이랑 밥솥을 꺼내다가 밥을 직접 지어먹어야겠다.

 

 

 

살면서 처음 끓여본 김치찌개는 현석을 먹였다. 입맛이 까탈스런 현석은 내 요리를 먹고 자주 이러쿵저러쿵 품평을 했다. 다음에는 양파를 조금 덜 넣어봐. 양파 많이 들어가면 음식이 달아지거든. 간은 잘 했는데 너무 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통을 부렸다. 현석은 어떻게든 나를 달래려 애썼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어깨가 나를 달래겠다고 아양을 떨면 이런 것이 사랑 받는 기분이라고 믿었다. 웃다가 멍해진 머리로 게슴츠레한 시야를 뚫고 언제나 어깨가 보였다. 그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으면 너무도 편해서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강의에 다녀오면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였던 현석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어깨가 자기 손바닥 두 개 만한 키보드로 먹고 살았다. 그 꼴이 귀엽고 우스워서 나는 현석이 일 하는 모습이 좋았다. 현석이 일을 하고 있으면 나는 요리를 했다. 상을 차리고 수저를 놓고 조용히 뒤에서 다가가 눈을 가렸다. 프로그래밍은 흐름을 탔을 때 생각이 끊기면 상당히 아쉽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코드를 짜맞추고 데이터 흐름을 머리 속으로 계산하다 흐름이 끊기면 다시 처음부터 계산해야 할 경우도 있다. 나도 학교에서 기초적인 프로그래밍을 배웠고 흐름이 끊기면 괴롭다는 점도 알았지만 왠지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어깨를 괴롭히고 싶었다. 현석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내가 여자라는 실감이 들던 시절이었다.

 

 

 

보드카가 쓰다. 김치찌개 때문일까. 밥을 다 먹고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